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성장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2013-02-03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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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2월 3일 주일 2부 예배 노동휘 목사
“성도의 성장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Isaiah42:1~4)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사42:1~4(Isaiah42:1~4)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옆에 계신 분과 인사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 하십시오. 행복하십시오. 어떤 분이 옆에 모른 분 앉아 계시는데 인사하려고 하니 힘들다고 하던데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가 서로 형제들과 함께 교제하고 나가는 것이 의미 있고 중요한 것입니다. 혹시 압니까? 옆에 사람이 총 들고 있나 칼 들고 있나 모르기 때문에 인사하실 때 꼭 악수를 하십시오. 총 들고 있나 칼 들고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
오늘 제목은 “성도의 성장은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시작되어진다”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성장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라고 했는데 순종에서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에게 고민이 있다면, 또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고민이 있다면 불신자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성도인데, 나는 신앙고백 했고, 예수님 내가 영접했는데 별 차이가 없어요. 때로는 더 못할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같이 성도라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나 교회 다닌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그런 모습에 처해 있을 때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주일날 교회에 출석해서 예배드리는 것과 헌금 드리는 것 외에는 차이가 없어요. 그런 것들 때문에 고민하게 되고 전도해야 되겠는데, 제대로 살아봐야 되겠는데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까 쉽게 만만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고민이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접할 때는 뭔가 대단한 것이 들어온 것 같았는데 세례 받고, 집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갈수록 믿음이 점점 못해져 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장로님이십니까? 집사님 되셨습니까? 권사님이십니까? 이렇게 말하는데 혼자 집에 가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때는 부끄럽고 힘들어질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때로는 뒤에 앉아서 남 욕이나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에 대해서 아는 게 많아져요. 이런 저런 이야기 하게 되고 그래서 불신앙의 전파자가 되어가지고 복음의 전파자가 되어야 하는데 불신앙의 전파자가 되어서 그 중심에 서 있는 나를 보게 되기도 하고 힘들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되어지는데 우리 신앙의 성장의 문제 어떻게 봐야 될 것인가? 오늘 거기에 대한 답을 찾는 그런 시간되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신앙생활의 출발점을 점검하라.
먼저 첫 번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출발이 어디냐는 것이지요. 교회 나오시는 분들이 희한하게 살다가 이렇게 저렇게 살다가 남들이 볼 때도 흉하게 살고, 또 그렇게 흉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제는 제대로 살아보려고. 그래 나도 이제 착하게 도덕적으로, 고상하게 살아보자고 생각해서 교회에 나와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끌려 나오지만, 또 어떻게 해서 무너져서 나오지만, 내가 이제까지는 완전히 망했는데 새롭게 시작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데 교회 나오니까 나한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 부분들 중에 십계명 중에 살인하지 말라. 그렇지 이것은 이해가 되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계명인지 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도덕적, 윤리적 생각인지 거기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다시 한 번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에서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납득되어 지는 수준은 뭡니까? 그럼 살인해란 말인가? 내가 어릴 때부터 들어왔고, 당연히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학교에서 배웠고, 부모님한테 배웠고, 당연히 뉴스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 법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 당연히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 맞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납득이 되어지고, 이해가 되어지고, 또 내가 수용이 되어진다면 출발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기 때문에 살인하지 말라고 되어 있구나! 살인하면 안 되는 거구나! 성도가 살인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이라서 그렇습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까? 소리 나지 않는 총만 있다면 지하철에서 내 발 밟는 사람 쏴 죽이고, 직장에서 내 맘에 안 드는 사람 쏴 죽이고, 교회 와 보니까 더 많아 권찰도 집사도 맘에 안 들고, 우리의 기준 가지고는 죽이고 싶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예요. 목사가 되어도 그래요. 그런데 기준이 뭐냐? 말씀이기 때문에 내가 살인하지 않는다는 기준이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발점이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둑질하지마라. 부모에게 공경하라. 이것이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도덕적인 기준이나 잣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구나! 거기에서 시작되어진다는 것이지요.
기독교를 도덕적 수준에서 시작해서 더 깊은 도덕적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목표점을 가지고 시작한다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면 빨리 멈추어야 합니다. 물론 도덕을 지키지 마라, 세상에 교통질서나 법규 지키지 마라, 하나님의 백성은 신호등을 지킬 필요 없고, 속도 카메라에서 벗어나니까 지키지 말라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출발이 어디냐 라는 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출발점이 말씀이어야 되고, 복음이어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신앙의 설 자리가 없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녀서 오래 동안 다니고 직분을 받아서 집사가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졌지만, 때로는 훈련을 받아서 목사가 되어지지만 출발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칼빈은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말했습니다. 인간은 불가능하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창세기 3장에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빠지고, 사탄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도 인간은 노예 되고, 포로가 되고, 속국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람은 상한 갈대라고 했습니다. 저는 갈대라고 하면 낭만적으로 보입니다. 사진 찍는 장소, 데이트하는 장소로 느껴집니다. 화왕산 가면 갈대인지 억새풀인지 모르겠지만, 쭉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농부들에게는 갈대라는 것은 전혀 쓸데없는 태워 없애야 되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지요. 거기에다가 상한 갈대, 꺾어져 버린 갈대는 쓸모도 없고, 볼품도 없는 그런 존재다고 합니다. 상한 갈대. 너는 상한 갈대다. 꺼져가는 등불이라는 것이지요. 등불이 뭡니까? 등불은 기름이 타서 초는 촛농이 녹아서 불을 붙입니다. 그런데 기름이 다 되어지고, 초가 다 되어지면 마지막에 심지가 타지 않습니까? 심지가 탈 때는 그렇다고 불이 꺼지지는 않아요. 그런데 독한 냄새가 나고 빛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타고 있는 것입니다. 불은 불인데 등불은 등불인데 의미 없는 존재, 이유 없는 존재, 쓸데없는 존재. 그것이 꺼져가는 등불이라는 것이지요. 냄새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릴 향해 꺼져가는 등불, 상한 갈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빛으로, 소금으로 불렀다고 하시지요. 빛으로 불렀다는 말입니다. 어디에 말입니까? 우리 집 안방에? 그래도 이야~ 싶을 텐데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불렀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될 수 없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발견해야 됩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과 세상의 빛, 소금하고는 연결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기를 그래도 나는 괜찮은 존재야. 쓸 만한 존재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해 놓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습니다. 왜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 하셨습니까? 잘록한 허리, 탱탱한 엉덩이를 보면서 하나님이 야! 보기 좋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까? 진한 눈썹, 오똑한 코를 보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했습니까?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은 그 인간의 몸이 완벽해서도 맞겠지만 그 마음과 생각이 육체를 움직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영혼이 우주를 움직이고 세상을 정복하는 다스리는, 살리는 존재로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습니다. 이것을 모르니까 화장해놓고 아 그래도 괜찮네. 성형 수술해 놓고. 그래 이만하면 되겠지. 요즘 유행하는 두툼한 입술 만들어 놓고 그래 매력적이야. 이러면서 거울 쳐다보면서 그래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뭐가 괜찮아요? 비싼 옷 사 입고, 명품 옷 사 입고는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것 자랑하러 나가서, 친구 만나러 나가서 괜찮다는 겁니다. 귀걸이 하나, 목걸이 하나 걸고, 반지 하나 꼽아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어디 가서 앉을 자리하나 만들어 놓고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자~ 이제 괜찮은 존재가 되었으니까 좀 더 도덕적으로 거룩하게 살아보자고 시작했다면 틀렸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실존이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나는 괜찮은 존재야. 쓸 만한 존재야. 교회 와서 그래도 내가 집사가 되고, 뭐가 되고 하니까 그래도 그렇지, 내가 괜찮으니까 되었잖아! 그게 아니라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버렸고 말씀을 듣기 보다는 세상의 우선순위에 더 빠져있고 우리는 더 악한 것에 귀를 더 빨리 기울이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더라도 행복하게 끝나는 영화와 슬프고 악하게 끝나는 영화. 어느 것이 더 좋은 것 같습니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는 아! 감동적이야 하면 끝입니다. 그런데 막 잔인하고 파괴하고 죽이는 영화는 또 보고 또 보고 나쁜 소문이 더 빨리 퍼집니다. 연예인 어떻게 되었지? 막 찾아봅니다. 그 찾아보고 검색하는 기사들은 안 되었고, 잘못되었고, 파괴되었고, 무너져 있는 기사들을 검색하지 잘 되어있는 기사는 검색하지 않아요. 우리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십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출발점이 조금 더 깊은 도덕적 경지에 이르려고 시작하고 있다면 신앙이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가? 교회에 왔는데 예수님 영접했는데, 신앙고백하고 있는데. 매일, 매주 하는데 신앙이 설 자리가 없어요. 내가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신앙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성취할 만한 기준 속에서, 내가 성취할 수 있을 만한 그런 기준과 그런 목표를 세워놓고 쫓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출발부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어느 어느 회사 다니는데, 어디 어디 있는데. 어느 만큼의 부를 유지하고 있고, 어느 아파트에 살고 있고, 어떤 차를 몰고 다니고, 나는 괜찮아요. 차를 타고 핸들을 잡으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세상은 살만한 것 같아. 이러고 있다면 신앙이 들어갈 자리가 없고 믿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릴 향해서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출발점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능과 우리의 완전한 멸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찾았고 사람을 보면서 찾아낸 것이지요.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출발점을 바로 점검해야 될 것입니다.
2. 은혜로만 갈 수 있는 구원의 자리
두 번째입니다. 은혜로만 갈 수 있는 구원의 자리라는 것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가 너무 나약하고, 너무 무능하고 완전히 불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에 우리는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의 자리에 이를 수가 없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 하는 사실이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했다고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겠지요. 내가 잠깐 곁길을 갔는거야, 내가 잠깐 외도 했는 것이고 내가 잠깐 실수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과 협상을 합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까지 해 드리겠습니다. 여기 까지 할 수 있습니다. 출발 자체가 내가 할 수 있는 기준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목표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정해 놓는 것이지요. 주일 예배는 내가 참석해 드리겠습니다. 헌금도 내가 하겠습니다. 그런데 수요예배는 너무 힘듭니다. 한 달에 한번만 하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설정해 놓는 것이지요. 십일조? 세금도 힘든데, 십일조 너무 힘듭니다. 선교헌금, 그것은 목사님들, 선교사님들이 하는 것이지. 나름의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더 이상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내 마음의 잣대를 짝 그어놓은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성장하지 않고 믿음이라는 것이 성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내게서 출발되어졌기 때문에 나는 쓸 만한 존재이고, 내가 세워둔 고상한 삶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기 때문에 조금 더 내가 만들어 놓은 그런 삶의 영역을 향해서 쫓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내가 목표를 세우고, 내가 기준을 정합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내 중심적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출발과 목표를 내가 정해놓고 있는 동안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그 상태 자체가 바뀌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멋있는 차를 타고, 집이 있고, 직장을 가지고 있고, 옷을 입고,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하고, 성형을 해도 나는 여전히 상한 갈대이고 꺼져가는 등불 인 것입니다. 끊임없이 악한 기사를 더 많이 검색하고 있을 것이고 내 속에는 여전히 악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내가 조금 더 고상한 척 하고 있지만 내 안에서는 여전히 허망한 것을 향해 쫓아가고, 방향을 잃어버리고 우울해져있고, 내가 왜 존재하는지 모르고 헛되고, 허망한 일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도 헛되고 허망한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가도 헛되고 허망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허망한 자리에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선택하셨습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어쩌다가 교회에 와서 내가 진짜 훈련 받고 힘들어 죽겠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선택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불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망도 못갑니다. 아이고, 내 안에 있는 예수님 좀 빼내어 주십시오. 옛날에는 술도 먹고, 화투도 치고 열심히 잘했는데, 그때는 술 맛도 맛있었고, 노름도 하면 잘 나갔는데 사람인데 예수님 영접하고 나니까 이제는 안 됩니다. 좀 빼내 주십시오. 하지만 빼지도 못합니다. 뺄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이제 안 된 것이지요. 무조건 선택하셨고, 궁극적으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까지 끌고 가십니다. 빨리 순종하고 믿음의 자리로 가면 멋있는 믿음의 삶을, 멋있는 신앙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놓치고 끊임없이 나를 괜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끊임없이 나를 멋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내 속에 신앙의 자리는 없어지고, 믿음의 자리는 없어지고 끊임없이 갈등과 어려움과 끌려 다니는 삶을 계속 사는 것입니다.
교회 훈련만 안 받고 예배만 안 드리면 되는 줄 아십니까? 나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왜 이런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하는 것이 끊임없이 내뱉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원래 꿈이 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포부가 크고, 스케일이 크고,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 하나 원했는 사람입니다. 아들이 없으니까 아들 하나 낳아서 오순도순 사는 것 이것이 꿈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냈어요.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했습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다. 말은 좋은데요. 나는 그런 것 싫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택해 버렸어요. 하나님이 그를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가 불순종의 시간도 있었고, 염려의 시간도 있었고,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가기도 하고 조카 롯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여러 가지 모습을 가졌지만 결국 그는 하나님이 그를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이 끊임없이 언약을 확인시키시고, 성취시키시는 믿음의 조상의 자리고 끌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내 안에 믿음의 자리가, 믿음의 성장이 시작되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우리는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 이삭은 백배의 축복과 샘의 근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저는 어떤 분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마다 자기 것을 못 버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너무 구질구질하다는 것이지요. 나는 저렇게 살기 싫기 때문에 내 것을 놓치면 저렇게 될 것 같아서 나는 절대로 내 것을 못 놓겠다는 것이지요. 이삭은 한해 농사를 지으면 백년을 먹을 농사를 지었습니다. 지금 유럽은 식량 작업량이 200%가 됩니다. 한해 농사를 지으면 그 다음해에 농사를 안지어도 될 만큼. 그런데 그 이삭은 백배의 축복을 받았어요. 샘의 근원의 축복을 받았어요. 그 이삭이 파 놓은 우물을 옆에 왕들이 와서 빼앗아 가버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했습니까? 화친을 맺자. 두려운 겁니다. 좀 싸워야 되는데 우물을 빼앗아 가려고 하면 싸우고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이삭은 그러지 않고 그냥 줘버리고 또 파요. 샘의 근원을 얻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무섭잖아요. 이 사람 보면. 그런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온 우주 만물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의 존재와 연결된 것이 성도입니다. 그것을 알고, 그것을 바라보고, 그 믿음을 가지기 시작할 때 성도는 신앙이 성장하게 되어 있고, 믿음이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기준에 맞추어서 헌금은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 헌신도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 훈련도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 합숙 받으면 너무 좋은데 더 이상 받으면 큰일 날것 같아. 내가 미친 듯이 하나님 믿을 것 같아, 너무 좋은데 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래서 합숙 이상 받으면 안 돼.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축복과 그 응답의 자리가 무엇인지 발견해 갈수록 내 믿음의 자리에 다른 것을 갖다 놓고, 도덕을 갖다놓고, 동기를 갖다 놓고, 내 욕심을 갖다놓고, 내 상처를 갖다놓고 그것을 성장시킬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자리에 믿음이 자랄 수 있도록, 신앙이 자랄 수 있도록 우리가 나가야 되겠습니다.
3. 기도의 필요성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기도의 필요성들이 발견되어 지는 것이지요.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영혼은 온 우주에 영향을 주는 존재입니다. 영혼이 얼마나 중요한가? 영혼에 잘못된 것이 각인되면 재앙과 저주가 옵니다. 영혼에 엉뚱한 것이 각인되면 쓰나미, IMF 등의 저주와 재앙으로 세상이 망하게 됩니다. 르네상스는 인간이 모든 것이라는 중심을 가지고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없으면 잘될 줄 알았는데 세계대전이라는 큰 전쟁이 두 차례나 터졌습니다. 인간의 영혼에 허망한 것과 저주가 각인되면 재앙이 옵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과 말씀이 각인되면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요셉 한 사람 때문에 보디발의 집과 그 밭의 소유까지 축복을 입은 것처럼, 내가 은혜를 입으면 내가 있는 직장에 서류 한 장까지 축복을 입게 됩니다.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왜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의 영혼이 바뀌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꺼져가는 등불, 상한 갈대와 같이 전혀 불가능한 존재인데 하나님이 부르시니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조금 더 참고, 일찍 일어나고, 일찍 출근해서 부지런해지고 친절해지고 아량이 커지고 그릇이 커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기도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세상입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나를 비우는 시간입니다. 내 동기, 욕심, 상처, 기준, 도덕적 잣대, 내가 되고 싶어 하는 고상한 도덕적 수준 등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로 나아가 염려까지도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생각나지 않던 것이 생각나면서 복잡해집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눈을 감고, 예배드리기 위해서 앉아있으면 안 나던 생각과 걱정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황폐해져서 그렇습니다. 생각이 나면 올려두십시오. 욕심, 동기, 상처, 기준을 다 내려놓고 오직 이 시간은 하나님만 바라봐야겠다고 결단하십시오. 어떤 목사님께서 전신에 문신을 한 조폭을 사역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조폭이라도 계급이 높아야 전신에 문신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 만나신 전신에 문신을 한 조폭은 20살도 안되었을 때 까만 자동차를 타고 대장처럼 다녔습니다. 그런데 군대에 가서는 하루 종일 명령대로 훈련을 받아야 하니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훈련을 하는 이유는 기준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오면 새로운 기준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그 전에 가졌던 잣대가 기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고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 들어가는 것이 기준입니다. 그래서 예배 속에 들어올 때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15분 전에 찬양을 시작합니다. 드럼을 두드리고 찬양팀이 함께 찬양하는 이유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치유, 회복이 일어납니다.
두 번째로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내 중심에 박히고 내 언약이 되도록 하는 것이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야 꺼져가는 등불, 상한 갈대가 아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꺼져가는 등불과 상한 갈대는 도저히 빛과 소금과는 연결될 수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자꾸만 내가 가치 있고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울을 보면서 위로합니다. 아무리 성형을 하고 좋은 몸매를 가져도 영혼 속에 각인된 것 때문에 저주와 재앙이 오는 것입니다. 지역, 정치, 세상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성도의 영혼은 온 우주의 중심이신 하나님과 연결된 존재입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중남미 선교 중에 계십니다. 소중한 영혼, 기도하는 영혼, 하나님과 연결된 영혼이 그 곳에 갔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에 각인된 영혼이 내일 현장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고 말씀을 내 영혼에 각인시키는 이 시간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생기면 이해되고, 납득이 되고, 공감이 갑니다. 믿음이 생기고 신앙이 자라야 보여지고, 알게 되고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내 머리와 상처 난 마음으로는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믿음이 없으면 이해가 안 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데 화려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분이 내 안에 계십니다. 내일 내가 가는 곳에도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명품가방 가진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가 성도입니다. 그 영혼이 내일 직장, 가정, 현장에 가기에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통로가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믿음이 성장되지 않으면 신앙이 성장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안에 믿음의 자리, 신앙의 자리 확보하시고 내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어졌는지 확인하시고 복음과 믿음위에 서서 순종하는 응답의 축복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년 2월 3일 주일 2부 예배 노동휘 목사
성도의 성장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사42:1-4)
서론: 성도인 우리의 고민이 불신자와 별반 차이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신앙고백을 했는데도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힘든 순간도 있습니다. 가장 큰 고민은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직분은 받았는데도 믿음의 성장이 되지 않는다면 이중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신앙생활의 출발점을 점검하라
(1)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1) 신앙생활의 목적은 착하고 도덕적이며 고상하게 사는 것이 아님
2)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 복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어야 함
(2) 나 자신에 대한 발견이 있어야 합니다.
1) 전적 무능(창세기 3장 문제)
2) 우리는 본래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같은 존재임
3)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빛과 소금으로 부르셨음
2. 은혜로만 갈 수 있는 구원의 자리
(1) 구원 역시 우리의 수준과 기준(출발, 목표)이 아닙니다.
1) 내 기준에서 출발한다면 내 수준대로 하게 됨 (예배, 헌금, 기도 등)
2) 출발과 목표를 우리 스스로가 정한다면 성장과 응답은 없음
(2) 하나님께선 무조건적으로 선택, 구원하신 우리를 궁극적으로 견인하십니다
1) 아브라함(믿음의 조상), 이삭(100배의 축복과 샘의 근원), 이삭(거부(巨富)되게 하심)
2) 우리는 마음의 자리에 믿음과 신앙이 자리 잡도록 해야 함
3. 기도의 필요성
(1) 우리의 영혼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기도가 중요합니다.
1) 우리의 영혼에 담긴 것은 우주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음
2) 우리의 영혼에 잘못된 것이 담기면 저주와 재앙이 임함
(2) 나의 영혼에 복음이 각인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1) 기도하는 시간은 우리의 영혼이 바뀌는 시간임
2)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
(3)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1)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함 (도덕적 기준, 욕심, 동기, 상처를 버려야 함)
2) 우리 속에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으로 채워야 함 (믿을 때 이해되고 공감됨)
결론: 하나님이 함께하는 우리 자신이 바로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 우리의 영혼이 가정과 직장과 현장에 가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한 주간 우리 안에 믿음의 자리, 신앙의 자리를 확인하시고 우리 신앙의 뿌리를 점검하시면 됩니다. 복음과 말씀에 대한 믿음의 순종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성도의 성장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Isaiah42:1~4)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사42:1~4(Isaiah42:1~4)
■ 할렐루야! 영광의 박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옆에 계신 분과 인사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성령 충만 하십시오. 행복하십시오. 어떤 분이 옆에 모른 분 앉아 계시는데 인사하려고 하니 힘들다고 하던데 하나님 앞에 나갈 때 우리가 서로 형제들과 함께 교제하고 나가는 것이 의미 있고 중요한 것입니다. 혹시 압니까? 옆에 사람이 총 들고 있나 칼 들고 있나 모르기 때문에 인사하실 때 꼭 악수를 하십시오. 총 들고 있나 칼 들고 있나 확인하기 위해서.
오늘 제목은 “성도의 성장은 말씀에 대한 순종에서 시작되어진다”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성장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라고 했는데 순종에서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에게 고민이 있다면, 또 현장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고민이 있다면 불신자와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성도인데, 나는 신앙고백 했고, 예수님 내가 영접했는데 별 차이가 없어요. 때로는 더 못할 때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같이 성도라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나 교회 다닌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그런 모습에 처해 있을 때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주일날 교회에 출석해서 예배드리는 것과 헌금 드리는 것 외에는 차이가 없어요. 그런 것들 때문에 고민하게 되고 전도해야 되겠는데, 제대로 살아봐야 되겠는데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말씀대로 살려고 하니까 쉽게 만만하게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고민이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접할 때는 뭔가 대단한 것이 들어온 것 같았는데 세례 받고, 집사가 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갈수록 믿음이 점점 못해져 가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장로님이십니까? 집사님 되셨습니까? 권사님이십니까? 이렇게 말하는데 혼자 집에 가서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때는 부끄럽고 힘들어질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때로는 뒤에 앉아서 남 욕이나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교회에 대해서 아는 게 많아져요. 이런 저런 이야기 하게 되고 그래서 불신앙의 전파자가 되어가지고 복음의 전파자가 되어야 하는데 불신앙의 전파자가 되어서 그 중심에 서 있는 나를 보게 되기도 하고 힘들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중적인 삶을 살게 되어지는데 우리 신앙의 성장의 문제 어떻게 봐야 될 것인가? 오늘 거기에 대한 답을 찾는 그런 시간되어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신앙생활의 출발점을 점검하라.
먼저 첫 번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출발이 어디냐는 것이지요. 교회 나오시는 분들이 희한하게 살다가 이렇게 저렇게 살다가 남들이 볼 때도 흉하게 살고, 또 그렇게 흉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제는 제대로 살아보려고. 그래 나도 이제 착하게 도덕적으로, 고상하게 살아보자고 생각해서 교회에 나와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끌려 나오지만, 또 어떻게 해서 무너져서 나오지만, 내가 이제까지는 완전히 망했는데 새롭게 시작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는데 교회 나오니까 나한테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는데 이해가 안 되는 부분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는 부분들 중에 십계명 중에 살인하지 말라. 그렇지 이것은 이해가 되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계명인지 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도덕적, 윤리적 생각인지 거기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다시 한 번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에서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납득되어 지는 수준은 뭡니까? 그럼 살인해란 말인가? 내가 어릴 때부터 들어왔고, 당연히 사람을 죽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학교에서 배웠고, 부모님한테 배웠고, 당연히 뉴스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 법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고, 당연히 사람을 죽이면 안 되지. 맞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납득이 되어지고, 이해가 되어지고, 또 내가 수용이 되어진다면 출발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말씀이기 때문에 살인하지 말라고 되어 있구나! 살인하면 안 되는 거구나! 성도가 살인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이라서 그렇습니다. 죽이고 싶은 사람이 없습니까? 소리 나지 않는 총만 있다면 지하철에서 내 발 밟는 사람 쏴 죽이고, 직장에서 내 맘에 안 드는 사람 쏴 죽이고, 교회 와 보니까 더 많아 권찰도 집사도 맘에 안 들고, 우리의 기준 가지고는 죽이고 싶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예요. 목사가 되어도 그래요. 그런데 기준이 뭐냐? 말씀이기 때문에 내가 살인하지 않는다는 기준이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출발점이 바뀌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둑질하지마라. 부모에게 공경하라. 이것이 원래 내가 가지고 있던 도덕적인 기준이나 잣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오는구나! 거기에서 시작되어진다는 것이지요.
기독교를 도덕적 수준에서 시작해서 더 깊은 도덕적 경지에 이르려고 하는 목표점을 가지고 시작한다면,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면 빨리 멈추어야 합니다. 물론 도덕을 지키지 마라, 세상에 교통질서나 법규 지키지 마라, 하나님의 백성은 신호등을 지킬 필요 없고, 속도 카메라에서 벗어나니까 지키지 말라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의 출발이 어디냐 라는 것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출발점이 말씀이어야 되고, 복음이어야 되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신앙의 설 자리가 없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녀서 오래 동안 다니고 직분을 받아서 집사가되고, 안수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졌지만, 때로는 훈련을 받아서 목사가 되어지지만 출발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칼빈은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말했습니다. 인간은 불가능하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창세기 3장에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빠지고, 사탄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도 인간은 노예 되고, 포로가 되고, 속국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지요. 인간은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람은 상한 갈대라고 했습니다. 저는 갈대라고 하면 낭만적으로 보입니다. 사진 찍는 장소, 데이트하는 장소로 느껴집니다. 화왕산 가면 갈대인지 억새풀인지 모르겠지만, 쭉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농부들에게는 갈대라는 것은 전혀 쓸데없는 태워 없애야 되는 그런 존재라는 것이지요. 거기에다가 상한 갈대, 꺾어져 버린 갈대는 쓸모도 없고, 볼품도 없는 그런 존재다고 합니다. 상한 갈대. 너는 상한 갈대다. 꺼져가는 등불이라는 것이지요. 등불이 뭡니까? 등불은 기름이 타서 초는 촛농이 녹아서 불을 붙입니다. 그런데 기름이 다 되어지고, 초가 다 되어지면 마지막에 심지가 타지 않습니까? 심지가 탈 때는 그렇다고 불이 꺼지지는 않아요. 그런데 독한 냄새가 나고 빛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타고 있는 것입니다. 불은 불인데 등불은 등불인데 의미 없는 존재, 이유 없는 존재, 쓸데없는 존재. 그것이 꺼져가는 등불이라는 것이지요. 냄새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릴 향해 꺼져가는 등불, 상한 갈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빛으로, 소금으로 불렀다고 하시지요. 빛으로 불렀다는 말입니다. 어디에 말입니까? 우리 집 안방에? 그래도 이야~ 싶을 텐데 세상의 빛으로, 세상의 소금으로 불렀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될 수 없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발견해야 됩니다.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과 세상의 빛, 소금하고는 연결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기를 그래도 나는 괜찮은 존재야. 쓸 만한 존재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해 놓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습니다. 왜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 하셨습니까? 잘록한 허리, 탱탱한 엉덩이를 보면서 하나님이 야! 보기 좋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 같습니까? 진한 눈썹, 오똑한 코를 보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말씀했습니까?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은 그 인간의 몸이 완벽해서도 맞겠지만 그 마음과 생각이 육체를 움직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영혼이 우주를 움직이고 세상을 정복하는 다스리는, 살리는 존재로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했습니다. 이것을 모르니까 화장해놓고 아 그래도 괜찮네. 성형 수술해 놓고. 그래 이만하면 되겠지. 요즘 유행하는 두툼한 입술 만들어 놓고 그래 매력적이야. 이러면서 거울 쳐다보면서 그래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뭐가 괜찮아요? 비싼 옷 사 입고, 명품 옷 사 입고는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것 자랑하러 나가서, 친구 만나러 나가서 괜찮다는 겁니다. 귀걸이 하나, 목걸이 하나 걸고, 반지 하나 꼽아서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어디 가서 앉을 자리하나 만들어 놓고 있으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자~ 이제 괜찮은 존재가 되었으니까 좀 더 도덕적으로 거룩하게 살아보자고 시작했다면 틀렸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로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의 실존이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끊임없이 나는 괜찮은 존재야. 쓸 만한 존재야. 교회 와서 그래도 내가 집사가 되고, 뭐가 되고 하니까 그래도 그렇지, 내가 괜찮으니까 되었잖아! 그게 아니라니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버렸고 말씀을 듣기 보다는 세상의 우선순위에 더 빠져있고 우리는 더 악한 것에 귀를 더 빨리 기울이고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더라도 행복하게 끝나는 영화와 슬프고 악하게 끝나는 영화. 어느 것이 더 좋은 것 같습니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화는 아! 감동적이야 하면 끝입니다. 그런데 막 잔인하고 파괴하고 죽이는 영화는 또 보고 또 보고 나쁜 소문이 더 빨리 퍼집니다. 연예인 어떻게 되었지? 막 찾아봅니다. 그 찾아보고 검색하는 기사들은 안 되었고, 잘못되었고, 파괴되었고, 무너져 있는 기사들을 검색하지 잘 되어있는 기사는 검색하지 않아요. 우리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십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출발점이 조금 더 깊은 도덕적 경지에 이르려고 시작하고 있다면 신앙이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가? 교회에 왔는데 예수님 영접했는데, 신앙고백하고 있는데. 매일, 매주 하는데 신앙이 설 자리가 없어요. 내가 괜찮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신앙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성취할 만한 기준 속에서, 내가 성취할 수 있을 만한 그런 기준과 그런 목표를 세워놓고 쫓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출발부터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래도 어느 어느 회사 다니는데, 어디 어디 있는데. 어느 만큼의 부를 유지하고 있고, 어느 아파트에 살고 있고, 어떤 차를 몰고 다니고, 나는 괜찮아요. 차를 타고 핸들을 잡으면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세상은 살만한 것 같아. 이러고 있다면 신앙이 들어갈 자리가 없고 믿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릴 향해서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출발점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무능과 우리의 완전한 멸망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의 전적 무능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찾았고 사람을 보면서 찾아낸 것이지요.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출발점을 바로 점검해야 될 것입니다.
2. 은혜로만 갈 수 있는 구원의 자리
두 번째입니다. 은혜로만 갈 수 있는 구원의 자리라는 것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가 너무 나약하고, 너무 무능하고 완전히 불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에 우리는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의 자리에 이를 수가 없구나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면 안 되는구나 하는 사실이 발견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했다고 생각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겠지요. 내가 잠깐 곁길을 갔는거야, 내가 잠깐 외도 했는 것이고 내가 잠깐 실수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과 협상을 합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까지 해 드리겠습니다. 여기 까지 할 수 있습니다. 출발 자체가 내가 할 수 있는 기준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목표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정해 놓는 것이지요. 주일 예배는 내가 참석해 드리겠습니다. 헌금도 내가 하겠습니다. 그런데 수요예배는 너무 힘듭니다. 한 달에 한번만 하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설정해 놓는 것이지요. 십일조? 세금도 힘든데, 십일조 너무 힘듭니다. 선교헌금, 그것은 목사님들, 선교사님들이 하는 것이지. 나름의 기준과 잣대를 가지고 더 이상 요구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선포하고 있는 것이지요. 내 마음의 잣대를 짝 그어놓은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성장하지 않고 믿음이라는 것이 성장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내게서 출발되어졌기 때문에 나는 쓸 만한 존재이고, 내가 세워둔 고상한 삶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기 때문에 조금 더 내가 만들어 놓은 그런 삶의 영역을 향해서 쫓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구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내가 목표를 세우고, 내가 기준을 정합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내 중심적으로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출발과 목표를 내가 정해놓고 있는 동안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빛으로, 소금으로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그 상태 자체가 바뀌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멋있는 차를 타고, 집이 있고, 직장을 가지고 있고, 옷을 입고,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하고, 성형을 해도 나는 여전히 상한 갈대이고 꺼져가는 등불 인 것입니다. 끊임없이 악한 기사를 더 많이 검색하고 있을 것이고 내 속에는 여전히 악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고, 내가 조금 더 고상한 척 하고 있지만 내 안에서는 여전히 허망한 것을 향해 쫓아가고, 방향을 잃어버리고 우울해져있고, 내가 왜 존재하는지 모르고 헛되고, 허망한 일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도 헛되고 허망한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가도 헛되고 허망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허망한 자리에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 선택하셨습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어쩌다가 교회에 와서 내가 진짜 훈련 받고 힘들어 죽겠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선택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불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망도 못갑니다. 아이고, 내 안에 있는 예수님 좀 빼내어 주십시오. 옛날에는 술도 먹고, 화투도 치고 열심히 잘했는데, 그때는 술 맛도 맛있었고, 노름도 하면 잘 나갔는데 사람인데 예수님 영접하고 나니까 이제는 안 됩니다. 좀 빼내 주십시오. 하지만 빼지도 못합니다. 뺄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이제 안 된 것이지요. 무조건 선택하셨고, 궁극적으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까지 끌고 가십니다. 빨리 순종하고 믿음의 자리로 가면 멋있는 믿음의 삶을, 멋있는 신앙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놓치고 끊임없이 나를 괜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끊임없이 나를 멋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내 속에 신앙의 자리는 없어지고, 믿음의 자리는 없어지고 끊임없이 갈등과 어려움과 끌려 다니는 삶을 계속 사는 것입니다.
교회 훈련만 안 받고 예배만 안 드리면 되는 줄 아십니까? 나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왜 이런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하는 것이 끊임없이 내뱉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원래 꿈이 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포부가 크고, 스케일이 크고, 대단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 하나 원했는 사람입니다. 아들이 없으니까 아들 하나 낳아서 오순도순 사는 것 이것이 꿈이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냈어요.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했습니다.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너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을 것이다. 말은 좋은데요. 나는 그런 것 싫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선택해 버렸어요. 하나님이 그를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가 불순종의 시간도 있었고, 염려의 시간도 있었고, 그래서 애굽으로 내려가기도 하고 조카 롯을 끌고 다니기도 하고, 여러 가지 모습을 가졌지만 결국 그는 하나님이 그를 의로 여기시고 하나님이 끊임없이 언약을 확인시키시고, 성취시키시는 믿음의 조상의 자리고 끌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내 안에 믿음의 자리가, 믿음의 성장이 시작되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우리는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삭은 그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 이삭은 백배의 축복과 샘의 근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저는 어떤 분을 만나서 이야기할 때마다 자기 것을 못 버리는 이유가 뭐냐 하면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너무 구질구질하다는 것이지요. 나는 저렇게 살기 싫기 때문에 내 것을 놓치면 저렇게 될 것 같아서 나는 절대로 내 것을 못 놓겠다는 것이지요. 이삭은 한해 농사를 지으면 백년을 먹을 농사를 지었습니다. 지금 유럽은 식량 작업량이 200%가 됩니다. 한해 농사를 지으면 그 다음해에 농사를 안지어도 될 만큼. 그런데 그 이삭은 백배의 축복을 받았어요. 샘의 근원의 축복을 받았어요. 그 이삭이 파 놓은 우물을 옆에 왕들이 와서 빼앗아 가버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어떻게 했습니까? 화친을 맺자. 두려운 겁니다. 좀 싸워야 되는데 우물을 빼앗아 가려고 하면 싸우고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이삭은 그러지 않고 그냥 줘버리고 또 파요. 샘의 근원을 얻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무섭잖아요. 이 사람 보면. 그런 사람이 성도입니다. 성도는 온 우주 만물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의 존재와 연결된 것이 성도입니다. 그것을 알고, 그것을 바라보고, 그 믿음을 가지기 시작할 때 성도는 신앙이 성장하게 되어 있고, 믿음이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기준에 맞추어서 헌금은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 헌신도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 훈련도 여기까지입니다 하나님. 합숙 받으면 너무 좋은데 더 이상 받으면 큰일 날것 같아. 내가 미친 듯이 하나님 믿을 것 같아, 너무 좋은데 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래서 합숙 이상 받으면 안 돼.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축복과 그 응답의 자리가 무엇인지 발견해 갈수록 내 믿음의 자리에 다른 것을 갖다 놓고, 도덕을 갖다놓고, 동기를 갖다 놓고, 내 욕심을 갖다놓고, 내 상처를 갖다놓고 그것을 성장시킬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자리에 믿음이 자랄 수 있도록, 신앙이 자랄 수 있도록 우리가 나가야 되겠습니다.
3. 기도의 필요성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기도의 필요성들이 발견되어 지는 것이지요.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영혼은 온 우주에 영향을 주는 존재입니다. 영혼이 얼마나 중요한가? 영혼에 잘못된 것이 각인되면 재앙과 저주가 옵니다. 영혼에 엉뚱한 것이 각인되면 쓰나미, IMF 등의 저주와 재앙으로 세상이 망하게 됩니다. 르네상스는 인간이 모든 것이라는 중심을 가지고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없으면 잘될 줄 알았는데 세계대전이라는 큰 전쟁이 두 차례나 터졌습니다. 인간의 영혼에 허망한 것과 저주가 각인되면 재앙이 옵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과 말씀이 각인되면 축복이 오는 것입니다. 요셉 한 사람 때문에 보디발의 집과 그 밭의 소유까지 축복을 입은 것처럼, 내가 은혜를 입으면 내가 있는 직장에 서류 한 장까지 축복을 입게 됩니다. 다니엘도 그랬습니다.
왜 기도해야 합니까? 우리의 영혼이 바뀌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꺼져가는 등불, 상한 갈대와 같이 전혀 불가능한 존재인데 하나님이 부르시니 세상의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조금 더 참고, 일찍 일어나고, 일찍 출근해서 부지런해지고 친절해지고 아량이 커지고 그릇이 커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과 기도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세상입니다.
기도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나를 비우는 시간입니다. 내 동기, 욕심, 상처, 기준, 도덕적 잣대, 내가 되고 싶어 하는 고상한 도덕적 수준 등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로 나아가 염려까지도 다 내려놓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생각나지 않던 것이 생각나면서 복잡해집니다.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눈을 감고, 예배드리기 위해서 앉아있으면 안 나던 생각과 걱정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의 영혼이 황폐해져서 그렇습니다. 생각이 나면 올려두십시오. 욕심, 동기, 상처, 기준을 다 내려놓고 오직 이 시간은 하나님만 바라봐야겠다고 결단하십시오. 어떤 목사님께서 전신에 문신을 한 조폭을 사역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조폭이라도 계급이 높아야 전신에 문신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 만나신 전신에 문신을 한 조폭은 20살도 안되었을 때 까만 자동차를 타고 대장처럼 다녔습니다. 그런데 군대에 가서는 하루 종일 명령대로 훈련을 받아야 하니 아무 것도 아닌 인간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군대에서 훈련을 하는 이유는 기준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오면 새로운 기준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그 전에 가졌던 잣대가 기준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고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말씀 속에 들어가는 것이 기준입니다. 그래서 예배 속에 들어올 때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15분 전에 찬양을 시작합니다. 드럼을 두드리고 찬양팀이 함께 찬양하는 이유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집중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치유, 회복이 일어납니다.
두 번째로 기도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내 중심에 박히고 내 언약이 되도록 하는 것이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야 꺼져가는 등불, 상한 갈대가 아닌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꺼져가는 등불과 상한 갈대는 도저히 빛과 소금과는 연결될 수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자꾸만 내가 가치 있고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울을 보면서 위로합니다. 아무리 성형을 하고 좋은 몸매를 가져도 영혼 속에 각인된 것 때문에 저주와 재앙이 오는 것입니다. 지역, 정치, 세상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성도의 영혼은 온 우주의 중심이신 하나님과 연결된 존재입니다. 담임목사님께서 중남미 선교 중에 계십니다. 소중한 영혼, 기도하는 영혼, 하나님과 연결된 영혼이 그 곳에 갔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에 각인된 영혼이 내일 현장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고 말씀을 내 영혼에 각인시키는 이 시간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생기면 이해되고, 납득이 되고, 공감이 갑니다. 믿음이 생기고 신앙이 자라야 보여지고, 알게 되고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내 머리와 상처 난 마음으로는 이해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믿음이 없으면 이해가 안 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데 화려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분이 내 안에 계십니다. 내일 내가 가는 곳에도 함께 하십니다. 그것이 성도입니다. 명품가방 가진 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자가 성도입니다. 그 영혼이 내일 직장, 가정, 현장에 가기에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통로가 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내 안에 믿음이 성장되지 않으면 신앙이 성장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안에 믿음의 자리, 신앙의 자리 확보하시고 내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어졌는지 확인하시고 복음과 믿음위에 서서 순종하는 응답의 축복 있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3년 2월 3일 주일 2부 예배 노동휘 목사
성도의 성장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사42:1-4)
서론: 성도인 우리의 고민이 불신자와 별반 차이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신앙고백을 했는데도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힘든 순간도 있습니다. 가장 큰 고민은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부분일지도 모릅니다. 직분은 받았는데도 믿음의 성장이 되지 않는다면 이중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신앙생활의 출발점을 점검하라
(1)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1) 신앙생활의 목적은 착하고 도덕적이며 고상하게 사는 것이 아님
2)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말씀, 복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어야 함
(2) 나 자신에 대한 발견이 있어야 합니다.
1) 전적 무능(창세기 3장 문제)
2) 우리는 본래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같은 존재임
3)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빛과 소금으로 부르셨음
2. 은혜로만 갈 수 있는 구원의 자리
(1) 구원 역시 우리의 수준과 기준(출발, 목표)이 아닙니다.
1) 내 기준에서 출발한다면 내 수준대로 하게 됨 (예배, 헌금, 기도 등)
2) 출발과 목표를 우리 스스로가 정한다면 성장과 응답은 없음
(2) 하나님께선 무조건적으로 선택, 구원하신 우리를 궁극적으로 견인하십니다
1) 아브라함(믿음의 조상), 이삭(100배의 축복과 샘의 근원), 이삭(거부(巨富)되게 하심)
2) 우리는 마음의 자리에 믿음과 신앙이 자리 잡도록 해야 함
3. 기도의 필요성
(1) 우리의 영혼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기도가 중요합니다.
1) 우리의 영혼에 담긴 것은 우주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음
2) 우리의 영혼에 잘못된 것이 담기면 저주와 재앙이 임함
(2) 나의 영혼에 복음이 각인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1) 기도하는 시간은 우리의 영혼이 바뀌는 시간임
2)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
(3)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1)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함 (도덕적 기준, 욕심, 동기, 상처를 버려야 함)
2) 우리 속에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으로 채워야 함 (믿을 때 이해되고 공감됨)
결론: 하나님이 함께하는 우리 자신이 바로 성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는 우리의 영혼이 가정과 직장과 현장에 가기에 소중한 것입니다. 한 주간 우리 안에 믿음의 자리, 신앙의 자리를 확인하시고 우리 신앙의 뿌리를 점검하시면 됩니다. 복음과 말씀에 대한 믿음의 순종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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