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고백(박지온 목사)
2018-05-06 00:00:00
관리자
조회수 55
유튜브 저화질 다운 MP3 녹취 요약 |
5월 6일 주일 2부 예배 박지온 목사
“바울의 고백”
(고후12:1~10)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12:1~10
■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여, 은혜를 감사합니다. 주의 종들을 어린이주일로 함께 모여 은혜 있게 하시고, 또 어린이를 통해서 우리 부모들이 생각할 바를 영적인 문제로 인도받게 하시며 특별히 우리 남미에 가신 신 목사님에게 은혜 주여서 제자 삼고 제자 세우는 은혜로 역사하여 주옵소서. 종을 세우셨사오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말씀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늘 강단에 설 때마다 요즘 들어서 더 떨리는 것 같습니다. 혹시 왜 그러냐 싶을지 몰라도 처음 서는 것 같고 뭘 해야 할 것인지 마음으로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잠깐 애들 보면서 참 예쁘다, 그리고 여러분들 얼굴을 보니 하나같이 웃고 있습니다. 박수도 잘 치고 하면서. 그래서 아 어린이들이 참 중요하구나, 그러면서 우리 어린이들에 대한 이해를 잘 못했구나. 옛날에 어떤 이상한 교단에서 어린이들을 이용해서 자기 교단을 선전하는 세계적인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리틀 엔젤스라고. 그래서 많은 호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린이를 이용해서는 안 되고 어린이를 보면서 예쁘다고 할 때 그들의 영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영혼을 볼 수 있고 어린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부모 외에는 안 됩니다. 모두 웃는 것이 애를 가진 부모들이지, 애가 없는 총각들은 얼굴이 안 그렇습니다. 다릅니다. 처녀들도 그렇고. 정말 내 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이런 아이들을 보면 감동 이전에 먼저 감동이라고 말하기 전에 깊은 애정이 흐릅니다. 그 애정을 영적인 애정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 어린이주일에 이해를 할 귀한 문제입니다. 요즘은 잘못된 사람들이 어린이들에게 이상한 짓을 하고 그런 것이 있는데, 예쁠수록 우리가 영적인 눈으로 안 보면 곁길로 갈 수 있는 배경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고백입니다. 바울의 고백이라고 하면서 그냥 바울의 고백으로 끝나지 말고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했는데 그게 나의 고백이 되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어린이 주일이라고 해서 어린이에 대한 말씀은 안 하기로 했습니다. 왜? 우리 신 목사님이 어린이들을 너무 사랑해서 전부 앞에 다 앉혀 놓았지 않습니까? 장로님들보다 앞에 앉혀 놓았습니다. 이런 일은 교단에서도 없을 것 같고 세계 어떤 교단에서도 내가 알기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장로님들보다 앞에 앉아 있다, 어린이들이. 보통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어린 아이들이 무심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교회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만큼 여러분을 속으로는 아닐지라도 우선 교회적으로 형식으로라도 우리 아이들을 귀하게 여긴다는 표시 중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신 목사님이 있는 한 날마다 어린이주일이다. 앞에 앉아 있는 것만 해도 어린이 주일입니다. 제가 어린이주일에 대해서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너무 우리 어린이들이 날마다 아름답게 인도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의 고백을 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뭐냐 하면 사실 이 고백은 바울이 율법 선생으로 율법에 완전히 익숙하고 율법교사로, 또 율법을 전하기 위해서 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귀한 학자로 있었던 바울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율법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복음이 연결되었습니다. 유례 없는 바울의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언했습니다. 이방인 앞에 세우리라. 이방인의 왕과 이방인들 앞에 세우겠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안의 전도보다 이방 나라의 전도가 우선이었고 그의 일생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이해해야 할 것은 내가 체험한 것 이외에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여러분, 간증 들어보면 전부 자기가 체험한 것을 이야기하지, 남의 것을 나의 것으로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간증에 주의할 것은 들을 때 여러분들이 그 간증으로 말씀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합니다. 간증으로 받지 말고 말씀으로, 그 간증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아니면 이 간증, 저 간증 따라가다가 이상한 사람 됩니다. 여러분들이 꼭 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간증을 들을 때, 또 우리 신앙 생활의 순서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누구를 깨달았느냐,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우리가 언약을 깨닫는다고 하는데 언약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언약이라고 해서 언약의 말씀이라고 해서 요즘 훈련할 때 보니까 말씀 정리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유 목사님 말씀 녹취를 해 보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지간히 정신 바르지 않으면 녹취가 안 됩니다. 자꾸 딴생각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래서 말씀 정리하고 하니 전부 유 목사님 말씀을 녹취해서 그것을 전부 익히고 알고 그러는데 안 그래도 됩니다. 왜? 하나님이 말씀을 심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메시지 들을 때에. 그 말씀 하나만 잡아도 됩니다. 다 몰라도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실 필요가 있는 말씀을 내게 각인시켜 줍니다. 그것을 잡고 나가면 됩니다. 그것 우리가 말씀, 말씀, 그래서 그 말씀 다 들으려고 애쓰고 말씀 전부 외우려고 애를 쓰는데 안 외워도 됩니다. 머리 나쁜 사람은 아무리 외우려고 해도 안 됩니다. 제가 지금 외우려고 생각을 해 보니까 우리 이수 장로님 참 잘 외우시던데 원래 머리가 좋습니다. 잘 외우는 데는 머리가 좋아야 하는 것도 있지만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아무나 외우는 것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복음편지에 나오는 구절을, 복음에 대한 구절을 이백 번, 삼백 번 쓰고 나니 좀 외워지더라고요. 지금 타자를 하니까 좀 더 늦어진 것 같아요. 쓰니까 외워지더라고요. 그런데 그나마 그래도 외울 수 있는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그런데 여러분은 더 못 외웁니다. 왜? 앞의 것 외우면 뒤의 것 벌써 잊어버려요. 뒤의 것 나오기 전에. 그래서 외우려고 애를 쓰는 것보다 하나님이 그 시간에 메시지 속에서 주시는 각인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딱 박히게 해 주는, 내 마음에 심어 주시는 말씀. 그래서 늘 각인, 뿌리, 이야기하는데 내 마음에 말씀이 각인이 되고 뿌리가 되어야 열매가 나오지, 건성으로 들어서는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건망증이 심한 여러분들은 문 열고 들어가면 말씀 기억 못합니다. 오히려 다른 것 기억하고 나갑니다. 잠깐 동안 옆에 앉은 사람이 이상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가든지, 그런지 참 말씀 각인이라는 자체가 은혜입니다.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죠, 언약입니다. 그것을 잡고 예수 그리스도, 모든 것 해결 받았습니다. 율법 속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답답하던, 막혔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붙잡은 동시에 다 해결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너무 감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것으로, 진짜 나의 것으로 잡기 위해서 갈라디아서 1장 17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리고 18절에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했다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15일을 머무를 동안 그저 삼년 만에 다메섹에 있다가 게바에게. 아라비아로 갔다가 삼년 만에 게바를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랬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바울이 언약을 잡고 나니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나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잡고 자기도 모르게 아라비아에 삼년 동안 기도하러 갔습니다. 이때에 받았던 환상이나 받았던 깊은 기도의 열매가 고린도후서 12장 1절부터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 속에 여러분들이 아마 체험을 해 본 사람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기만 하고 보기만 한 사람이 거의 많습니다. 제가 유 목사님 이 말씀을 잡고 유 목사님은 한 10분 만에 체험한 이 사실을, 체험을 한다 그러는데 저는 적어도 하룻밤 새 기도해야 체험되는데 어디 간단히 그렇게 체험이 되느냐? 늘 기도 속에 있다가 집중해버리면 체험합니다. 10분만 집중하면 체험한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여러분, 말씀은 언약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10분만 깊이 집중해도 놀라운 환상이라고 하나, 사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체험이, 또 우리의 경험이 뭐냐 하면 우리의 체험, 그것이 10분 집중해서 체험할 체질이 아직 안 되었습니다. 유 목사님의 경우는 얼마든지 되고도 남습니다. 그렇게 고백도 했고. 제가 초기에 메시지를 붙잡고 전도학교를 계속 뛰어다녔습니다. 뛰어다닐 때는 앉으면, 제가 늘 뒤에 앉으니까, 운전은 다른 사람이 하고. 차에 앉았을 때랑 계속 무시기도가 나옵니다. 호흡기도가 나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앉아 있을 때도 메시지 전하기까지는 호흡기도가 됩니다. 그런데 내가 뭘 하는 동안에는 안 됩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여자분들이 이걸 무시기도로 내가 호흡 기도를 하려고 하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 집에 가면 보이는 게 일거리이고 일거리 한두 개 하다 보면 모든 걸 다 잊어버리는데 무시기도가 집중해서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무시기도를 진짜 집중을 시키기 위해서 집중훈련을 하더라고요, 보니까. 집중훈련을 하는데 숙제에 매여서 다른 것을 못합니다. 그리고 허덕거립니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느낀 게 무엇이냐 하면 아, 말씀은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도. 왜? 계속 말씀은 써야 하고 또 말씀은 기억해야 하고 하니까 그동안 말씀을 집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아, 한 가지 더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왜? 우리 체질들이, 특히 여기 주부들이 살아가는 삶의 체질이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에 집중할 시간. 그러니까 집중훈련을 할 때에 기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어떠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 알고 있는데, 말씀도 집중할 수 있는데, 사실은 어떤 면에서 기도로 집중해 버리면 말씀은 따라오더라, 말씀, 기도하는데 말씀은 이미 잡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잡고 깊이 들어가면 뭐가 나오느냐? 메시지 들을 때, 말씀 들을 때 저절로 깨달음이 오고 고개가 끄덕여지고 기도 없이 말씀 들으면 고개고 뭐고 없습니다. 딴생각이 따라 들어오니까. 그런데 기도하고 깊이 언약을 잡고 있을 때 메시지를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밝아지고 예수 그리스도 듣기만 해도 좋아지게 됩니다. 좋아진다는 뜻으로 역사 아니고 그 배경이 내 마음에 와집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 맨날 듣던 얘기이고 그것도 자기가 맨날 들으니 불감증이 생겨서 또 그 얘기 하는가 싶어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와서 또 그 얘기 하네, 싶으면 여러분은 불감증이 생긴 것이고 그것은 진짜 하루 이틀 가면 갈수록 더 굳어지는 사람이 되고 큰일 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로 뭔가 내가 은혜를 받고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눈이 열려야 지속해서 말씀에 집중이 나올 수도 있고, 물론 지속해서 기도가 집중이 되고 지속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훈련하는 동안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보니 우리 집에서 몇을 연결해서 교회에 기도하러 간다고 하면서 가고 그럽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게 교회까지 가는 것, 교회까지 가는 시간들, 그 일에 집중하는 시간들, 참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습관을 들여야 하느냐? 내가 앉는 자리가 집중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훈련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옛날에 늘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가 기도통을 만들어 놓고 늘 거기 가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내가 어떤 자리를 기도하는 자리로 만들면 그 자리에 앉으면 집중이 됩니다. 그 자리에 앉으면. 그런데 나는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특별히 말씀을 준비하고 강단에 서려면, 마음에 뭐가 가득합니다, 그러면 기도통에 앉으면 집중이 됩니다. 다 사라지게 되고 말씀에 집중이 됩니다. 그런데 그게 멀리 기도통까지 가지 말고 집안에서 내가 기도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반드시 언약, 예수 그리스도 잡고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무시기도, 늘 이야기하는데 여러분, 무시기도 됩니까? 무시기도라 하는 건 잠깐 지나쳐 계속 기도 속에 있기 위해서 됩니다. 그러나 기도에 집중하는 것은 무시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기도에 집중해서 하나님 말씀과 깊이 연결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결ㄷ죌 수 있는 것은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일반 교인들은 아마 만들면 되지 싶습니다. 아, 옛날에는 저희 교회에서 지하에, 송현교회 있을 때에 기도통을 네 개를 만들었던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기도통을 네 개를 만들고 구역마다 24시 돌아가면서 기도가 끊이지 않도록 기도를 했습니다. 했는데 그 때에 우리 온 교회가 영적 영감이 살아났습니다. 얼마나 뜨거웠던지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지금도 어떤 면에서 기도통을 만들어 놓았다고 하는데 지하에 있다고 합니다. 아직 가 보지 못했어요. 너무 깊이 들어앉아 있어서. 제가 못 가 본 것이, 걸어가야 되고 그러니까. 가 봐야 하는데 거기 또 기도통을 만들면 환경이 쾌적해야 합니다. 기도하러 들어가면 축축하고 우중충하고 냄새나면 기도가 안 됩니다. 그러다 시간 뺏깁니다. 쾌적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지하에 지금 만들어 놨다, 아마 인상에 분명히 냄새날 거고 축축할 거고 지하에 있어서 별로 기도통이 잘 안 되지 싶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들어가려고 애쓰지 말고. 들어가도 좋습니다. 찾아가도 됩니다. 그러나 내 가정에서 내가 기도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날 받은 메시지를, 또 내가 붙잡은 메시지를, 떠오르는 메시지를 잡고 진짜 각인하고 진짜 뿌리를 내려서 기도에 한번 집중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이 체험됩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하늘 문도 여십니다. 필요하면 엄청난 능력의 역사가 나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 생활이고 신앙 생활의 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나아가면 내가 어디서든지 당당하게 됩니다. 어디서든지. 그리고 이렇게 되면 늘, 무시기도라면 간단하게 말할 수 있지만 무시기도에 집중이 나가면 저절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배경이 없이 무시기도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말씀 전체를 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시간에 메시지를 주실 때 내게 각인되는 메시지가 있더라고요.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 읽어 나가는 중에서 내게 주신 한 절, 두 절, 한 장에 각인시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각인해서 적어 놓고 그 다음에 그것을 마음에 기억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것을 굳이 안 해도 내 평생에 각인된 메시지 몇 구절만 해도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제게는 늘 여러분들에게 말씀하는 것이지만 빌립보 1장 6절, 그것 가지고 살았습니다, 초기에. 어려우면 그것 가지고 나가서 기도하고. 또 그 다음에 빌립보 4장 13절입니다. 주로 그것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 더 나아가 우리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 그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역시 기도하는 집중 속에서. 또 제가 집중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 있었습니다. 몸이 너무 안 좋으니까. 여러분, 아플 때 아야 소리밖에 안 나오지만 정신이 들면 집중하게 됩니다. 기도가. 제일 기도가 집중될 때가 언제냐? 덜 아플 때입니다. 많이 아플 때는 그게 잘 안 됩니다. 아야, 아야, 거리지. 먼저 돌아가신 우리 이일향 목사님, 기도, 뭐 아플 때 기도가 나와? 아야 소리밖에 더 나와? 그랬는데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아야 소리밖에 안 나왔습니다. 그러나 덜 아프면 기도가 집중될 수 있습니다. 그 집중된 속에서 내가 붙잡은 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왜? 가려 하다가도 안 가지요, 아무리 가게 해 달라고 해도 안 되지요, 죽었다 싶을 때 또 살아나지요, 죽음도 내 마음대로 못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을 내 마음대로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특별히 더 무엇이냐 하면 나는 목사니까 평탄하게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프면 아픈 대로 지시가 더 듭니다. 병원에 가면 지시가 더 듭니다. 예를 들면 계속 기도하게 만들더라고요. 기도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 같아요. 왜? 워낙 기도하는 체질이 안 되니까. 병원에 가서 제가 간단하게 빼내버리며 될 맹장염도 뭐 한다고, 그 때에, 뭐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맹장염이 깊어졌던지 이게 아프기 시작하는데 전에도 얘기했지만 밑에서 뛰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그러다가 정신이 나가버렸습니다. 얼마나 아팠는지. 그러니까 그때가 오뉴월 한참 더울 때입니다. 내가 가톨릭 병원에 갔던가, 가니까 이 사람들이 병명을 모릅니다. 그런데 병명을 모르니까, 거기 가면 금방 병명을 알고 복막염이라도 병명을 알고 때내어 버리면 되거든요. 수술을 해 버리면 되는데 수술을 안 해줍니다. 이게 일주일이 가도록 안 해 주는 겁니다. 일주일째 수술을 다 잡아 놓고 외과 과장이 내가 내과에서 병명도 모르는 수술 나는 할 수 없다, 내가 덤터기를 쓰기 싫다. 덤터기 쓴단 말이지요, 병명 모르고 했다가. 그러다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도망갔다가 다시 와서, 안 되겠던 모양이지요, 양심에. 수술을 했습니다. 도망갔다가 왔어요, 또. 하나님이 살리려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때 나한테 병원에서 그러더라고요. 서울 가겠느냐? 여기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서울 가라고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죽어도 그 때 뭐냐 하면 마음이, 여기서 될 수술 같으면 여기서 하고 여기서 죽을 것 같으면 여기서 죽지 굳이 서울 가서 뭐하려고 죽어? 이런 마음이 들어서 서울 안 가겠다, 죽었으면 죽었지 여기서 죽으련다, 이래서 버티고 있으니 와서 토요일인가 그 때 그럽니다. 와서 수술을 했는데 복막염이었습니다. 이게 다 물러 터져서 이상하게 속에 너무 농이 차서 병명도 모를 정도로 덮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안 죽었습니다. 나는 또 한 번 아, 내가 죽고 싶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복막염이 물렀으면 삽일 이상이면 죽기 직전이거든요. 일주일 다 되어서 여름에 완전히 전부 고름이 다 차도 안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이 오라고 해야 가지 아무리 여러분이 가고 싶다고 해도 갑니까? 그러니까 너무 어려울 때 하나님, 가고 싶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자기 마음대로 합니까? 가고 싶다고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안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 그 때일수록 하나님, 때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나를 이 시간 하나님의 계획이 뭡니까, 이걸 붙잡아야지 자꾸 가고 싶다 그러면 그것은 망령된 말입니다. 망령된 기도이고요. 그런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 당신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나를 이렇게 만든 계획이 무엇입니까? 저희 누님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김철연 목사님 지난주에 설교를 했습니다만 저는 누님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왜냐 하면 그 가정이 목사 가정이기 때문에 제가 좀 어려울 때에, 또 군대 있을 때에 휴가 나오면 거의 그 집으로 갔습니다. 내가 제일 편하니까. 근데 해군이 되어서 한 달에 몇 번씩, 한 번 이상 꼭 휴가를 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해군에는 출동을 나가면 최소한의 인원만 데려가고 나머지는 다 휴가 보내버립니다. 휴가 많이 가려거든, 젊은 사람들, 해군 가면 제일 많이 나옵니다. 해군은 배를 타야 되고, 배를 안 타면 안 됩니다. 배 타면 최소한의 인원을 데리고 갑니다. 왜냐? 먹고 자고 그 다음 마시고 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인원은 전부 휴가 다 보냅니다. 저는 해군에 있으니까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나가거든요. 출동을 나갑니다. 우리나라 근해 나갈 때 한 달에 한 번씩 나갑니다. 나가면 휴가를 한 달에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이상 갑니다. 어떨 때는 근해에 가기 때문에 15일에 한 번씩 또 휴가 나옵니다. 저는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출동 나가면. 왜 그러냐? 저는 의무기 때문에, 의무는 두 사람을 데리고 갈 필요 없습니다. 적은 숫자는 한 사람만 데리고 가거든요. 주로 내 위의 계급 가진 사람이 나가고. 어떤 경우에는 나한테 병으로 있었으니까 나를 데리고 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누님이 제가 교회에 있을 때 송현교회 있을 때부터, 그전부텁니다. 간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다 암으로, 간암으로 다 끝났다고 해서 다 예배 드리고 그 때 우리 교회에서도 한번 얘기를 했습니다. 예배 드리고 임종예배까지, 맏형님 살아계실 때. 그리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누님이 임종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생각이, 아들이, 김철연 목사가 미국에 있으니까 아들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자, 그래서 죽음 직전에 암을 가지고 미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들어가기 직전에 마음이 아, 너무 좋다, 아무리 가고 싶어도 하나님이 안 보내 주시니까 못 갔거든요. 그런데 이제 암이니까 이제 때가 되면 가겠구나, 너무 기뻐가지고 얼굴만 보면 되니까, 아들은. 미국 들어가니까 얼마나 미국 갈 때 기뻤던지, 가서 미국에서 삶이 얼마나 기뻤던지 암이 나아버렸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것이 며칠 전까지 살았습니다. 91세까지. 그 다음에 몇 번 간다는 소리 했는데 안 데려가시니까 안 갑니다. 하나님의 주권. 그러니 여러분, 간다 소리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네가 간다고 가나? 하나님이 불러야 가지. 내가 간다고 가나? 안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 이 시간에, 이 문제 속에, 이 어려움 속에 하나님의 나에 대한 계획이 뭐냐? 이걸 잡아야 합니다. 이걸 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장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믿음이 성장했다고 하면 오늘 또 교독문에서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성장한 믿음이고 참된 믿음이라 그랬는데 그런데 고린도서에 보면 성장한 믿음이 어린아이가 아니고 어린아이 같은 믿음은 어떤 면에서 성장 안 된, 골치 아픈 사람의 믿음이 어린아이의 믿음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게 고린도서에 있더라고요. 그런데 일단은 어린아이가 진짜 말 안 듣고 골치 아프면 이것은 못 건드립니다. 뭐라 해도 안 되고. 좀 어렵게 말하면 막 이를 갈고 두들겨 패도 안 듣습니다. 고집 한번 부리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저도 어머니가 제가 알고 있는 한때에 얼마나 고집이 셌던지 하도 고집스러워서, 어머니가 잘 손을 안 대는데, 어머니는 꼭 손을 댈 때 회초리를 댑니다. 대면 항상 어디냐, 폴짝 뛰지 말라고, 뛰면 미끄러지라고 목침 위에, 목침이 뭔지 압니까? 베개를 만드는데 나무를 네모나게 깎아서 그 위에다 딱 세워 놓습니다. 세우면 폴짝 뛰면 떨어지거든요. 그렇게 해서 못 뛰도록. 그렇게 해서 종아리를 걷습니다. 종아리를 걷으면 종아리에다 때립니다. 때리는데 때리는 게 참 신기합니다. 기도하면서 때립니다. 어머니의 때리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때리면서 한 번도 저는 어머니가 욕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노무새끼야 하든지, 때리는 그래야 하는데, 성이 나면. 입 꽉 다물고. 어머니 입술이 좀 얇은 편입니다. 입 꽉 다물면 절대 안 열립니다. 두꺼운 입술이 아닌데 더 안 열립니다. 입 딱 다물고 회초리를 때리면, 입 딱 다물고 때리거든요. 때리면 폴짝폴짝 뛰지를 못합니다. 떨어지니까, 넘어지니까, 목침 위에서. 그러다가 하도 견디기 힘들어서 그만 목침에서 넘어지기 전에 후다닥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뒤에 따라오면서 등허리를 때리더라고요. 여러분, 고집이 센 어린아이들, 때려도 안 되고 고함쳐도 안 되고 그런 아이들, 진짜 미운 일곱 살이라 하지만 진짜 미운 애들이 있습니다. 여기 앉은 우리 애들, 혹시 미운 일곱 살 시인하고 돌아가면 큰일 납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습니다. 장로님들을 뒤에다가 세워 놓은 것 같은데 장로님들을 이렇게 쳐다 보고 우리 신 목사님 참 지혜롭습니다. 저는 장로님들을, 저는 더러 당회를 쳤습니다. 제 있을 때는. 그런데 절대로 신 목사님은 장로님들을 건드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도록, 뒤에서. 진짜 어린아이의 믿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냐, 그리고 못 갉는 믿음이냐. 장로가 그러면 더 힘들잖아요. 크면 클수록 어린아이를 벗어버려야 하는데, 클수록 더 엄마아빠 젖 먹는다고 덤비면 이건 못 말립니다. 그래서 본보기로 장로들 앞에 지금 가만히 보니 세워 놓았습니다. 중직자들 앞에. 그런데 보니 중직자들이 어디 섞여 버렸는지 잘 안 보이네요. 왜 이런 말을 하느냐? 어린아이들이 믿음에 어린아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장성하여, 장성하여 정말 목회자에 도움이 되고 하나님 앞에서 교회를 섬기는 일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장로님 기도드렸는데 진심어린 기도입니다. 제가 들어 봐도. 누가 들어봐도 그런 기도로 느껴집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진심어린 기도를 해도 진심어린 기도로 듣는 사람이 과연 얼마냐? 평신도들은 잘 듣습니다. 장로들은 잘 안 들립니다, 그게요. 아, 원래 그런가 보다. 아, 저렇게 울면서 기도하면 감동이 되는가 보다. 저래 울면서 기도하면 감동이 되는가 보다, 그래도 들릴 수가 있어요. 진짜 믿음의 어린아이가 되어있으면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 했습니다. 믿음의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귀중한 역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주는 어린이 주일이고, 다음주는 어버이 주일이에요. 어버이 주일은 원래는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아버지가 섭섭할 것 같아서 어버이라는 말을 붙였지 원래는 어머니 주일입니다. 가정에는 진짜 어린아이의 교육은 어머니가 합니다. 그래서 요즘도 보니까요 인터넷에 가끔 보면 학생들의 문제를 다루는 사이트가 나와요 보면 은, 학생들이 꾸중하다가 잘 안 들으면, 다음 내일 엄마 데리고 와, 부모를 데리고 와라 하더라고요 애들이 제일 무서워 하는 게 그거더라고요 부모님 데리고 오라하는 것이요 그러면, 약아빠진 애들이 부모 안 데리고 오고 삼촌하고 약속을 해가지고 삼촌을 데리고 와요. 삼촌은 가면 집에 와서 삼촌 갔다 소리 하고 입다 물어라 하고 그래가지고 하는 약삭빠른 애들이 있더라고요 문제는 애들을 바로 키우고 정말 후대를 키우기 위해서는 부모가 바로 서야 합니다. 진짜 다음 주에 얘기해야 할 얘기지만 어린이 주일에 더 하고 싶어요. 여러분 어린이들을 옳은 복음의 어린이로 만들라 하면 복음의 후대로 만들려면, 부모가 먼저 만들어지지 않으면 부모가 정말 복음의 사람이 아니면, 애들이 그렇게 후대를 키울 수가 없어요. 지도 안 되는데 어떻게 애들을 키웁니까? 왜 애들은 부모가 말하는 것에서 크는 게 아니고, 부모의 하는 일을 보고, 그들의 삶을 보고, 애들은 큽니다. 그래서 부모의 교육이 말로 잘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은 기도하시고 아무 소리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애들 위해서 말하면 잔소리에요 물론 잔소리도 부모에게는 최고의 교육이라 그러지만 부모의 말이 애들에게 잔소리로 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하세요. 애를 위해서 기도하세요. 기도로 깊이 하고 말하지 않을게 좋습니다. 그리고 삶으로 복음의 삶으로 인도 받는 것이 최선의 역사입니다. 우리 삶에 기도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내가 기도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자 이겁니다. 훈련 할 때에, 기도의 자리를 만드는 훈련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계속 메시지는 계속 훈련하는데 기도의 자리를 안 만드니깐 보니깐 기도는 메시지의 바빠 가지고 메시지의 늘 쓰고 거하느라 바빠서 기도는 더 안하는 것 같애요. 물론 이거는 아니겠지만 은 그래서 내가 앉는 자리에서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내가 앉는 자리에서 기도의 자리를 만들어보자 그리고 깊이 언약을 붙잡고 예수그리스도 잡고 고리도후서 12장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은혜를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여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 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일어나도록 주의 종들에게 기도의 자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기도의 집중할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시고, 말씀과 기도와 전도가 이어서 나온다. 그러지만, 예수그리스도 언약 잡고 기도하지 않으면 이 축복이 나올 수 없는 것을 너무나 경험 합니다. 정말 우리 후대를 키울 때에 기도의 후대를 만들게 하시고 정말 나의 자녀를 기도의 자녀로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옵소서 영광을 받으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8년 5월 6일 주일 2부 예배 박지온 목사
바울의 고백
(고후12:1-10)
서론: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예쁜만큼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후대들을 두고 기도하면서 언약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고백인데,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1. 바울의 고백
가. 바울은 율법 선생, 가말리엘 문하의 학자였음
1) 가지고 있었던 율법이 없어진 것이 아닌 율법과 복음이 연결 되어짐
2) 내게 주시는 말씀을 붙잡고 각인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붙잡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됨을 깨달음
1) 바울은 복음을 나의 것으로 붙잡음
2) 3년 동안 아라비아에 기도하러 감(갈1:17) - 기도하면서 받은 응답의 열매가 오늘 본문
2. 그리스도 - 10분만 집중, 체험하면 역사
가.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때 말씀에 집중할 수 있음
나. 이 때부터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음
다. 내가 있는 자리를 기도의 자리, 집중의 자리로 만듬 – 훈련 되어져야 함
1) 그리스도를 체험,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됨
2) 무시기도에 집중하게 됨
3)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됨 – 하나님의 계획을 질문하며, 그것을 가지고 기도
결론: 우리의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아니라 장성한 자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후대를 바르게 키우기 위해 부모가 먼저 복음 앞에 서야 합니다. 아이들을 기도하고, 부모가 먼저 복음의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언약 붙잡고 바울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되는 축복 누리시길 바랍니다.
“바울의 고백”
(고후12:1~10)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3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두노라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8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고후12:1~10
■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여, 은혜를 감사합니다. 주의 종들을 어린이주일로 함께 모여 은혜 있게 하시고, 또 어린이를 통해서 우리 부모들이 생각할 바를 영적인 문제로 인도받게 하시며 특별히 우리 남미에 가신 신 목사님에게 은혜 주여서 제자 삼고 제자 세우는 은혜로 역사하여 주옵소서. 종을 세우셨사오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말씀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늘 강단에 설 때마다 요즘 들어서 더 떨리는 것 같습니다. 혹시 왜 그러냐 싶을지 몰라도 처음 서는 것 같고 뭘 해야 할 것인지 마음으로 생각을 많이 하게 되고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 잠깐 애들 보면서 참 예쁘다, 그리고 여러분들 얼굴을 보니 하나같이 웃고 있습니다. 박수도 잘 치고 하면서. 그래서 아 어린이들이 참 중요하구나, 그러면서 우리 어린이들에 대한 이해를 잘 못했구나. 옛날에 어떤 이상한 교단에서 어린이들을 이용해서 자기 교단을 선전하는 세계적인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리틀 엔젤스라고. 그래서 많은 호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어린이를 이용해서는 안 되고 어린이를 보면서 예쁘다고 할 때 그들의 영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영혼을 볼 수 있고 어린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부모 외에는 안 됩니다. 모두 웃는 것이 애를 가진 부모들이지, 애가 없는 총각들은 얼굴이 안 그렇습니다. 다릅니다. 처녀들도 그렇고. 정말 내 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이런 아이들을 보면 감동 이전에 먼저 감동이라고 말하기 전에 깊은 애정이 흐릅니다. 그 애정을 영적인 애정으로 바꿔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 어린이주일에 이해를 할 귀한 문제입니다. 요즘은 잘못된 사람들이 어린이들에게 이상한 짓을 하고 그런 것이 있는데, 예쁠수록 우리가 영적인 눈으로 안 보면 곁길로 갈 수 있는 배경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고백입니다. 바울의 고백이라고 하면서 그냥 바울의 고백으로 끝나지 말고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했는데 그게 나의 고백이 되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어린이 주일이라고 해서 어린이에 대한 말씀은 안 하기로 했습니다. 왜? 우리 신 목사님이 어린이들을 너무 사랑해서 전부 앞에 다 앉혀 놓았지 않습니까? 장로님들보다 앞에 앉혀 놓았습니다. 이런 일은 교단에서도 없을 것 같고 세계 어떤 교단에서도 내가 알기로는 없는 것 같습니다. 장로님들보다 앞에 앉아 있다, 어린이들이. 보통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 어린 아이들이 무심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교회가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그만큼 여러분을 속으로는 아닐지라도 우선 교회적으로 형식으로라도 우리 아이들을 귀하게 여긴다는 표시 중의 표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신 목사님이 있는 한 날마다 어린이주일이다. 앞에 앉아 있는 것만 해도 어린이 주일입니다. 제가 어린이주일에 대해서 할 말이 별로 없습니다. 너무 우리 어린이들이 날마다 아름답게 인도를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의 고백을 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뭐냐 하면 사실 이 고백은 바울이 율법 선생으로 율법에 완전히 익숙하고 율법교사로, 또 율법을 전하기 위해서 있던 가말리엘 문하에서 귀한 학자로 있었던 바울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 율법이 없어진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복음이 연결되었습니다. 유례 없는 바울의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선언했습니다. 이방인 앞에 세우리라. 이방인의 왕과 이방인들 앞에 세우겠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안의 전도보다 이방 나라의 전도가 우선이었고 그의 일생이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좀 이해해야 할 것은 내가 체험한 것 이외에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여러분, 간증 들어보면 전부 자기가 체험한 것을 이야기하지, 남의 것을 나의 것으로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간증에 주의할 것은 들을 때 여러분들이 그 간증으로 말씀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합니다. 간증으로 받지 말고 말씀으로, 그 간증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게 아니면 이 간증, 저 간증 따라가다가 이상한 사람 됩니다. 여러분들이 꼭 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간증을 들을 때, 또 우리 신앙 생활의 순서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누구를 깨달았느냐, 복음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우리가 언약을 깨닫는다고 하는데 언약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언약이라고 해서 언약의 말씀이라고 해서 요즘 훈련할 때 보니까 말씀 정리하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유 목사님 말씀 녹취를 해 보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아무나 하는 것도 아닙니다. 어지간히 정신 바르지 않으면 녹취가 안 됩니다. 자꾸 딴생각하고 이상한 방향으로 흐릅니다. 그래서 말씀 정리하고 하니 전부 유 목사님 말씀을 녹취해서 그것을 전부 익히고 알고 그러는데 안 그래도 됩니다. 왜? 하나님이 말씀을 심어주는 것이 있습니다, 메시지 들을 때에. 그 말씀 하나만 잡아도 됩니다. 다 몰라도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실 필요가 있는 말씀을 내게 각인시켜 줍니다. 그것을 잡고 나가면 됩니다. 그것 우리가 말씀, 말씀, 그래서 그 말씀 다 들으려고 애쓰고 말씀 전부 외우려고 애를 쓰는데 안 외워도 됩니다. 머리 나쁜 사람은 아무리 외우려고 해도 안 됩니다. 제가 지금 외우려고 생각을 해 보니까 우리 이수 장로님 참 잘 외우시던데 원래 머리가 좋습니다. 잘 외우는 데는 머리가 좋아야 하는 것도 있지만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아무나 외우는 것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복음편지에 나오는 구절을, 복음에 대한 구절을 이백 번, 삼백 번 쓰고 나니 좀 외워지더라고요. 지금 타자를 하니까 좀 더 늦어진 것 같아요. 쓰니까 외워지더라고요. 그런데 그나마 그래도 외울 수 있는 머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그런데 여러분은 더 못 외웁니다. 왜? 앞의 것 외우면 뒤의 것 벌써 잊어버려요. 뒤의 것 나오기 전에. 그래서 외우려고 애를 쓰는 것보다 하나님이 그 시간에 메시지 속에서 주시는 각인되는 말씀이 있습니다. 딱 박히게 해 주는, 내 마음에 심어 주시는 말씀. 그래서 늘 각인, 뿌리, 이야기하는데 내 마음에 말씀이 각인이 되고 뿌리가 되어야 열매가 나오지, 건성으로 들어서는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건망증이 심한 여러분들은 문 열고 들어가면 말씀 기억 못합니다. 오히려 다른 것 기억하고 나갑니다. 잠깐 동안 옆에 앉은 사람이 이상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나가든지, 그런지 참 말씀 각인이라는 자체가 은혜입니다.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죠, 언약입니다. 그것을 잡고 예수 그리스도, 모든 것 해결 받았습니다. 율법 속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답답하던, 막혔던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붙잡은 동시에 다 해결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너무 감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것으로, 진짜 나의 것으로 잡기 위해서 갈라디아서 1장 17절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리고 18절에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했다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15일을 머무를 동안 그저 삼년 만에 다메섹에 있다가 게바에게. 아라비아로 갔다가 삼년 만에 게바를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그랬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바울이 언약을 잡고 나니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나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잡고 자기도 모르게 아라비아에 삼년 동안 기도하러 갔습니다. 이때에 받았던 환상이나 받았던 깊은 기도의 열매가 고린도후서 12장 1절부터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 내용 속에 여러분들이 아마 체험을 해 본 사람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듣기만 하고 보기만 한 사람이 거의 많습니다. 제가 유 목사님 이 말씀을 잡고 유 목사님은 한 10분 만에 체험한 이 사실을, 체험을 한다 그러는데 저는 적어도 하룻밤 새 기도해야 체험되는데 어디 간단히 그렇게 체험이 되느냐? 늘 기도 속에 있다가 집중해버리면 체험합니다. 10분만 집중하면 체험한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여러분, 말씀은 언약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10분만 깊이 집중해도 놀라운 환상이라고 하나, 사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체험이, 또 우리의 경험이 뭐냐 하면 우리의 체험, 그것이 10분 집중해서 체험할 체질이 아직 안 되었습니다. 유 목사님의 경우는 얼마든지 되고도 남습니다. 그렇게 고백도 했고. 제가 초기에 메시지를 붙잡고 전도학교를 계속 뛰어다녔습니다. 뛰어다닐 때는 앉으면, 제가 늘 뒤에 앉으니까, 운전은 다른 사람이 하고. 차에 앉았을 때랑 계속 무시기도가 나옵니다. 호흡기도가 나옵니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앉아 있을 때도 메시지 전하기까지는 호흡기도가 됩니다. 그런데 내가 뭘 하는 동안에는 안 됩니다. 그리고 더군다나 여자분들이 이걸 무시기도로 내가 호흡 기도를 하려고 하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 집에 가면 보이는 게 일거리이고 일거리 한두 개 하다 보면 모든 걸 다 잊어버리는데 무시기도가 집중해서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무시기도를 진짜 집중을 시키기 위해서 집중훈련을 하더라고요, 보니까. 집중훈련을 하는데 숙제에 매여서 다른 것을 못합니다. 그리고 허덕거립니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느낀 게 무엇이냐 하면 아, 말씀은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도. 왜? 계속 말씀은 써야 하고 또 말씀은 기억해야 하고 하니까 그동안 말씀을 집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아, 한 가지 더 집중할 수 있으면 좋겠다. 왜? 우리 체질들이, 특히 여기 주부들이 살아가는 삶의 체질이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에 집중할 시간. 그러니까 집중훈련을 할 때에 기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것이 어떠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 알고 있는데, 말씀도 집중할 수 있는데, 사실은 어떤 면에서 기도로 집중해 버리면 말씀은 따라오더라, 말씀, 기도하는데 말씀은 이미 잡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 잡고 깊이 들어가면 뭐가 나오느냐? 메시지 들을 때, 말씀 들을 때 저절로 깨달음이 오고 고개가 끄덕여지고 기도 없이 말씀 들으면 고개고 뭐고 없습니다. 딴생각이 따라 들어오니까. 그런데 기도하고 깊이 언약을 잡고 있을 때 메시지를 들으면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밝아지고 예수 그리스도 듣기만 해도 좋아지게 됩니다. 좋아진다는 뜻으로 역사 아니고 그 배경이 내 마음에 와집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 맨날 듣던 얘기이고 그것도 자기가 맨날 들으니 불감증이 생겨서 또 그 얘기 하는가 싶어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와서 또 그 얘기 하네, 싶으면 여러분은 불감증이 생긴 것이고 그것은 진짜 하루 이틀 가면 갈수록 더 굳어지는 사람이 되고 큰일 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로 뭔가 내가 은혜를 받고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눈이 열려야 지속해서 말씀에 집중이 나올 수도 있고, 물론 지속해서 기도가 집중이 되고 지속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훈련하는 동안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보니 우리 집에서 몇을 연결해서 교회에 기도하러 간다고 하면서 가고 그럽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게 교회까지 가는 것, 교회까지 가는 시간들, 그 일에 집중하는 시간들, 참 어렵더라고요. 그런데 어떤 습관을 들여야 하느냐? 내가 앉는 자리가 집중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훈련이 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저는 옛날에 늘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가 기도통을 만들어 놓고 늘 거기 가서 기도합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내가 어떤 자리를 기도하는 자리로 만들면 그 자리에 앉으면 집중이 됩니다. 그 자리에 앉으면. 그런데 나는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특별히 말씀을 준비하고 강단에 서려면, 마음에 뭐가 가득합니다, 그러면 기도통에 앉으면 집중이 됩니다. 다 사라지게 되고 말씀에 집중이 됩니다. 그런데 그게 멀리 기도통까지 가지 말고 집안에서 내가 기도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반드시 언약, 예수 그리스도 잡고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무시기도, 늘 이야기하는데 여러분, 무시기도 됩니까? 무시기도라 하는 건 잠깐 지나쳐 계속 기도 속에 있기 위해서 됩니다. 그러나 기도에 집중하는 것은 무시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기도에 집중해서 하나님 말씀과 깊이 연결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깊이 연결ㄷ죌 수 있는 것은 기도에 집중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일반 교인들은 아마 만들면 되지 싶습니다. 아, 옛날에는 저희 교회에서 지하에, 송현교회 있을 때에 기도통을 네 개를 만들었던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기도통을 네 개를 만들고 구역마다 24시 돌아가면서 기도가 끊이지 않도록 기도를 했습니다. 했는데 그 때에 우리 온 교회가 영적 영감이 살아났습니다. 얼마나 뜨거웠던지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지금도 어떤 면에서 기도통을 만들어 놓았다고 하는데 지하에 있다고 합니다. 아직 가 보지 못했어요. 너무 깊이 들어앉아 있어서. 제가 못 가 본 것이, 걸어가야 되고 그러니까. 가 봐야 하는데 거기 또 기도통을 만들면 환경이 쾌적해야 합니다. 기도하러 들어가면 축축하고 우중충하고 냄새나면 기도가 안 됩니다. 그러다 시간 뺏깁니다. 쾌적해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지하에 지금 만들어 놨다, 아마 인상에 분명히 냄새날 거고 축축할 거고 지하에 있어서 별로 기도통이 잘 안 되지 싶습니다. 그러니까 거기 들어가려고 애쓰지 말고. 들어가도 좋습니다. 찾아가도 됩니다. 그러나 내 가정에서 내가 기도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날 받은 메시지를, 또 내가 붙잡은 메시지를, 떠오르는 메시지를 잡고 진짜 각인하고 진짜 뿌리를 내려서 기도에 한번 집중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능력이 체험됩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하늘 문도 여십니다. 필요하면 엄청난 능력의 역사가 나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 생활이고 신앙 생활의 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나아가면 내가 어디서든지 당당하게 됩니다. 어디서든지. 그리고 이렇게 되면 늘, 무시기도라면 간단하게 말할 수 있지만 무시기도에 집중이 나가면 저절로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배경이 없이 무시기도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말씀 전체를 외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 시간에 메시지를 주실 때 내게 각인되는 메시지가 있더라고요.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에 성경 읽어 나가는 중에서 내게 주신 한 절, 두 절, 한 장에 각인시키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각인해서 적어 놓고 그 다음에 그것을 마음에 기억하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것을 굳이 안 해도 내 평생에 각인된 메시지 몇 구절만 해도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제게는 늘 여러분들에게 말씀하는 것이지만 빌립보 1장 6절, 그것 가지고 살았습니다, 초기에. 어려우면 그것 가지고 나가서 기도하고. 또 그 다음에 빌립보 4장 13절입니다. 주로 그것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 더 나아가 우리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 그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역시 기도하는 집중 속에서. 또 제가 집중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 있었습니다. 몸이 너무 안 좋으니까. 여러분, 아플 때 아야 소리밖에 안 나오지만 정신이 들면 집중하게 됩니다. 기도가. 제일 기도가 집중될 때가 언제냐? 덜 아플 때입니다. 많이 아플 때는 그게 잘 안 됩니다. 아야, 아야, 거리지. 먼저 돌아가신 우리 이일향 목사님, 기도, 뭐 아플 때 기도가 나와? 아야 소리밖에 더 나와? 그랬는데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아야 소리밖에 안 나왔습니다. 그러나 덜 아프면 기도가 집중될 수 있습니다. 그 집중된 속에서 내가 붙잡은 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왜? 가려 하다가도 안 가지요, 아무리 가게 해 달라고 해도 안 되지요, 죽었다 싶을 때 또 살아나지요, 죽음도 내 마음대로 못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생각을 내 마음대로 해 본 적이 없습니다. 특별히 더 무엇이냐 하면 나는 목사니까 평탄하게 모든 일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프면 아픈 대로 지시가 더 듭니다. 병원에 가면 지시가 더 듭니다. 예를 들면 계속 기도하게 만들더라고요. 기도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 같아요. 왜? 워낙 기도하는 체질이 안 되니까. 병원에 가서 제가 간단하게 빼내버리며 될 맹장염도 뭐 한다고, 그 때에, 뭐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맹장염이 깊어졌던지 이게 아프기 시작하는데 전에도 얘기했지만 밑에서 뛰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그러다가 정신이 나가버렸습니다. 얼마나 아팠는지. 그러니까 그때가 오뉴월 한참 더울 때입니다. 내가 가톨릭 병원에 갔던가, 가니까 이 사람들이 병명을 모릅니다. 그런데 병명을 모르니까, 거기 가면 금방 병명을 알고 복막염이라도 병명을 알고 때내어 버리면 되거든요. 수술을 해 버리면 되는데 수술을 안 해줍니다. 이게 일주일이 가도록 안 해 주는 겁니다. 일주일째 수술을 다 잡아 놓고 외과 과장이 내가 내과에서 병명도 모르는 수술 나는 할 수 없다, 내가 덤터기를 쓰기 싫다. 덤터기 쓴단 말이지요, 병명 모르고 했다가. 그러다가 죽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그래서 도망갔다가 다시 와서, 안 되겠던 모양이지요, 양심에. 수술을 했습니다. 도망갔다가 왔어요, 또. 하나님이 살리려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때 나한테 병원에서 그러더라고요. 서울 가겠느냐? 여기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서울 가라고 했던 것 같아요. 저는 죽어도 그 때 뭐냐 하면 마음이, 여기서 될 수술 같으면 여기서 하고 여기서 죽을 것 같으면 여기서 죽지 굳이 서울 가서 뭐하려고 죽어? 이런 마음이 들어서 서울 안 가겠다, 죽었으면 죽었지 여기서 죽으련다, 이래서 버티고 있으니 와서 토요일인가 그 때 그럽니다. 와서 수술을 했는데 복막염이었습니다. 이게 다 물러 터져서 이상하게 속에 너무 농이 차서 병명도 모를 정도로 덮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안 죽었습니다. 나는 또 한 번 아, 내가 죽고 싶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복막염이 물렀으면 삽일 이상이면 죽기 직전이거든요. 일주일 다 되어서 여름에 완전히 전부 고름이 다 차도 안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이 오라고 해야 가지 아무리 여러분이 가고 싶다고 해도 갑니까? 그러니까 너무 어려울 때 하나님, 가고 싶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마십시오. 자기 마음대로 합니까? 가고 싶다고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안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 그 때일수록 하나님, 때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나를 이 시간 하나님의 계획이 뭡니까, 이걸 붙잡아야지 자꾸 가고 싶다 그러면 그것은 망령된 말입니다. 망령된 기도이고요. 그런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 당신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나를 이렇게 만든 계획이 무엇입니까? 저희 누님이 얼마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김철연 목사님 지난주에 설교를 했습니다만 저는 누님의 사랑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왜냐 하면 그 가정이 목사 가정이기 때문에 제가 좀 어려울 때에, 또 군대 있을 때에 휴가 나오면 거의 그 집으로 갔습니다. 내가 제일 편하니까. 근데 해군이 되어서 한 달에 몇 번씩, 한 번 이상 꼭 휴가를 옵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해군에는 출동을 나가면 최소한의 인원만 데려가고 나머지는 다 휴가 보내버립니다. 휴가 많이 가려거든, 젊은 사람들, 해군 가면 제일 많이 나옵니다. 해군은 배를 타야 되고, 배를 안 타면 안 됩니다. 배 타면 최소한의 인원을 데리고 갑니다. 왜냐? 먹고 자고 그 다음 마시고 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을 데리고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인원은 전부 휴가 다 보냅니다. 저는 해군에 있으니까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나가거든요. 출동을 나갑니다. 우리나라 근해 나갈 때 한 달에 한 번씩 나갑니다. 나가면 휴가를 한 달에 최소한 한 달에 한 번 이상 갑니다. 어떨 때는 근해에 가기 때문에 15일에 한 번씩 또 휴가 나옵니다. 저는 별로 필요가 없습니다. 출동 나가면. 왜 그러냐? 저는 의무기 때문에, 의무는 두 사람을 데리고 갈 필요 없습니다. 적은 숫자는 한 사람만 데리고 가거든요. 주로 내 위의 계급 가진 사람이 나가고. 어떤 경우에는 나한테 병으로 있었으니까 나를 데리고 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누님이 제가 교회에 있을 때 송현교회 있을 때부터, 그전부텁니다. 간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다 암으로, 간암으로 다 끝났다고 해서 다 예배 드리고 그 때 우리 교회에서도 한번 얘기를 했습니다. 예배 드리고 임종예배까지, 맏형님 살아계실 때. 그리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누님이 임종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생각이, 아들이, 김철연 목사가 미국에 있으니까 아들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가자, 그래서 죽음 직전에 암을 가지고 미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들어가기 직전에 마음이 아, 너무 좋다, 아무리 가고 싶어도 하나님이 안 보내 주시니까 못 갔거든요. 그런데 이제 암이니까 이제 때가 되면 가겠구나, 너무 기뻐가지고 얼굴만 보면 되니까, 아들은. 미국 들어가니까 얼마나 미국 갈 때 기뻤던지, 가서 미국에서 삶이 얼마나 기뻤던지 암이 나아버렸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것이 며칠 전까지 살았습니다. 91세까지. 그 다음에 몇 번 간다는 소리 했는데 안 데려가시니까 안 갑니다. 하나님의 주권. 그러니 여러분, 간다 소리 절대로 하지 마십시오. 네가 간다고 가나? 하나님이 불러야 가지. 내가 간다고 가나? 안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 이 시간에, 이 문제 속에, 이 어려움 속에 하나님의 나에 대한 계획이 뭐냐? 이걸 잡아야 합니다. 이걸 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장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믿음이 성장했다고 하면 오늘 또 교독문에서 어린아이 같은 믿음이 성장한 믿음이고 참된 믿음이라 그랬는데 그런데 고린도서에 보면 성장한 믿음이 어린아이가 아니고 어린아이 같은 믿음은 어떤 면에서 성장 안 된, 골치 아픈 사람의 믿음이 어린아이의 믿음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그게 고린도서에 있더라고요. 그런데 일단은 어린아이가 진짜 말 안 듣고 골치 아프면 이것은 못 건드립니다. 뭐라 해도 안 되고. 좀 어렵게 말하면 막 이를 갈고 두들겨 패도 안 듣습니다. 고집 한번 부리면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저도 어머니가 제가 알고 있는 한때에 얼마나 고집이 셌던지 하도 고집스러워서, 어머니가 잘 손을 안 대는데, 어머니는 꼭 손을 댈 때 회초리를 댑니다. 대면 항상 어디냐, 폴짝 뛰지 말라고, 뛰면 미끄러지라고 목침 위에, 목침이 뭔지 압니까? 베개를 만드는데 나무를 네모나게 깎아서 그 위에다 딱 세워 놓습니다. 세우면 폴짝 뛰면 떨어지거든요. 그렇게 해서 못 뛰도록. 그렇게 해서 종아리를 걷습니다. 종아리를 걷으면 종아리에다 때립니다. 때리는데 때리는 게 참 신기합니다. 기도하면서 때립니다. 어머니의 때리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때리면서 한 번도 저는 어머니가 욕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노무새끼야 하든지, 때리는 그래야 하는데, 성이 나면. 입 꽉 다물고. 어머니 입술이 좀 얇은 편입니다. 입 꽉 다물면 절대 안 열립니다. 두꺼운 입술이 아닌데 더 안 열립니다. 입 딱 다물고 회초리를 때리면, 입 딱 다물고 때리거든요. 때리면 폴짝폴짝 뛰지를 못합니다. 떨어지니까, 넘어지니까, 목침 위에서. 그러다가 하도 견디기 힘들어서 그만 목침에서 넘어지기 전에 후다닥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뒤에 따라오면서 등허리를 때리더라고요. 여러분, 고집이 센 어린아이들, 때려도 안 되고 고함쳐도 안 되고 그런 아이들, 진짜 미운 일곱 살이라 하지만 진짜 미운 애들이 있습니다. 여기 앉은 우리 애들, 혹시 미운 일곱 살 시인하고 돌아가면 큰일 납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습니다. 장로님들을 뒤에다가 세워 놓은 것 같은데 장로님들을 이렇게 쳐다 보고 우리 신 목사님 참 지혜롭습니다. 저는 장로님들을, 저는 더러 당회를 쳤습니다. 제 있을 때는. 그런데 절대로 신 목사님은 장로님들을 건드리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보도록, 뒤에서. 진짜 어린아이의 믿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우냐, 그리고 못 갉는 믿음이냐. 장로가 그러면 더 힘들잖아요. 크면 클수록 어린아이를 벗어버려야 하는데, 클수록 더 엄마아빠 젖 먹는다고 덤비면 이건 못 말립니다. 그래서 본보기로 장로들 앞에 지금 가만히 보니 세워 놓았습니다. 중직자들 앞에. 그런데 보니 중직자들이 어디 섞여 버렸는지 잘 안 보이네요. 왜 이런 말을 하느냐? 어린아이들이 믿음에 어린아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겁니다. 장성하여, 장성하여 정말 목회자에 도움이 되고 하나님 앞에서 교회를 섬기는 일에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장로님 기도드렸는데 진심어린 기도입니다. 제가 들어 봐도. 누가 들어봐도 그런 기도로 느껴집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진심어린 기도를 해도 진심어린 기도로 듣는 사람이 과연 얼마냐? 평신도들은 잘 듣습니다. 장로들은 잘 안 들립니다, 그게요. 아, 원래 그런가 보다. 아, 저렇게 울면서 기도하면 감동이 되는가 보다. 저래 울면서 기도하면 감동이 되는가 보다, 그래도 들릴 수가 있어요. 진짜 믿음의 어린아이가 되어있으면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 했습니다. 믿음의 장성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귀중한 역사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주는 어린이 주일이고, 다음주는 어버이 주일이에요. 어버이 주일은 원래는 없어요. 우리나라에서 아버지가 섭섭할 것 같아서 어버이라는 말을 붙였지 원래는 어머니 주일입니다. 가정에는 진짜 어린아이의 교육은 어머니가 합니다. 그래서 요즘도 보니까요 인터넷에 가끔 보면 학생들의 문제를 다루는 사이트가 나와요 보면 은, 학생들이 꾸중하다가 잘 안 들으면, 다음 내일 엄마 데리고 와, 부모를 데리고 와라 하더라고요 애들이 제일 무서워 하는 게 그거더라고요 부모님 데리고 오라하는 것이요 그러면, 약아빠진 애들이 부모 안 데리고 오고 삼촌하고 약속을 해가지고 삼촌을 데리고 와요. 삼촌은 가면 집에 와서 삼촌 갔다 소리 하고 입다 물어라 하고 그래가지고 하는 약삭빠른 애들이 있더라고요 문제는 애들을 바로 키우고 정말 후대를 키우기 위해서는 부모가 바로 서야 합니다. 진짜 다음 주에 얘기해야 할 얘기지만 어린이 주일에 더 하고 싶어요. 여러분 어린이들을 옳은 복음의 어린이로 만들라 하면 복음의 후대로 만들려면, 부모가 먼저 만들어지지 않으면 부모가 정말 복음의 사람이 아니면, 애들이 그렇게 후대를 키울 수가 없어요. 지도 안 되는데 어떻게 애들을 키웁니까? 왜 애들은 부모가 말하는 것에서 크는 게 아니고, 부모의 하는 일을 보고, 그들의 삶을 보고, 애들은 큽니다. 그래서 부모의 교육이 말로 잘하려고 하지 말고 일단은 기도하시고 아무 소리 안 하는 게 좋습니다. 애들 위해서 말하면 잔소리에요 물론 잔소리도 부모에게는 최고의 교육이라 그러지만 부모의 말이 애들에게 잔소리로 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기도하세요. 애를 위해서 기도하세요. 기도로 깊이 하고 말하지 않을게 좋습니다. 그리고 삶으로 복음의 삶으로 인도 받는 것이 최선의 역사입니다. 우리 삶에 기도가 없어졌어요. 그래서 내가 기도 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자 이겁니다. 훈련 할 때에, 기도의 자리를 만드는 훈련 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계속 메시지는 계속 훈련하는데 기도의 자리를 안 만드니깐 보니깐 기도는 메시지의 바빠 가지고 메시지의 늘 쓰고 거하느라 바빠서 기도는 더 안하는 것 같애요. 물론 이거는 아니겠지만 은 그래서 내가 앉는 자리에서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이 내가 앉는 자리에서 기도의 자리를 만들어보자 그리고 깊이 언약을 붙잡고 예수그리스도 잡고 고리도후서 12장에 나오는 바울의 고백이 나올 수 있도록 기도하는 은혜를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여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 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속에 일어나도록 주의 종들에게 기도의 자리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기도의 집중할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시고, 말씀과 기도와 전도가 이어서 나온다. 그러지만, 예수그리스도 언약 잡고 기도하지 않으면 이 축복이 나올 수 없는 것을 너무나 경험 합니다. 정말 우리 후대를 키울 때에 기도의 후대를 만들게 하시고 정말 나의 자녀를 기도의 자녀로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옵소서 영광을 받으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8년 5월 6일 주일 2부 예배 박지온 목사
바울의 고백
(고후12:1-10)
서론: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어린아이들이 예쁜만큼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후대들을 두고 기도하면서 언약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고백인데,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1. 바울의 고백
가. 바울은 율법 선생, 가말리엘 문하의 학자였음
1) 가지고 있었던 율법이 없어진 것이 아닌 율법과 복음이 연결 되어짐
2) 내게 주시는 말씀을 붙잡고 각인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붙잡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됨을 깨달음
1) 바울은 복음을 나의 것으로 붙잡음
2) 3년 동안 아라비아에 기도하러 감(갈1:17) - 기도하면서 받은 응답의 열매가 오늘 본문
2. 그리스도 - 10분만 집중, 체험하면 역사
가. 집중하는 시간을 가지게 될 때 말씀에 집중할 수 있음
나. 이 때부터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음
다. 내가 있는 자리를 기도의 자리, 집중의 자리로 만듬 – 훈련 되어져야 함
1) 그리스도를 체험,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됨
2) 무시기도에 집중하게 됨
3)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됨 – 하나님의 계획을 질문하며, 그것을 가지고 기도
결론: 우리의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아니라 장성한 자의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후대를 바르게 키우기 위해 부모가 먼저 복음 앞에 서야 합니다. 아이들을 기도하고, 부모가 먼저 복음의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언약 붙잡고 바울의 고백이 내 고백이 되는 축복 누리시길 바랍니다.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
1484 | 전환점을 이룬 안디옥 선교 | 행11:19-30 | 2025-04-27 | |
1483 |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메시지 | 고전15:1-11 | 2025-04-20 | |
1482 | 새로운 싸움을 위하여 | 삿7:9-18 | 2025-04-13 | |
1481 | 날마다 영적싸움에 승리하라 | 삿7:1-8 | 2025-04-06 | |
1480 | 이 시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 | 삿4:1-10 | 2025-03-30 | |
1479 | 하나님이 쓰시는 기준 | 삿3:12-23 | 2025-03-23 | |
1478 |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 삿3:7-11 | 2025-03-16 | |
1477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 삿2:6-10 | 2025-03-09 | |
1476 |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 삿1:1-7 | 2025-03-02 | |
1475 |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 단12:1-4 | 2025-02-23 | |
1474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 단11:28-39 | 2025-02-16 | |
1473 |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 단10:10-21 | 2025-02-09 | |
1472 |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 단9:20-24 | 2025-02-02 | |
1471 |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 단8:15-27 | 2025-01-26 | |
1470 |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단7:9-14 | 2025-01-19 |
1
2
3
4
5
6
7
8
9
10
...
99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