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2018-06-24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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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4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히9:28)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9:28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나를 넘어서 시대를 살리는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오늘 이 한날 예배하는 가운데서 진짜 복음의 능력과 가치를, 나를 넘어서고 시대 살리는 그런 축복된 복음으로 회복되어지는 그런 응답의 시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제목을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라는 제목으로 복음의 능력과 가치가 어떠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잘 설명하고 있는 제목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훈련에 참여하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정말로 복음으로 행복해 하고 있는가 생각들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음을 주셨는데 이 복음이 나에게 참된 능력이 맞는가 내가 정말로 복음을 사랑하고 있는가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때보다도 주변의 것들이 너무 많이 제게 들어왔어요. 그리고 사실은 관심도, 또 내가 바라보는 부분들이 복음이 아닌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복음에 대한 관심들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 복음에 대한 관심들보다 다른 관심들이 일어나게 되고 또 그러니까 다른 것으로 내 자신을 채우려고 하는 이런 부분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정말로 내게 있는 복음이 능력이 맞고, 내가 정말로 복음으로만 행복한 것이 맞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맞아요. 복음 그 자체가 능력이고요, 그런데 문제는 아! 나의 영적인 상태가 정말로 복음을 사랑하지만, 복음으로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은, 복음만으로 내가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구나 그러니까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있고, 또 어떤 면에서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많은 생각들이 저절로 복잡해지는 것들을 보게 되었어요. 여러분 우리가 복음하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실이 아닙니까? 그 구원은 완전한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19:30절에 “다 이루었다” 선언하셨잖아요. 그리고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때때로 시간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면 그 생각, 그 부분들이 진짜 믿어지고 그 사실들이 정말 붙잡혀진다면 아! 내가 내게 있어서 불필요한 말, 필요 없는 말 들이 너무 많은 것이구나, 또 불필요한 생각들을 내가 너무 많이 하고 있구나 단순해 질것인데, 사실 구원과 함께, 함께 하시는 이 축복의 비밀들을 누리질 못하니까 나도 모르게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거기에 대한 기쁨과 만족함이 있느냐 아니예요. 결국 시간 지나면 지날수록 힘만 빠지게 되더라구요. 아! 그래서 복음은 완전한 것이 맞고, 내게 복음 있는 것은 맞는데 내 영적인 상태가 결국은 낙심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부분들이 내 영적인 상태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을 때는 그것을 가지고 낙심하고 포기하라고 주신 복음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낙심하고 포기하고 있는 부분들을 보게 되어요. 왜 그렇습니까? 결국 그것이 영적인 상태예요. 그래서 정말로 복음의 능력을 누리면 될 것인데 그 사실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지난 주간에 주보에 강단을 통해서 주신 제목이 “예수께로 나아가자”이것이 내가 붙잡아야 될 언약이구나! 새롭게 붙잡게 되었습니다. 많은 경우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능력과 가치를 깨닫지 못해서, 결국은 문제와 사건과 일들을 당하면 환경에 흔들리고 무너지고 넘어지는데요, 진짜 오늘 저와 여러분 복음의 능력과 그 가치를 깨닫고 체험하는 축복의 시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다” 그리고 10:1절에 보면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구약의 제사들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지요. 구약에 제사는 온전하게 할 수 없지만 그러나 10절에 보면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러면서 12절에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4절에 보시면 같이 14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십시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할렐루야!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 말씀했습니다. 이게 복음의 능력이지요. 이게 복음이 가치이지요.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니까 세상 속에서 결국 세상 종 되어서 세상 따라갈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실패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축복된 복음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사실을 다 놓치고 살아가니까 세상 따라갈 수밖에 없고, 그래서 세상 것에 대한 관심과 세상 것으로 채우려고 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것이 진정한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느냐 그렇지 않잖아요. 두주 전이지요 제가 다민족 선교대회에 올라가면서 내비게이션을 설정을 해 놓았는데, 보니까 중간 중간 고속도로 상에 공사가 많아서인지 늘 가던 길로 내비가 인도를 안 해요. 그래서 제가 한번은 내비의 말을 안 듣고 큰 코 다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내비의 말을 철저하게 들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생명 걸 일은 아닌데 그런데 제 마음에 아 이 내비가 그냥 있는 게 아니구나 이 말을 좀 들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날만큼은 시간도 좀 있고 해서 혼자 차를 몰고 가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올라갔는데, 다른 방향으로 인도를 해요. 원래 중부내륙 쭉 타고 여주까지 가서 거기에서 덕평으로 들어가는 길인데, 상주 청원간 그 고속도로로 안내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거기에서 상주 청원안 까지 안가고 중간에 또 국도로 안내를 하고 이렇게 안내를 해요. 그래서 결국 알고 보니까 고속도로 상에 많은 공사가 있어서 우리 교회 팀들이 올라올 때 그 고속도로로 올라왔는데, 많이 지체되는 경우를 당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가 올라가면서 점심시간도 되었고 볼일도 볼 수 있는 일이 있어서 자그마한 동네에 들어갔는데, 동네에 들어가서 볼 일을 보고 식사를 해결하고 들어가야 되겠다 싶어 식당에 들어갔어요. 식당에 들어갔는데 할머니 한 분이 국수를 팔고 장사하고 계시는데 제가 목사입니다 하면서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이분이 자기도 권사라고 하면서 그런데 그 지역에 상황들을 이야기해요. 어떤 상황이냐 하면 감리교도 많고, 장로교도 많고, 또 순복음교회도 많고 그 교회들이 전부 다 싸워서 쪼개어져서 큰 교회들이 제일 커야 50명 정도 될까 말까 하고, 그 10명, 20명 정도도 안 되는 그런 교회들이, 너무 많은 교회들이 있다면서 뼈 있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 동네 다니는 사람들, 교인들은 교회 다니는 것을 전부 다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전부 다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불신자 남편들도 그렇고 교회를 향해서 손가락질 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 한 사람 한사람을 위해서 교회가 그런 부분들에 진짜 복음운동하고 그래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부분들이 있었겠지요. 그런 부분들 가지고 교회 다니는 것을 그냥 부끄러워하면서 교회를 다니고 있다라고 해요.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진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능력이 업청난 것인데, 이 사실을 복음의 능력과 그 가치를 모르니까 교회를 다니면서도, 교회 다니는 그 자체를 성도들이 전부 다 그렇게 생각되어진다 라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그 자체를 부끄러워하면서 교회를 다닐 수밖에 없는 부분을 보면서 제 마음에 참 많은 기도와 함께 진짜 저는 교회 목사로서 교회를 통해서 오직 복음만 가지고, 복음의 능력, 복음의 가치를 아는 성도들로 하나님의 인도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인도받아 나가야 되겠다라는 그런 마음들이 딱 들더라구요. 어떤 면에서 그 동네 사람들이 복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면서도 그 신앙 생활하는 자체를 부끄러워한다는 그 부분들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닐까 왜 그렇습니까? 복음의 능력과 가치를 알지 못해서 세상 앞에서 내 자신이 작아지고, 초라해지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제목처럼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이루신 이 복음의 역사, 이 복음의 능력과 가치가 오늘 새롭게 저와 여러분에 가치 있게 붙잡혀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복음의 능력
그러면 참된 복음의 능력은 어떤 것이냐?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 완전한 능력입니다. 이 복음은 완전한 능력이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완전한 복음이예요. 무엇을 하나 줘 놓고 부족해서 또다시 하나 더 주고 그런 복음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영세 전부터 영원까지 단 하나의 이름을 주셨는데 그리스도 이름만 주셨어요. 왜 그렇습니까? 그 그리스도는 완전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방주 안에 들어가라 방주 안에 들어가면 다 산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야 노아야 안 되겠다. 다른 것으로 옮겨 타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 방주 안에만 구원이 있기 때문에 모세에게 나이 많아 늙은 모세이지만 이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유월절 양의 피를 바르라 했어요. 그 말씀 받들어서 이 모세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발랐을 때에 그 피를 많이 발랐던 적게 발랐던 상관없었어요. 그 피를 바르는 순간에 재앙이 넘어갔어요. 무슨 말입니까? 모세가 어린 양 피를 발랐을 때,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승리를 얻게 되었고요, 모세가 어린 양 피를 발랐을 때, 바로왕은 거기에 완전히 무릎 꿇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 이름은 완전한 능력으로 주신 이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9:28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완전한 복음의 능력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죄를 단번에 끝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어 가시면서도 말씀하셨지요. 요한복음19:30절에 보면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멸망 받을 죄와, 사망과, 사주팔자 운명에서 모든 것을 다 끝냈다라는 사실, 누구이름으로?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다 끝났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불신앙에 빠질 필요가 없어요. 단순히 복음을 믿는 믿음 가지면 되는 겁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 안에 너무 다른 것들이 많이 들어와가지고요, 복음을 단순히 믿는 믿음이 없어요. 그냥 복음을 단순히 믿는 믿음 있으면 우리의 모든 삶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인데, 복음을 단순히 믿는 믿음이 없어요. 여러분, 지난주일 우리 교사 헌신예배 때에 김정숙 권사님 모셔가지고 중요한 메시지를 주셨잖아요. 그리고 목회대학원에서도 우리 김정숙 권사님이 목사님들 대상으로 해서 지금 부산 치유사역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거기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인도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긴 시간을 강의를 하셨어요. 우리 교회에서 이어진 강의 그대로 계속 이어져서 구체적인 실천할 수 있는 부분들까지도 목사님들에게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이렇게 강의를 쭉 들으면서 똑같은 복음을 가지고 있는데 내게는 역사가 없고, 저분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어떻게 저럴까 그리고 또 우리 아이들 보면서도 실제로 많은 영상들 보면서 증인들을 봤잖아요. 멘탈 환자들, 또 암 환자들, 실제로 말씀이 들어가니까 살아나는 부분들을 우리가 확인을 했잖아요. 그들도 똑같이 내가 가진 복음하고 똑 같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왜 역사가 일어나고 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차이는 뭐냐 하면 다른 게 아닙니다. 단순하게 그냥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 거예요. 그게 능력이지요. 그리고 강단을 통해서 말씀 받게 될 때에도 그 말씀을 단순하게 아멘으로 받고, 또 단순하게 그 말씀을 전하니까 그 말씀을 받는 사람도 단순하게 받고, 그러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들과 우리의 기준과 이리 견주고, 저리 견주고 해서 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말씀을 받아요. 뭐가 그리 복잡한지 몰라요, 단순하게 보고 믿으면 될 것인데 아멘하고 끝나면 되는 것인데, 뭔가 거기에 붙여요. 아!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지 못하고 있구나... 마지막 금요일 날 오전강의로 마쳤는데, 금요일날 오전에는 우리 거기에 참여한 렘런트들과 목사님들 팀을 조를 짜 가지고 기도수첩, 그날의 기도수첩을 가지고 어떻게 말씀을 붙잡는가 그 포럼들을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부산에서 훈련받는 렘런트들이 포럼하는 부분들과 우리 목사님들과의 포럼에서 무엇이 다른가 하면 우리는 뭔가 많이 덧붙이고, 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포럼을 하는데 아이들은 말씀 나온 그대로 받아서 그대로 포럼해요. 아 이게 다른 거구나! 진짜 복음 앞에 우리가 좀 단순해 지십시다. 강단 말씀 받으면 이리저리 생각하지 마시고요, 하나님이 주신 음성으로 아멘하고 받으면 우리의 모든 삶에 그 역사는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뭔가 모르게 우리 안에 너무 다른 것들이 많이 가득 차 있어 가지고, 그게 결국 틀린 것이고 다른 것이고, 망할 것인데 그런 부분들 가지고 말씀을 제대로 못 받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사들을 체험을 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현장을 나가면서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복음은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 수준으로 복음을 보지 말고요, 하나님이 주신 복음은 부족함이 없고 충분한 것입니다. 연약함이 없고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할 수 있어요. 그렇잖아요.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 인생은 연약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복음은 연약한 것이 아니예요. 완전한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 가지고 요한복음 20장에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어린양을 치라” 귀중한 후대에 대한 언약을 주셨지요. 거기에 예수님 찾아오셔 가지고 “너 왜 그렇게 했어”하고 말씀하지 않았어요. 묻지 않았어요. 배반하고 떠나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오셔 가지고 하나님이 언약을 주신 거예요. 그것 묻지 아니하고 ...우리 인생은 베드로처럼 연약해서 넘어질 수 있어요. 우리 기준으로 두지 마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역사들을 나의 기준으로 붙잡기 바랍니다. 도마도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의심했잖아요.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좋다 너의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만져보도록 했잖아요. 여러분 꾸지람 하지 아니하시고 그냥 찾아오셔서 우리도 도마처럼 의심할 수 있고, 베드로처럼 연약해서 부인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내게 완전하신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기준에서 복음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음은 완전한 능력이라는 사실을 붙잡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연약하고 부족하고 넘어지고 실수할 수 있어요. 그러나 복음은 충분한 것입니다. 완전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들이 인간관계들 아닙니까? 인간관계들을 통해서 우리가 어떨 때는 잠 못 이룰 때도 있지요. 사람들이 보면... 그런데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크게 걸려드는 부분들이 인간관계 문제이데, 저도 인간관계 딱 부딪혀보면서 생각을 바꾸었었어요. 아! 그럴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아닌가? 하나님이 해결하시면 충분히 해결하실 수 있는 것인데, 왜 하나님이 그냥 내게 붙이셨을까 생각을 바꾸니까 여유가 생겨요. 그리고 그 속에서 감사가 나와요. 아, 하나님께서 내게 있는 이런이런 부분들을, 내가 못난 이런이런 부분들을 하나님께서 제대로 인도받으라고 이런 사람을 내게 붙이셔서 나를 인도하시는구나, 그 부분이 보이니까 감사가 되어지고 평안함이 누려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나는 연약하고 부족해서 넘어질 수 있지만 내게 주신 복음은 충분한 것이고 완전한 것입니다. 복음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인간관계를 넘어서지 못할 만큼 복음은 부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내게 주신 복음이 완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오늘 단번에 이루신 구원의 역사, 무슨 말입니까? 완전한 것이라는 사실, 이 사실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유일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얻는 유일한 이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실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많은 역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난 저와 여러분이 결국은 생명 얻는 길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 그 이름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요한복음 20:31에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성경을 왜 기록했느냐?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지 많은 역사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이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요 그 이름을 힘입어서 뭐요?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이 성경을 기록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역사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오직 성경은 한 가지, 단 한 가지, 우리에게 생명 얻는 유일한 이름은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로만 저와 여러분, 하나님 떠난 인생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리스도로만 죄로 인한 저주와 재앙에서 해방 받게 되고 그리스도로만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요한일서 5장 5절에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오신 사실을 아는 자라야 세상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생명 얻는 길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없다 했습니다. 사도행전 4: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말씀했습니다. 시대의 재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유일한 복음을 놓쳐버리고 있는 것이 시대의 재앙입니다. 다른 복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지금 시대의 재앙입니다. 율법을 말하고. 율법은 좋은 것이지요. 그런데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는다, 율법주의를 말하고. 또 어느 종교나 다 가지면 되는 것 아니냐, 종교다원주의를 말하고. 뭔가 꼭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것을 강조하고. 갈라디아서 1:6~7에 보면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 유일한 복음은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복음입니다. 무엇보다도 정말로 내가 복음을 가지고 있는가 생각하시고 그러면 내가 복음을 놓치고 있는 나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여러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인생에 복음이 능력으로, 응답으로, 축복으로 누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완전한 복음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복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유일한 복음이냐? 생명 얻는 유일한 복음이라는 사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세 번째로 복음의 능력이 어떤 것이냐? 이 복음의 능력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3:8에 지난주에도 살펴보았습니다만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어제 하나님 자녀들을 지키셨고 오늘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할 때 지금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영원토록, 무슨 말입니까? 세계복음화하고 주님 이 땅에 다시 오실 그 날까지 마태복음 28:20에 보면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했습니다. 어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키셨고 오늘은 그 이름으로 나아갈 때 지금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영원토록,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세계복음화하고 재림주로 오실 그 날까지 마태복음 28:20에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했습니다. 그러면 어제, 오늘, 영원히 동일하신 이 그리스도를 오늘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기도입니다. 어제 역사하셨던 그리스도, 오늘 성령으로 나와 함께 하시고 세계복음화한 후에 재림주로 오시는 그날까지 함께 하시는 그 그리스도를, 영원히 동일하신 그 그리스도를 지금 오늘 내가 누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게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시공간을 초월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시간을 초월한 역사, 기도할 때 체험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그 축복된 역사들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지난 날 그리스도 통해서 구원 받았습니다. 오늘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세계복음화한 후에 재림주로 오시는 그날까지, 세상 끝날까지 그 그리스도는 나와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복음 안에 어마어마한 축복된 역사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것을 우리는 다 놓치고 살아갑니다. 아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놓치고 살아갑니다. 지난주 월요일에 제가 밤마다 진행되는 중남미 전도학교에 갔다가 차를 몰고 나오기 위해 차로 갔습니다. 마침 차를 안내하는 아저씨가 목사님, 차키가 안에 있습니다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으레 그냥 안에 있다니까 안에 있는 줄 알고, 보니까 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키를 확인 안 하고 그냥 시동을 걸었습니다. 시동이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왔습니다. 집에 와서 이제 시동을 끄고 일단은 키가 있어야 문을 잠그고 나가지 않습니까? 그때 제정신이 들어서 키를 보니 키가 없어요. 이게 어디 갔나 싶어서. 그런데 분명히 안에 있는 건 맞습니다. 왜냐? 시동이 걸렸거든요. 키가 안에 없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는데 키가 안에 있으니까 시동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집에 와서 세워 놓고 아무리 키를 찾아도, 이게 카드키기 때문에 납작하지 않습니까? 키를 암만 찾아도키가 없습니다. 안 보입니다. 도저히 못 찾겠습니다. 한참 찾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생각나는 게 제 휴대폰이 자동차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휴대폰으로 문 잠그고 문 열고 다 되거든요. 참 좋지요. 그만큼 발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휴대폰으로 문을 잠그고 들어갔습니다. 키가 어디 있을까? 늘 생각이 키에 있습니다. 이 키가 어디에 있을까? 아니, 반드시 그 차 안에 시동 걸리는 걸 보면 키가 있는데 어디 있을까? 밤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 밝으면 키를 찾아봐야겠다 싶어서 그냥 들어갔어요. 문 잠그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차에 갔습니다. 키가 안에 있다는 그 부분이 늘 마음에 신경 쓰이게 만들더라고요. 날이 밝았는데 키를 암만 찾아도 못 찾겠습니다. 그래서 그 차를 몰고 키는 또 집에 여유분이 있으니까 여유분으로 있는 키를 가지고 차를 몰고 목회대학원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가가지고 목사님들한테 키 한 번 찾아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다 찾아봤는데 아무도 못 찾았습니다. 아무도 못 찾았어요. 그런데 분명히 안에 있는 것은 맞습니다. 안에 있는 게 맞아요. 그래서 한 이틀 지나서. 아무리 제가 호텔에서 자도 나서도 찾아 보고 또 찾아 보고. 늘 찜찜하잖아요. 있기는 있는데 못 찾으니까. 답답하고. 그래서 차가 올 때쯤 되어서 너무 더럽다 싶어서 세차장에 가서 세차하시는 분에게 차키가 안에 있는데 좀 찾아주십시오 이야기했습니다. 세차도 좋지만 차키를 한번 찾아봐 주십시오. 그런데 세차하는 분도 아무리 찾아 봐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한 사람이 와서, 뭔가 자꾸 차 안을 보니까, 알고 보니까 차키를 찾고 있거든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와서 딱 보니까 어디 딱 있는데 보였습니다. 그래서 찾아냈습니다. 그렇게 차키를 내 주머니에 딱 넣으니까 마음이 안도함이 들고 답답함이 삭 사라졌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으냐?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내게 누려지지 않으니까 뭔가 모르게 답답하고 안타깝고 그렇지 않습니까? 복음이 없는 게 아닙니다. 키가 없는 게 아닙니다. 키가 있습니다. 그런데 키를 찾지 못하니까 뭔가 답답하고 늘 거기 신경 쓰이는 것처럼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는데 복음을 누리지 못하니까 나도 모르게, 뭔가 모르게 그게 답답함으로, 자유롭지 못한 부분 가운데늘 세상 따라갈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두 번째 생각해 볼 부분은 복음은 참된 능력이고 진짜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인데 그 사실을 왜 못 누리느냐? 복음을 누리지 못하는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크게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복음을 누리지 못하는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2. 복음을 누리지 못 하는 나의 문제
여러분, 먼저 전제할 것은 누구든지 복음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못 누리면 자기를 속이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짜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서면, 진실하게 나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복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구원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복음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누리지 못하면 자신을 속입니다. 복음 필요 없는 겁니다. 구원 받을 필요 없는 겁니다. 그건 자기를 속이는 겁니다. 자기를 속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겁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은 뭐냐? 속지 않는 하나님을 속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누리지 못하면 그렇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는데. 그런데 왜 복음을 못 누리느냐? 먼저 첫 번째 이유는 내게 먼저 각인된 인생의 열두 가지 문제 때문에. 에덴에서 있었던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내게 먼저 각인된 인생의 열두 가지 문제 때문에 복음을 못 누립니다. 복음을 놓쳐 버립니다. 그 배경에는 결국은 흑암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 흑암이라는 것은 그냥 단순히 낮에 빛이 있고 밤에 어둠이 있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존재, 영적인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던 천사가 타락해서 결국은 하늘에서 있을 곳을 찾지 못해서 땅으로 내어 쫓긴 바 되었습니다. 이것이 온 인류를 붙잡고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말씀을 듣지 않고 땅으로 내어 쫓긴 바 된 이 악한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인생에게 찾아온 것이, 영적인 사망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 영을 악한 사단이 완전히 장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불신자들은 거기 아예 종 되어서 살아가고 불신자들은 아예 사단을 아비로 섬기고 살아가고. 믿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복음을 누리지 못하면 그 악한 사단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열두 가지 문제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 증거가 뭐냐? 분명히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악한 사단을 아비로 섬기고 살아갑니다. 아예 사단이 가만히 놔둡니다. 건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은 받았다 할지라도 인생의 열두 가지 문제, 그 배경에 있는 사단의 그 영향들을 받게 된다니까요. 그 증거가 뭔 줄 아십니까? 바로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다 옳은 것입니다. 그게 창세기 3장 사건 아닙니까? 내 중심으로, 내 생각이 옳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말해도 내가 옳으면 옳은 겁니다. 유아독존이라 하지요. 여러분, 하나님 외에 스스로 있는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나는 내가 다 맞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모든 관계도 깨어지고. 저는 지난 주간에 제가 혼자 있으면서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 내가 너무나 나 중심이구나,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고 너무나 내 생각대로, 내 중심이구나. 이 부분이 새롭게 발견되더라고요. 결국 그게 창세기 3장입니다. 우리도 거기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그러면서 이게 어떻게 나타납니까? 결국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세상의 눈에 보이는 기준이 뭡니까? 뭔가 육신적인 부분들, 뭔가 물질적인 부분들, 그게 우리의 기준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니,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기준이 되어 있잖아요. 다시 말해서 세상의 것들,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부분들이 우리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든 열심히 살아가는 삶이 결국 성공을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아니, 악한 사단의 영향을 지금도 우리가 받고 있다니까요. 복음 누리지 못하면 누구나 인생의 열두 가지 문제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러면서 결국은 뭡니까? 한계가 올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인생이? 아무리 성공을 위해서 달려가도 인생에게는 결국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계가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런 사람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종교를 찾습니다. 그런데 그게 우상숭배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종교를 찾고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성경에 보면 종교생활하고 우상숭배하면 할수록 거기에는 악한 사단의, 귀신들의 활동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시간이 가면 갈수록 거기에서 온갖 영적인 부분에 완전히 사로잡히니까 거기서 오는 부분들이, 정신적인 문제가 오고, 육신의 무능함이 찾아오고 결국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데 지옥 같은 삶을 살면서 결국 심판받게 되어 있고, 후대에게도 이 부분을 그대로 물려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게 인생의 열두 가지 문제입니다. 이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미 아담, 하와로부터 시작된, 에덴동산에서 이 열두 가지 문제가 시작되었는데 이게 전시간에 급속도로 퍼져서 이게 우리 모든 인생을 붙잡고 있다는 것. 이게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살이하다가 출애굽했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현장 속에서 문제와 사건을 당할 때마다 그들이 어디로 돌아간 줄 아십니까? 결국은 노예근성으로 돌아갔습니다. 애굽의 종살이하던 그 근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문제와 사건을 당할 떼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 뭡니까?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실제로 좋았습니까? 아니잖아요. 노예근성을 못 버린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예근성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복음 누리지 못하게 하는 인생의 열두 가지 문제가 먼저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그 부분들이 복음의 능력과 가치를 누리지 못하도록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알기만 해도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에 복음을 누리지 못하는 나의 문제가 뭐냐? 내게 먼저 들어와 있는 지식들, 내가 세상 살아가면서 그 지식 가지고 체험한 부분들 때문에 경험한 부분들, 또 세상에서 틀린 성공에 대한 부분들. 또 여러 가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런저런 많은 사람들의 말들, 여론이지요. 사람들의 말. 그게 우리 안에 뿌리내려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복음의 능력과 가치를 누리지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 안에 먼저 들어와 있는 지식. 물론 우리에게 지식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세상 지식은 골로새서 2:8에 보면 결국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 했습니다. 그게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라 했습니다. 세상의 지식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영적인 사실을 보는 눈이 감기고 세상 지식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결국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골로새서 2:9에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하면서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적인 지식들이 많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하나님을 아는 데서 멀리 떨어져 갑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세상 지식들. 특히 우리 렘넌트들 이 자리에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어릴 때부터 진짜 말씀의 능력이 심어지는 것이, 세상 지식 이전에 말씀의 능력이 심어지는 것이 너무 중요한 겁니다, 사실. 이 아이들이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는데 사실 말씀 안 듣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사실 말씀이 나도 모르게 각인되는 역사가, 뿌리내리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너무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지식들 가운데 살아가다 보면 그 지식 속에서 나름대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부분들 있지 않습니까? 그게 우리에게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이 있어서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체험이냐 경험이냐?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성공을 위해서 살아가는데 틀린 성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렘넌트들, 성공하기 전에 진짜 중요한, 올바른 성공이 무엇인가를 알고 복음으로, 말씀으로 각인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 성공을 위해서 달려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느 정도 성공합니다. 그런데 그 성공한 그것 때문에 교회를 우습게 보고 말씀 전하는 주의 종들을 우습게 여기고 성도들을 보면 시시하게 보입니다. 교회를 보면 뭔가 답답하고 뭔가 좁아 보이고, 그러면서 신앙 생활 안 하는 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들, 결국 신앙 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그냥 교회 왔다갔다 하는 수준입니다. 결국 문제 생기면 말씀 잡는다고 하는데 그게 됩니까, 사실? 그래서 사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말씀으로 각인되고 올바른 성공이 무엇인가 알고 준비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틀린 성공을 가지고 교회조차 우습게 보고 주의 종들을 우습게 봅니다. 그게 저주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를, 주의 종들을 우습게 보는 그 자체가 저주인데 그렇게 교회가 답답하게 보이고 좁아 보이는 겁니다. 저렇게 해서 굳이 살 필요가 있느냐? 어른들을 봐도, 성도들, 어른들을 봐도 저렇게 신앙 생활을 할 필요가 굳이 있느냐? 이게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것 때문에 나도 모르게 복음의 능력과 가치를 놓쳐 버립니다. 그러면서 또 많은 사람 관계 속에서 이런저런 말들 많이 있지 않습니까? 어제 류목사님 메시지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십 년 살아왔으면 십 년 살아온 만큼 사람들의 말들이, 이런저런 사람들의 말들이 뿌리내려 있다는 것.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몇 년 살았습니까? 살아온 만큼 여러분 주위에 많은 사람의 말들이 우리도 모르게 우리 안에 뿌리내려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뿌리내린 그 결과가 어떻게 드러나느냐? 문제와 사건을 당하면 불신앙으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했습니다.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홍해 앞에 섰을 때에 사실 홍해라는 문제가 딱 앞에 놓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같이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 애굽에서 빠져나온 구원의 역사를 봐야 하는데 앞에 놓인 홍해를 바라보면서, 문제를 바라보면서 문제가 더 크게 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나왔습니까? 전부 불신앙에 빠져서 우리는 건너가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도 그런 부분이 그대로 있습니다, 사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에서 먼저 들어온 지식들, 그 지식 가지고 경험하고 체험한 부분들 대문에, 틀린 성공의 기준들 가지고, 이런저런 사람들의 말들 때문에, 그게 우리 안에 뿌리내려 있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게 문제 딱 당하면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불신앙이 딱 듭니다. 그 속에서 결국은 틀린 판단과 틀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들 때문에 많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
그 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어떻게 복음의 능력을, 가치를 체험하지 못하느냐? 내게 있는 문제가 무엇이냐? 사실은 이미 뿌리내려 있는 영적 문제 때문에. 뿌리내려 있는 영적 문제 때문에. 여러분, 마귀에게 눌려서 일어나는 영적 문제와 그 상처는 우리도 모르게 깊이 뿌리내려져 있어서 실제로 문제를 당하면 결국은 말씀 붙잡는 것보다 그 상처에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 붙잡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만 그런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여러분, 영적 문제에 사로잡히고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 신앙의 성장이 스톱(stop)됩니다. 신앙의 성장이 안 됩니다. 그리고 늘 업 다운(up down)이 심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도 모르게 체질되어 있는 영적 문제 때문에, 마귀에게 완전히 붙잡혀 있는 영적 문제의 상처들 때문에, 이게 내 체질이 되어서 신앙 생활하면서도 업 다운이 계속되는 겁니다. 이 부분 때문에 참된 복음의 능력,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해결하신 그 복음의 능력을, 그 복음의 가치를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지금 앞으로 세 가지 시대가 옵니다. 복음이 없어지고 전도가 사라지는 시대가 옵니다. 두 번째로, 그 결과로 영적 질병의 시대가 반드시 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지금까지 계속 왔고 앞으로 큰 재앙의 시대가 반드시 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분명히 복음이 없어지고 전도가 사라지는 시대, 그 결과로 영적인 재앙이 오는 시대, 계속되어 왔지만 큰 재앙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귀중한 답은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이루신 이 복음의 역사, 이 능력, 이 가치를 깨닫는 데서부터 참된 축복이 시작됨을 믿습니다. 특별히 이 복음의 능력과 가치를 놓쳐 버리면 진짜를 놓쳐버렸기 때문에 가짜를 쳐다보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 자체가 가짜 인생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복음을 회복하게 되느냐? 어떻게 하면 복음을 회복하느냐? 복음을 회복해야 하는데 어떻게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느냐? 한 가지만 제안하겠습니다. 그게 뭐냐? 여러분, 주어지는 말씀 붙잡고 깊은 묵상 속에 들어가십시오.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 붙잡고 깊은 묵상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가지십시오. 어느 정도로 가지면 되느냐? 어느 정도로 가지면 되느냐? 현실적으로 문제를 딱 당하잖아요? 그 문제를 당할 때에 아, 이게 응답의 과정이구나 보일 정도로. 어느 정도로 말씀의 깊은 묵상을 하느냐? 현실적인 문제가 딱 닥치면 아, 이게 언약의 여정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구나 보일 정도로. 문제가 닥치면 하나님은 내게 각인과 뿌리와 체질을 바꾸라는 것이구나 보일 정도로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 속에 들어감으로, 참된 복음을 회복함으로, 복음 놓쳐버림으로 전도가 사라지고 영적인 질병 시대가 오고 더더욱 큰 재앙이 일어나는 이런 시대에 여러분, 이 시대를 살리는 주역으로 저와 여러분이 쓰임 받는 축복된 응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년 6월 24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단 번에, 완전히, 영원히
(히9:38)
서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음이 맞는데 복음을 놓치는 이유는 나의 영적상태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을 누리지 못 하기 떄문에 환경과 문제 앞에서 무너지게 됩니다.
단 번의 제사(히9:28)로 영원히(히10:12), 온전하게(히10:14)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단 번에, 완전히, 영원한 복음의 역사를 붙잡아야 됩니다.
1. 복음의 능력
가. 완전한 능력
1) 영세전부터 영원까지 그리스도 이름만 주심 - 완전한 능력이기 때문에
2)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모든 죄를 끝내심(히9:28) - 불신앙 하지 말고 복음을 있는 그대로 믿는 믿음
3) 우리는 연약하지만 복음은 완전한 것 - 복음이 나의 기준
나. 유일한 능력
1) 생명을 얻는 유일한 방법(요20:31)
2)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만남(요14:6), 죄 문제 해결, 세상을 이김(요일5:5)
다. 영원한 복음(히13:8) - 하나님의 자녀를 지키시고, 영원토록 함께하심(누리는 방법이 기도)
2. 복음을 누리지 못 하는 나의 문제
가. 내 안에 이미 각인 된 12가지 문제
1) 하나님을 떠남으로 모든 사람들은 영적인 사망 - 영을 사탄이 잡고 있음
2) 구원 받았지만 복음을 누리지 못 하면 12가지 문제의 영향을 받게 됨 - 출애굽 했지만 노예근성을 가지고 살아감
3) 나 중심의 삶, 세상의 기준(육신, 물질), 성공을 위한 삶, 한계가 오면 종교를 가짐, 정신의 문제,
육신의 무능함, 지옥 같은 삶, 후대에게 대물림
나. 복음보다 먼저 들어온 지식으로 뿌리
1)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의 지식들이 많이 들어올수록 영적인 것을 못 보게 됨
2) 나름대로의 경험, 체험이 뿌리 내림
다. 틀린 성공 - 복음 없이 성공 하게 되면 교회를 우습게 알게 됨
라. 사람들의 소리 - 문제가 왔을 때 불신앙으로 나타남
마. 뿌리 내려진 영적인 문제와 상처 - 말씀 붙잡기 전에 상처에 집중(신앙의 성장이 멈추게 되고 업다운이 심하게 됨)
결론: 앞으로 세 가지 시대가 오게 됩니다. 복음이 없어지고 전도가 사라지는 시대가 오게 됩니다. 그 결과로 영적 질병의 시대가 오게 됩니다. 그리고 큰 재앙이 오는 시대가 오게 됩니다. 그 답이 단 번에, 완전히, 영원한 복음의 역사를 깨닫고 누리는 것입니다. 복음의 가치를 놓치게 되면 가짜를 쳐다보게 되고 가짜 인생이 됩니다. 복음의 가치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어지는 말씀을 통해 깊은 묵상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복음의 가치를 누리게 됩니다. 문제가 응답의 과정, 언약의 여정이 될 정도로 말씀에 깊이 묵상 해야 합니다. 세 가지 시대 속에서 세상 살리는 응답 누리시길 바랍니다.
● 기도제목
● 말씀실현(실천사항)
● 전도대상자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히9:28)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히9:28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축복을 선언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나를 넘어서 시대를 살리는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오늘 이 한날 예배하는 가운데서 진짜 복음의 능력과 가치를, 나를 넘어서고 시대 살리는 그런 축복된 복음으로 회복되어지는 그런 응답의 시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제목을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라는 제목으로 복음의 능력과 가치가 어떠한 것인가를 우리에게 잘 설명하고 있는 제목입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훈련에 참여하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정말로 복음으로 행복해 하고 있는가 생각들을 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음을 주셨는데 이 복음이 나에게 참된 능력이 맞는가 내가 정말로 복음을 사랑하고 있는가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봤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때보다도 주변의 것들이 너무 많이 제게 들어왔어요. 그리고 사실은 관심도, 또 내가 바라보는 부분들이 복음이 아닌 것들이 너무 많았어요. 복음에 대한 관심들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 복음에 대한 관심들보다 다른 관심들이 일어나게 되고 또 그러니까 다른 것으로 내 자신을 채우려고 하는 이런 부분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정말로 내게 있는 복음이 능력이 맞고, 내가 정말로 복음으로만 행복한 것이 맞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은 맞아요. 복음 그 자체가 능력이고요, 그런데 문제는 아! 나의 영적인 상태가 정말로 복음을 사랑하지만, 복음으로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은, 복음만으로 내가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구나 그러니까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있고, 또 어떤 면에서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많은 생각들이 저절로 복잡해지는 것들을 보게 되었어요. 여러분 우리가 복음하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실이 아닙니까? 그 구원은 완전한 것이지요. 그래서 요한복음19:30절에 “다 이루었다” 선언하셨잖아요. 그리고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때때로 시간마다, 날마다 우리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면 그 생각, 그 부분들이 진짜 믿어지고 그 사실들이 정말 붙잡혀진다면 아! 내가 내게 있어서 불필요한 말, 필요 없는 말 들이 너무 많은 것이구나, 또 불필요한 생각들을 내가 너무 많이 하고 있구나 단순해 질것인데, 사실 구원과 함께, 함께 하시는 이 축복의 비밀들을 누리질 못하니까 나도 모르게 다른 것에 관심을 두고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거기에 대한 기쁨과 만족함이 있느냐 아니예요. 결국 시간 지나면 지날수록 힘만 빠지게 되더라구요. 아! 그래서 복음은 완전한 것이 맞고, 내게 복음 있는 것은 맞는데 내 영적인 상태가 결국은 낙심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부분들이 내 영적인 상태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을 때는 그것을 가지고 낙심하고 포기하라고 주신 복음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 자신들이 스스로 낙심하고 포기하고 있는 부분들을 보게 되어요. 왜 그렇습니까? 결국 그것이 영적인 상태예요. 그래서 정말로 복음의 능력을 누리면 될 것인데 그 사실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지난 주간에 주보에 강단을 통해서 주신 제목이 “예수께로 나아가자”이것이 내가 붙잡아야 될 언약이구나! 새롭게 붙잡게 되었습니다. 많은 경우 복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능력과 가치를 깨닫지 못해서, 결국은 문제와 사건과 일들을 당하면 환경에 흔들리고 무너지고 넘어지는데요, 진짜 오늘 저와 여러분 복음의 능력과 그 가치를 깨닫고 체험하는 축복의 시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다” 그리고 10:1절에 보면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구약의 제사들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지요. 구약에 제사는 온전하게 할 수 없지만 그러나 10절에 보면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러면서 12절에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14절에 보시면 같이 14절을 같이 한번 읽어보십시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할렐루야!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다 말씀했습니다. 이게 복음의 능력이지요. 이게 복음이 가치이지요.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니까 세상 속에서 결국 세상 종 되어서 세상 따라갈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실패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축복된 복음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사실을 다 놓치고 살아가니까 세상 따라갈 수밖에 없고, 그래서 세상 것에 대한 관심과 세상 것으로 채우려고 하고 그러면 그럴수록 그것이 진정한 우리에게 기쁨과 행복을 주느냐 그렇지 않잖아요. 두주 전이지요 제가 다민족 선교대회에 올라가면서 내비게이션을 설정을 해 놓았는데, 보니까 중간 중간 고속도로 상에 공사가 많아서인지 늘 가던 길로 내비가 인도를 안 해요. 그래서 제가 한번은 내비의 말을 안 듣고 큰 코 다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내비의 말을 철저하게 들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생명 걸 일은 아닌데 그런데 제 마음에 아 이 내비가 그냥 있는 게 아니구나 이 말을 좀 들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날만큼은 시간도 좀 있고 해서 혼자 차를 몰고 가면서 말씀을 들으면서 올라갔는데, 다른 방향으로 인도를 해요. 원래 중부내륙 쭉 타고 여주까지 가서 거기에서 덕평으로 들어가는 길인데, 상주 청원간 그 고속도로로 안내를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거기에서 상주 청원안 까지 안가고 중간에 또 국도로 안내를 하고 이렇게 안내를 해요. 그래서 결국 알고 보니까 고속도로 상에 많은 공사가 있어서 우리 교회 팀들이 올라올 때 그 고속도로로 올라왔는데, 많이 지체되는 경우를 당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어요. 제가 올라가면서 점심시간도 되었고 볼일도 볼 수 있는 일이 있어서 자그마한 동네에 들어갔는데, 동네에 들어가서 볼 일을 보고 식사를 해결하고 들어가야 되겠다 싶어 식당에 들어갔어요. 식당에 들어갔는데 할머니 한 분이 국수를 팔고 장사하고 계시는데 제가 목사입니다 하면서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이분이 자기도 권사라고 하면서 그런데 그 지역에 상황들을 이야기해요. 어떤 상황이냐 하면 감리교도 많고, 장로교도 많고, 또 순복음교회도 많고 그 교회들이 전부 다 싸워서 쪼개어져서 큰 교회들이 제일 커야 50명 정도 될까 말까 하고, 그 10명, 20명 정도도 안 되는 그런 교회들이, 너무 많은 교회들이 있다면서 뼈 있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이 동네 다니는 사람들, 교인들은 교회 다니는 것을 전부 다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을 전부 다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불신자들이 불신자 남편들도 그렇고 교회를 향해서 손가락질 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 한 사람 한사람을 위해서 교회가 그런 부분들에 진짜 복음운동하고 그래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부분들이 있었겠지요. 그런 부분들 가지고 교회 다니는 것을 그냥 부끄러워하면서 교회를 다니고 있다라고 해요.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진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능력이 업청난 것인데, 이 사실을 복음의 능력과 그 가치를 모르니까 교회를 다니면서도, 교회 다니는 그 자체를 성도들이 전부 다 그렇게 생각되어진다 라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 그 자체를 부끄러워하면서 교회를 다닐 수밖에 없는 부분을 보면서 제 마음에 참 많은 기도와 함께 진짜 저는 교회 목사로서 교회를 통해서 오직 복음만 가지고, 복음의 능력, 복음의 가치를 아는 성도들로 하나님의 인도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인도받아 나가야 되겠다라는 그런 마음들이 딱 들더라구요. 어떤 면에서 그 동네 사람들이 복음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면서도 그 신앙 생활하는 자체를 부끄러워한다는 그 부분들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닐까 왜 그렇습니까? 복음의 능력과 가치를 알지 못해서 세상 앞에서 내 자신이 작아지고, 초라해지고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제목처럼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이루신 이 복음의 역사, 이 복음의 능력과 가치가 오늘 새롭게 저와 여러분에 가치 있게 붙잡혀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복음의 능력
그러면 참된 복음의 능력은 어떤 것이냐?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 완전한 능력입니다. 이 복음은 완전한 능력이예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완전한 복음이예요. 무엇을 하나 줘 놓고 부족해서 또다시 하나 더 주고 그런 복음이 아니다라는 사실입니다. 영세 전부터 영원까지 단 하나의 이름을 주셨는데 그리스도 이름만 주셨어요. 왜 그렇습니까? 그 그리스도는 완전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방주 안에 들어가라 방주 안에 들어가면 다 산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야 노아야 안 되겠다. 다른 것으로 옮겨 타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 방주 안에만 구원이 있기 때문에 모세에게 나이 많아 늙은 모세이지만 이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유월절 양의 피를 바르라 했어요. 그 말씀 받들어서 이 모세가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발랐을 때에 그 피를 많이 발랐던 적게 발랐던 상관없었어요. 그 피를 바르는 순간에 재앙이 넘어갔어요. 무슨 말입니까? 모세가 어린 양 피를 발랐을 때,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전한 자유와 완전한 승리를 얻게 되었고요, 모세가 어린 양 피를 발랐을 때, 바로왕은 거기에 완전히 무릎 꿇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 이름은 완전한 능력으로 주신 이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9:28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요.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완전한 복음의 능력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죄를 단번에 끝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어 가시면서도 말씀하셨지요. 요한복음19:30절에 보면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이루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멸망 받을 죄와, 사망과, 사주팔자 운명에서 모든 것을 다 끝냈다라는 사실, 누구이름으로?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다 끝났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정말로 불신앙에 빠질 필요가 없어요. 단순히 복음을 믿는 믿음 가지면 되는 겁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 안에 너무 다른 것들이 많이 들어와가지고요, 복음을 단순히 믿는 믿음이 없어요. 그냥 복음을 단순히 믿는 믿음 있으면 우리의 모든 삶에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인데, 복음을 단순히 믿는 믿음이 없어요. 여러분, 지난주일 우리 교사 헌신예배 때에 김정숙 권사님 모셔가지고 중요한 메시지를 주셨잖아요. 그리고 목회대학원에서도 우리 김정숙 권사님이 목사님들 대상으로 해서 지금 부산 치유사역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과 거기에서 하고 있는 일들을 구체적으로 인도받을 수 있도록 그렇게 긴 시간을 강의를 하셨어요. 우리 교회에서 이어진 강의 그대로 계속 이어져서 구체적인 실천할 수 있는 부분들까지도 목사님들에게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이렇게 강의를 쭉 들으면서 똑같은 복음을 가지고 있는데 내게는 역사가 없고, 저분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어떻게 저럴까 그리고 또 우리 아이들 보면서도 실제로 많은 영상들 보면서 증인들을 봤잖아요. 멘탈 환자들, 또 암 환자들, 실제로 말씀이 들어가니까 살아나는 부분들을 우리가 확인을 했잖아요. 그들도 똑같이 내가 가진 복음하고 똑 같은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왜 역사가 일어나고 나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차이는 뭐냐 하면 다른 게 아닙니다. 단순하게 그냥 말씀을 아멘으로 받는 거예요. 그게 능력이지요. 그리고 강단을 통해서 말씀 받게 될 때에도 그 말씀을 단순하게 아멘으로 받고, 또 단순하게 그 말씀을 전하니까 그 말씀을 받는 사람도 단순하게 받고, 그러니까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들과 우리의 기준과 이리 견주고, 저리 견주고 해서 많은 생각들을 가지고 말씀을 받아요. 뭐가 그리 복잡한지 몰라요, 단순하게 보고 믿으면 될 것인데 아멘하고 끝나면 되는 것인데, 뭔가 거기에 붙여요. 아!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지 못하고 있구나... 마지막 금요일 날 오전강의로 마쳤는데, 금요일날 오전에는 우리 거기에 참여한 렘런트들과 목사님들 팀을 조를 짜 가지고 기도수첩, 그날의 기도수첩을 가지고 어떻게 말씀을 붙잡는가 그 포럼들을 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부산에서 훈련받는 렘런트들이 포럼하는 부분들과 우리 목사님들과의 포럼에서 무엇이 다른가 하면 우리는 뭔가 많이 덧붙이고, 많은 생각들을 하면서 포럼을 하는데 아이들은 말씀 나온 그대로 받아서 그대로 포럼해요. 아 이게 다른 거구나! 진짜 복음 앞에 우리가 좀 단순해 지십시다. 강단 말씀 받으면 이리저리 생각하지 마시고요, 하나님이 주신 음성으로 아멘하고 받으면 우리의 모든 삶에 그 역사는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뭔가 모르게 우리 안에 너무 다른 것들이 많이 가득 차 있어 가지고, 그게 결국 틀린 것이고 다른 것이고, 망할 것인데 그런 부분들 가지고 말씀을 제대로 못 받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역사들을 체험을 하지를 못하는 거예요. 현장을 나가면서도.. 여러분 그렇습니다. 복음은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 수준으로 복음을 보지 말고요, 하나님이 주신 복음은 부족함이 없고 충분한 것입니다. 연약함이 없고 완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할 수 있어요. 그렇잖아요.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리 인생은 연약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복음은 연약한 것이 아니예요. 완전한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난 베드로에게 찾아오셔 가지고 요한복음 20장에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어린양을 치라” 귀중한 후대에 대한 언약을 주셨지요. 거기에 예수님 찾아오셔 가지고 “너 왜 그렇게 했어”하고 말씀하지 않았어요. 묻지 않았어요. 배반하고 떠나 베드로에게 다시 찾아오셔 가지고 하나님이 언약을 주신 거예요. 그것 묻지 아니하고 ...우리 인생은 베드로처럼 연약해서 넘어질 수 있어요. 우리 기준으로 두지 마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의 역사들을 나의 기준으로 붙잡기 바랍니다. 도마도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의심했잖아요.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좋다 너의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만져보도록 했잖아요. 여러분 꾸지람 하지 아니하시고 그냥 찾아오셔서 우리도 도마처럼 의심할 수 있고, 베드로처럼 연약해서 부인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내게 완전하신 능력으로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기준에서 복음을 보지 마시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음은 완전한 능력이라는 사실을 붙잡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는 연약하고 부족하고 넘어지고 실수할 수 있어요. 그러나 복음은 충분한 것입니다. 완전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큰 어려움들이 인간관계들 아닙니까? 인간관계들을 통해서 우리가 어떨 때는 잠 못 이룰 때도 있지요. 사람들이 보면... 그런데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크게 걸려드는 부분들이 인간관계 문제이데, 저도 인간관계 딱 부딪혀보면서 생각을 바꾸었었어요. 아! 그럴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 아닌가? 하나님이 해결하시면 충분히 해결하실 수 있는 것인데, 왜 하나님이 그냥 내게 붙이셨을까 생각을 바꾸니까 여유가 생겨요. 그리고 그 속에서 감사가 나와요. 아, 하나님께서 내게 있는 이런이런 부분들을, 내가 못난 이런이런 부분들을 하나님께서 제대로 인도받으라고 이런 사람을 내게 붙이셔서 나를 인도하시는구나, 그 부분이 보이니까 감사가 되어지고 평안함이 누려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나는 연약하고 부족해서 넘어질 수 있지만 내게 주신 복음은 충분한 것이고 완전한 것입니다. 복음 그 자체가 능력입니다. 인간관계를 넘어서지 못할 만큼 복음은 부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내게 주신 복음이 완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오늘 단번에 이루신 구원의 역사, 무슨 말입니까? 완전한 것이라는 사실, 이 사실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유일한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얻는 유일한 이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실은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많은 역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떠난 저와 여러분이 결국은 생명 얻는 길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길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 그 이름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요한복음 20:31에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 성경을 왜 기록했느냐? 바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지 많은 역사들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이 성경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요 그 이름을 힘입어서 뭐요?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이 성경을 기록했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많은 역사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오직 성경은 한 가지, 단 한 가지, 우리에게 생명 얻는 유일한 이름은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로만 저와 여러분, 하나님 떠난 인생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리스도로만 죄로 인한 저주와 재앙에서 해방 받게 되고 그리스도로만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 요한일서 5장 5절에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로 오신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오신 사실을 아는 자라야 세상을 이긴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생명 얻는 길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없다 했습니다. 사도행전 4:12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말씀했습니다. 시대의 재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분, 유일한 복음을 놓쳐버리고 있는 것이 시대의 재앙입니다. 다른 복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지금 시대의 재앙입니다. 율법을 말하고. 율법은 좋은 것이지요. 그런데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는다, 율법주의를 말하고. 또 어느 종교나 다 가지면 되는 것 아니냐, 종교다원주의를 말하고. 뭔가 꼭 죄를 회개해야 한다, 그것을 강조하고. 갈라디아서 1:6~7에 보면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지어다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유일한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 유일한 복음은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유일한 복음입니다. 무엇보다도 정말로 내가 복음을 가지고 있는가 생각하시고 그러면 내가 복음을 놓치고 있는 나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여러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내 인생에 복음이 능력으로, 응답으로, 축복으로 누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완전한 복음일 뿐만 아니라 유일한 복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유일한 복음이냐? 생명 얻는 유일한 복음이라는 사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 되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세 번째로 복음의 능력이 어떤 것이냐? 이 복음의 능력은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3:8에 지난주에도 살펴보았습니다만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어제 하나님 자녀들을 지키셨고 오늘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할 때 지금 성령으로 함께 하시고 영원토록, 무슨 말입니까? 세계복음화하고 주님 이 땅에 다시 오실 그 날까지 마태복음 28:20에 보면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했습니다. 어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지키셨고 오늘은 그 이름으로 나아갈 때 지금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영원토록,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세계복음화하고 재림주로 오실 그 날까지 마태복음 28:20에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 말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했습니다. 그러면 어제, 오늘, 영원히 동일하신 이 그리스도를 오늘 지금 내가 누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기도입니다. 어제 역사하셨던 그리스도, 오늘 성령으로 나와 함께 하시고 세계복음화한 후에 재림주로 오시는 그날까지 함께 하시는 그 그리스도를, 영원히 동일하신 그 그리스도를 지금 오늘 내가 누릴 수 있는 길이 있는데 그게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시공간을 초월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시간을 초월한 역사, 기도할 때 체험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다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그 축복된 역사들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지난 날 그리스도 통해서 구원 받았습니다. 오늘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이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세계복음화한 후에 재림주로 오시는 그날까지, 세상 끝날까지 그 그리스도는 나와 함께 하시겠다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복음 안에 어마어마한 축복된 역사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것을 우리는 다 놓치고 살아갑니다. 아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놓치고 살아갑니다. 지난주 월요일에 제가 밤마다 진행되는 중남미 전도학교에 갔다가 차를 몰고 나오기 위해 차로 갔습니다. 마침 차를 안내하는 아저씨가 목사님, 차키가 안에 있습니다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으레 그냥 안에 있다니까 안에 있는 줄 알고, 보니까 문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키를 확인 안 하고 그냥 시동을 걸었습니다. 시동이 걸리더라고요. 그래서 집에 왔습니다. 집에 와서 이제 시동을 끄고 일단은 키가 있어야 문을 잠그고 나가지 않습니까? 그때 제정신이 들어서 키를 보니 키가 없어요. 이게 어디 갔나 싶어서. 그런데 분명히 안에 있는 건 맞습니다. 왜냐? 시동이 걸렸거든요. 키가 안에 없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는데 키가 안에 있으니까 시동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집에 와서 세워 놓고 아무리 키를 찾아도, 이게 카드키기 때문에 납작하지 않습니까? 키를 암만 찾아도키가 없습니다. 안 보입니다. 도저히 못 찾겠습니다. 한참 찾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생각나는 게 제 휴대폰이 자동차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휴대폰으로 문 잠그고 문 열고 다 되거든요. 참 좋지요. 그만큼 발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휴대폰으로 문을 잠그고 들어갔습니다. 키가 어디 있을까? 늘 생각이 키에 있습니다. 이 키가 어디에 있을까? 아니, 반드시 그 차 안에 시동 걸리는 걸 보면 키가 있는데 어디 있을까? 밤이 너무 깊었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 밝으면 키를 찾아봐야겠다 싶어서 그냥 들어갔어요. 문 잠그고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차에 갔습니다. 키가 안에 있다는 그 부분이 늘 마음에 신경 쓰이게 만들더라고요. 날이 밝았는데 키를 암만 찾아도 못 찾겠습니다. 그래서 그 차를 몰고 키는 또 집에 여유분이 있으니까 여유분으로 있는 키를 가지고 차를 몰고 목회대학원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가가지고 목사님들한테 키 한 번 찾아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다 찾아봤는데 아무도 못 찾았습니다. 아무도 못 찾았어요. 그런데 분명히 안에 있는 것은 맞습니다. 안에 있는 게 맞아요. 그래서 한 이틀 지나서. 아무리 제가 호텔에서 자도 나서도 찾아 보고 또 찾아 보고. 늘 찜찜하잖아요. 있기는 있는데 못 찾으니까. 답답하고. 그래서 차가 올 때쯤 되어서 너무 더럽다 싶어서 세차장에 가서 세차하시는 분에게 차키가 안에 있는데 좀 찾아주십시오 이야기했습니다. 세차도 좋지만 차키를 한번 찾아봐 주십시오. 그런데 세차하는 분도 아무리 찾아 봐도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 한 사람이 와서, 뭔가 자꾸 차 안을 보니까, 알고 보니까 차키를 찾고 있거든요. 그래서 다른 사람이 와서 딱 보니까 어디 딱 있는데 보였습니다. 그래서 찾아냈습니다. 그렇게 차키를 내 주머니에 딱 넣으니까 마음이 안도함이 들고 답답함이 삭 사라졌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 싶으냐?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내게 누려지지 않으니까 뭔가 모르게 답답하고 안타깝고 그렇지 않습니까? 복음이 없는 게 아닙니다. 키가 없는 게 아닙니다. 키가 있습니다. 그런데 키를 찾지 못하니까 뭔가 답답하고 늘 거기 신경 쓰이는 것처럼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있는데 복음을 누리지 못하니까 나도 모르게, 뭔가 모르게 그게 답답함으로, 자유롭지 못한 부분 가운데늘 세상 따라갈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두 번째 생각해 볼 부분은 복음은 참된 능력이고 진짜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인데 그 사실을 왜 못 누리느냐? 복음을 누리지 못하는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크게 세 가지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복음을 누리지 못하는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2. 복음을 누리지 못 하는 나의 문제
여러분, 먼저 전제할 것은 누구든지 복음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못 누리면 자기를 속이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짜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서면, 진실하게 나의 모습을 보면 우리는 복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구원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복음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누리지 못하면 자신을 속입니다. 복음 필요 없는 겁니다. 구원 받을 필요 없는 겁니다. 그건 자기를 속이는 겁니다. 자기를 속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겁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결국은 뭐냐? 속지 않는 하나님을 속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복음을 누리지 못하면 그렇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는데. 그런데 왜 복음을 못 누리느냐? 먼저 첫 번째 이유는 내게 먼저 각인된 인생의 열두 가지 문제 때문에. 에덴에서 있었던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내게 먼저 각인된 인생의 열두 가지 문제 때문에 복음을 못 누립니다. 복음을 놓쳐 버립니다. 그 배경에는 결국은 흑암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 흑암이라는 것은 그냥 단순히 낮에 빛이 있고 밤에 어둠이 있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존재, 영적인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원래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던 천사가 타락해서 결국은 하늘에서 있을 곳을 찾지 못해서 땅으로 내어 쫓긴 바 되었습니다. 이것이 온 인류를 붙잡고 인간이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말씀을 듣지 않고 땅으로 내어 쫓긴 바 된 이 악한 사단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인생에게 찾아온 것이, 영적인 사망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 영을 악한 사단이 완전히 장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불신자들은 거기 아예 종 되어서 살아가고 불신자들은 아예 사단을 아비로 섬기고 살아가고. 믿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복음을 누리지 못하면 그 악한 사단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인생의 열두 가지 문제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 증거가 뭐냐? 분명히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악한 사단을 아비로 섬기고 살아갑니다. 아예 사단이 가만히 놔둡니다. 건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구원은 받았다 할지라도 인생의 열두 가지 문제, 그 배경에 있는 사단의 그 영향들을 받게 된다니까요. 그 증거가 뭔 줄 아십니까? 바로 나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다 옳은 것입니다. 그게 창세기 3장 사건 아닙니까? 내 중심으로, 내 생각이 옳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다른 사람이 아무리 말해도 내가 옳으면 옳은 겁니다. 유아독존이라 하지요. 여러분, 하나님 외에 스스로 있는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나는 내가 다 맞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모든 관계도 깨어지고. 저는 지난 주간에 제가 혼자 있으면서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 내가 너무나 나 중심이구나,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고 너무나 내 생각대로, 내 중심이구나. 이 부분이 새롭게 발견되더라고요. 결국 그게 창세기 3장입니다. 우리도 거기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실은. 그러면서 이게 어떻게 나타납니까? 결국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세상의 눈에 보이는 기준이 뭡니까? 뭔가 육신적인 부분들, 뭔가 물질적인 부분들, 그게 우리의 기준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아니,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 기준이 되어 있잖아요. 다시 말해서 세상의 것들, 육신적인 것, 물질적인 부분들이 우리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든 열심히 살아가는 삶이 결국 성공을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아니, 악한 사단의 영향을 지금도 우리가 받고 있다니까요. 복음 누리지 못하면 누구나 인생의 열두 가지 문제의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러면서 결국은 뭡니까? 한계가 올 수밖에 없는 것 아닙니까, 인생이? 아무리 성공을 위해서 달려가도 인생에게는 결국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한계가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그런 사람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종교를 찾습니다. 그런데 그게 우상숭배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종교를 찾고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성경에 보면 종교생활하고 우상숭배하면 할수록 거기에는 악한 사단의, 귀신들의 활동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시간이 가면 갈수록 거기에서 온갖 영적인 부분에 완전히 사로잡히니까 거기서 오는 부분들이, 정신적인 문제가 오고, 육신의 무능함이 찾아오고 결국 세상을 열심히 살아가는데 지옥 같은 삶을 살면서 결국 심판받게 되어 있고, 후대에게도 이 부분을 그대로 물려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게 인생의 열두 가지 문제입니다. 이게 나도 모르게 내 안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미 아담, 하와로부터 시작된, 에덴동산에서 이 열두 가지 문제가 시작되었는데 이게 전시간에 급속도로 퍼져서 이게 우리 모든 인생을 붙잡고 있다는 것. 이게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살이하다가 출애굽했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현장 속에서 문제와 사건을 당할 때마다 그들이 어디로 돌아간 줄 아십니까? 결국은 노예근성으로 돌아갔습니다. 애굽의 종살이하던 그 근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문제와 사건을 당할 떼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온 대답이 뭡니까?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가 좋았다, 애굽으로 돌아가자. 실제로 좋았습니까? 아니잖아요. 노예근성을 못 버린 것입니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노예근성이 있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복음 누리지 못하게 하는 인생의 열두 가지 문제가 먼저 각인되어 있기 때문에 그 부분들이 복음의 능력과 가치를 누리지 못하도록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알기만 해도 해결될 줄로 믿습니다.
그 다음에 복음을 누리지 못하는 나의 문제가 뭐냐? 내게 먼저 들어와 있는 지식들, 내가 세상 살아가면서 그 지식 가지고 체험한 부분들 때문에 경험한 부분들, 또 세상에서 틀린 성공에 대한 부분들. 또 여러 가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런저런 많은 사람들의 말들, 여론이지요. 사람들의 말. 그게 우리 안에 뿌리내려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복음의 능력과 가치를 누리지 못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내 안에 먼저 들어와 있는 지식. 물론 우리에게 지식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세상 지식은 골로새서 2:8에 보면 결국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 했습니다. 그게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라 했습니다. 세상의 지식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영적인 사실을 보는 눈이 감기고 세상 지식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결국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골로새서 2:9에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하면서 그것은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세상적인 지식들이 많이 들어오면 들어올수록 하나님을 아는 데서 멀리 떨어져 갑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려 있습니다. 세상 지식들. 특히 우리 렘넌트들 이 자리에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 어릴 때부터 진짜 말씀의 능력이 심어지는 것이, 세상 지식 이전에 말씀의 능력이 심어지는 것이 너무 중요한 겁니다, 사실. 이 아이들이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는데 사실 말씀 안 듣는 것 같지만 아닙니다. 사실 말씀이 나도 모르게 각인되는 역사가, 뿌리내리는 역사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너무 중요한 자리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지식들 가운데 살아가다 보면 그 지식 속에서 나름대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부분들 있지 않습니까? 그게 우리에게 뿌리내려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나님이 있어서 하나님 안에서 주어지는 체험이냐 경험이냐?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성공을 위해서 살아가는데 틀린 성공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렘넌트들, 성공하기 전에 진짜 중요한, 올바른 성공이 무엇인가를 알고 복음으로, 말씀으로 각인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 성공을 위해서 달려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느 정도 성공합니다. 그런데 그 성공한 그것 때문에 교회를 우습게 보고 말씀 전하는 주의 종들을 우습게 여기고 성도들을 보면 시시하게 보입니다. 교회를 보면 뭔가 답답하고 뭔가 좁아 보이고, 그러면서 신앙 생활 안 하는 건 아닙니다. 성공한 사람들, 결국 신앙 생활을 하기는 하는데 그냥 교회 왔다갔다 하는 수준입니다. 결국 문제 생기면 말씀 잡는다고 하는데 그게 됩니까, 사실? 그래서 사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말씀으로 각인되고 올바른 성공이 무엇인가 알고 준비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틀린 성공을 가지고 교회조차 우습게 보고 주의 종들을 우습게 봅니다. 그게 저주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를, 주의 종들을 우습게 보는 그 자체가 저주인데 그렇게 교회가 답답하게 보이고 좁아 보이는 겁니다. 저렇게 해서 굳이 살 필요가 있느냐? 어른들을 봐도, 성도들, 어른들을 봐도 저렇게 신앙 생활을 할 필요가 굳이 있느냐? 이게 성공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그것 때문에 나도 모르게 복음의 능력과 가치를 놓쳐 버립니다. 그러면서 또 많은 사람 관계 속에서 이런저런 말들 많이 있지 않습니까? 어제 류목사님 메시지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십 년 살아왔으면 십 년 살아온 만큼 사람들의 말들이, 이런저런 사람들의 말들이 뿌리내려 있다는 것.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몇 년 살았습니까? 살아온 만큼 여러분 주위에 많은 사람의 말들이 우리도 모르게 우리 안에 뿌리내려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뿌리내린 그 결과가 어떻게 드러나느냐? 문제와 사건을 당하면 불신앙으로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했습니다. 홍해를 건넜습니다. 그런데 홍해 앞에 섰을 때에 사실 홍해라는 문제가 딱 앞에 놓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같이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큰 구원의 역사, 애굽에서 빠져나온 구원의 역사를 봐야 하는데 앞에 놓인 홍해를 바라보면서, 문제를 바라보면서 문제가 더 크게 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나왔습니까? 전부 불신앙에 빠져서 우리는 건너가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도 그런 부분이 그대로 있습니다, 사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에서 먼저 들어온 지식들, 그 지식 가지고 경험하고 체험한 부분들 대문에, 틀린 성공의 기준들 가지고, 이런저런 사람들의 말들 때문에, 그게 우리 안에 뿌리내려 있기 때문에 우리도 모르게 문제 딱 당하면 이게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라 불신앙이 딱 듭니다. 그 속에서 결국은 틀린 판단과 틀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부분들 때문에 많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
그 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어떻게 복음의 능력을, 가치를 체험하지 못하느냐? 내게 있는 문제가 무엇이냐? 사실은 이미 뿌리내려 있는 영적 문제 때문에. 뿌리내려 있는 영적 문제 때문에. 여러분, 마귀에게 눌려서 일어나는 영적 문제와 그 상처는 우리도 모르게 깊이 뿌리내려져 있어서 실제로 문제를 당하면 결국은 말씀 붙잡는 것보다 그 상처에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씀 붙잡기 위해서 몸부림칩니다만 그런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여러분, 영적 문제에 사로잡히고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 신앙의 성장이 스톱(stop)됩니다. 신앙의 성장이 안 됩니다. 그리고 늘 업 다운(up down)이 심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도 모르게 체질되어 있는 영적 문제 때문에, 마귀에게 완전히 붙잡혀 있는 영적 문제의 상처들 때문에, 이게 내 체질이 되어서 신앙 생활하면서도 업 다운이 계속되는 겁니다. 이 부분 때문에 참된 복음의 능력,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해결하신 그 복음의 능력을, 그 복음의 가치를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지금 앞으로 세 가지 시대가 옵니다. 복음이 없어지고 전도가 사라지는 시대가 옵니다. 두 번째로, 그 결과로 영적 질병의 시대가 반드시 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지금까지 계속 왔고 앞으로 큰 재앙의 시대가 반드시 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분명히 복음이 없어지고 전도가 사라지는 시대, 그 결과로 영적인 재앙이 오는 시대, 계속되어 왔지만 큰 재앙의 시대를 맞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귀중한 답은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이루신 이 복음의 역사, 이 능력, 이 가치를 깨닫는 데서부터 참된 축복이 시작됨을 믿습니다. 특별히 이 복음의 능력과 가치를 놓쳐 버리면 진짜를 놓쳐버렸기 때문에 가짜를 쳐다보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 자체가 가짜 인생이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복음을 회복하게 되느냐? 어떻게 하면 복음을 회복하느냐? 복음을 회복해야 하는데 어떻게 복음의 능력을 회복하느냐? 한 가지만 제안하겠습니다. 그게 뭐냐? 여러분, 주어지는 말씀 붙잡고 깊은 묵상 속에 들어가십시오.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 붙잡고 깊은 묵상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가지십시오. 어느 정도로 가지면 되느냐? 어느 정도로 가지면 되느냐? 현실적으로 문제를 딱 당하잖아요? 그 문제를 당할 때에 아, 이게 응답의 과정이구나 보일 정도로. 어느 정도로 말씀의 깊은 묵상을 하느냐? 현실적인 문제가 딱 닥치면 아, 이게 언약의 여정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구나 보일 정도로. 문제가 닥치면 하나님은 내게 각인과 뿌리와 체질을 바꾸라는 것이구나 보일 정도로 말씀에 대한 깊은 묵상 속에 들어감으로, 참된 복음을 회복함으로, 복음 놓쳐버림으로 전도가 사라지고 영적인 질병 시대가 오고 더더욱 큰 재앙이 일어나는 이런 시대에 여러분, 이 시대를 살리는 주역으로 저와 여러분이 쓰임 받는 축복된 응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8년 6월 24일 주일 2부 예배 신봉준 목사
단 번에, 완전히, 영원히
(히9:38)
서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복음이 맞는데 복음을 놓치는 이유는 나의 영적상태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음을 누리지 못 하기 떄문에 환경과 문제 앞에서 무너지게 됩니다.
단 번의 제사(히9:28)로 영원히(히10:12), 온전하게(히10:14) 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단 번에, 완전히, 영원한 복음의 역사를 붙잡아야 됩니다.
1. 복음의 능력
가. 완전한 능력
1) 영세전부터 영원까지 그리스도 이름만 주심 - 완전한 능력이기 때문에
2) 단 한 번의 사건으로 모든 죄를 끝내심(히9:28) - 불신앙 하지 말고 복음을 있는 그대로 믿는 믿음
3) 우리는 연약하지만 복음은 완전한 것 - 복음이 나의 기준
나. 유일한 능력
1) 생명을 얻는 유일한 방법(요20:31)
2)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만남(요14:6), 죄 문제 해결, 세상을 이김(요일5:5)
다. 영원한 복음(히13:8) - 하나님의 자녀를 지키시고, 영원토록 함께하심(누리는 방법이 기도)
2. 복음을 누리지 못 하는 나의 문제
가. 내 안에 이미 각인 된 12가지 문제
1) 하나님을 떠남으로 모든 사람들은 영적인 사망 - 영을 사탄이 잡고 있음
2) 구원 받았지만 복음을 누리지 못 하면 12가지 문제의 영향을 받게 됨 - 출애굽 했지만 노예근성을 가지고 살아감
3) 나 중심의 삶, 세상의 기준(육신, 물질), 성공을 위한 삶, 한계가 오면 종교를 가짐, 정신의 문제,
육신의 무능함, 지옥 같은 삶, 후대에게 대물림
나. 복음보다 먼저 들어온 지식으로 뿌리
1) 하나님을 모르고 세상의 지식들이 많이 들어올수록 영적인 것을 못 보게 됨
2) 나름대로의 경험, 체험이 뿌리 내림
다. 틀린 성공 - 복음 없이 성공 하게 되면 교회를 우습게 알게 됨
라. 사람들의 소리 - 문제가 왔을 때 불신앙으로 나타남
마. 뿌리 내려진 영적인 문제와 상처 - 말씀 붙잡기 전에 상처에 집중(신앙의 성장이 멈추게 되고 업다운이 심하게 됨)
결론: 앞으로 세 가지 시대가 오게 됩니다. 복음이 없어지고 전도가 사라지는 시대가 오게 됩니다. 그 결과로 영적 질병의 시대가 오게 됩니다. 그리고 큰 재앙이 오는 시대가 오게 됩니다. 그 답이 단 번에, 완전히, 영원한 복음의 역사를 깨닫고 누리는 것입니다. 복음의 가치를 놓치게 되면 가짜를 쳐다보게 되고 가짜 인생이 됩니다. 복음의 가치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주어지는 말씀을 통해 깊은 묵상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복음의 가치를 누리게 됩니다. 문제가 응답의 과정, 언약의 여정이 될 정도로 말씀에 깊이 묵상 해야 합니다. 세 가지 시대 속에서 세상 살리는 응답 누리시길 바랍니다.
● 기도제목
● 말씀실현(실천사항)
● 전도대상자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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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4 | 전환점을 이룬 안디옥 선교 | 행11:19-30 | 2025-04-27 | |
1483 |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메시지 | 고전15:1-11 | 2025-04-20 | |
1482 | 새로운 싸움을 위하여 | 삿7:9-18 | 2025-04-13 | |
1481 | 날마다 영적싸움에 승리하라 | 삿7:1-8 | 2025-04-06 | |
1480 | 이 시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 | 삿4:1-10 | 2025-03-30 | |
1479 | 하나님이 쓰시는 기준 | 삿3:12-23 | 2025-03-23 | |
1478 |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 삿3:7-11 | 2025-03-16 | |
1477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 삿2:6-10 | 2025-03-09 | |
1476 |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 삿1:1-7 | 2025-03-02 | |
1475 |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 단12:1-4 | 2025-02-23 | |
1474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 단11:28-39 | 2025-02-16 | |
1473 |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 단10:10-21 | 2025-02-09 | |
1472 |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 단9:20-24 | 2025-02-02 | |
1471 |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 단8:15-27 | 2025-01-26 | |
1470 |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단7:9-14 | 2025-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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