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부활의 축복(Pak)
2010-04-04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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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 감사합니다. 교회에 늘 감사하고 교회안에 당회장을 비롯한 당회원들과 성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아름다운 찬양으로 주께 영광을 돌려드립니다. 원로 목사의 자리에 있으니 교회 소식을 더 잘 알겠어요. 그래서 요즘 더 힘을 얻게 되고 교회가 평안하게 든든하게 서 가는 것을 보는 동안 저의 건강도 좋아진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강단에 설 때 마다 저희 아내가 신신당부하는 내용이 “설교 짧게 하세요” 라는 것입니다. 짧게 하려고 마음을 다지고 서지만 설 때마다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것이 제 마음대로 안됩니다만 최선을 다해 성령인도를 받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동참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부활절 주일입니다. 부활절 주일에 제목을 「부활의 축복」이라 정하였습니다. 부활도 누려야 할 축복입니다. 축복 중에서 놀라운 은혜의 축복이죠. 만약에 여러분과 제게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없습니다. 또 믿고 바라볼 것도 없어요. 부활이 있기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열 가지 발판 중에 여덟째와 아홉째 발판이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하자면 반드시 죽음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히9:27에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은 반드시 있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 가지 발판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성령인도 받는 자들에게 오는 축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려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도 반드시 여러분과 제가 현실적으로 누려야 할 축복입니다.
저는 죽음에 대해 많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 입장에서는 말하지 않을 수 없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서울에 올라갈 때도 전에 처럼 무덤이 보이지 않아요. 이제 살만한지 무덤이 그렇게 보이지 않더라구요. 늘 죽음을 생각 한 것이 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죽고 싶다고 죽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아프다고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를 부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병났다고 다 죽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이 반드시 죽어야 할 병중에서 목숨이 계속 붙어 있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안 불러 가시는 것입니다. 죽고 싶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수 있는 환경과 사건에 빠져 있어도 죽지 않는 것이 죽음이요, 전혀 그렇지 않은 상황속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도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누리는 것입니다.
죽음이라 할 때, 특별히 제가 복막이 터져서 일주일간 살아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의학적으로 설명이 안되는 문제였습니다. 삼일만 지나도 죽어야 하는데 일주일동안 계속 있었습니다. 복막이 터진 상태에서 고름이 온 배를 채워져서 진단도 되지 않았고 수술하려던 외과의사가 수술 못 하겠다고 도망까지 간 상태였음에도 다시 돌아오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날을 넘기면 반드시 죽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대구에서는 수술이 안되기에 서울에 올라갈 계획도 세웠는데 그 상태로 서울 올라 갔다 할지라도 가던 중에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도망갔던 의사가 다시 돌아와서 수술을 하고 수술 하고 나니 병명을 알지 못했는데 복막염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배 안이 완전히 고름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빨래를 를 해서 내장을 세척하고 뱃 속으로 다시 집어 넣었는데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도저히 의학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일입니다만 내가 죽고 싶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환경이 어렵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니고 병이 들었다고 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오라 하셔야 (천국)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현실적으로 누리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내 마음대로 죽고 싶다고 죽게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환경과 여건으로 의해, 의학적인 문제로 인해 죽게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야 하나님의 품으로 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 땅에서 누리는 것이 죽음이라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여러분과 저는 한번은 꼭 죽어야 합니다.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어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감사한 것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일찍이 죽는다 , 늦게 죽는다, 오래 산다” 는 것이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비해서는 너무나 순간적인 문제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일찍 죽는다고 좋은 것도 또 않좋은 것도 아닙니다. 오래 산다고 해서 좋은 것도 또 안좋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섭리를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고통 중에서 백년 살고 이백년 사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백년, 칠백년, 천년가까이 살던 평균 수명(생명)을 지금은 팔십년에서 구십년으로 줄여 주셨어요. 다시 좋은 공기나 은혜 속에 백십년 동안 살았다는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축복이다면서 말하고 있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현재 인간의 평균 수명을 팔십년에서 구십년으로 하나님께서 줄여놓은 것이 큰 축복입니다. 생각해보세요. 건강해도 오래 사는 것이 고생입니다. 야곱이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고백한 것처럼 아무리 건강하게 살아도 이 땅에의 삶은 수고와 고통 뿐입니다. 그러나 이 수고와 고통을 마친 후에, 아니 지금 이 순간이라도 내게 죽음이 찾아온 순간, 우리에게는 놀라운 축복의 부활의 문이 열립니다. 이것이 축복 중의 축복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는 것은 아주 무서운 고통 중의 고통입니다.

제가 요즘 국가의 문제를 보면서 UDT의 영웅이요 군인중의 군인이라 했던 한주호 준위가(사병으로써는 최고의 계급) 봉급도 사병으로써 받는 봉급보다 소령이상의 봉급을 받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죽은 후 영웅적인 죽음이라 해서 훈장도 추사하고 여러 가지 장례예식에 해군장으로 진행했습니다. 그것을 보며 무엇을 느끼느냐 하면 아무리 이 땅에서 사람이 명예스런 죽음이 있어도 부활이 없다면 축복이 아닙니다. 그 죽음은 영원한 멸망이요 저주입니다. 제가 그 장례식을 보니 불교식으로 장례를 치르더라고요. 그렇다면 불교인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죽음을 행복으로 누릴 수 있는, 생명의 부활로 그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기독교인의 죽음은 아니더라고요.
그렇다면 여러분, 죽었다 하는 것은 바로 성도들에게는 부활의 축복으로 바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부활의 축복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것이 영원한 사망의 불행으로 연결되어있습니다. 이것만큼 불행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열 가지 신앙발판 중 여덟까지 발판은 죽음이요, 아홉 번째 발판은 죽음과 함께 부활의 생명으로 다시 축복받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영광입니다. 이 축복을 아는 것 뿐 아니라 실제로 살아서 누리는 것이 부활의 행복입니다. 부활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또 모든 어려움들이 여기에서 다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죽어도 괜찮고 내일 죽어도 괜찮은 것입니다. 20년 후에 죽어도 괜찮습니다. 아니 바로 죽어도 괜찮습니다. 어떤 죽음도 괜찮습니다. 열차에서 부딪혀 죽든지, 교통사로고 죽든지, 떨어져 죽든지, 바닷속에서 죽든지, 맹수에게 물려가서 죽든지 어떤 죽음이든지간에 하나님 앞에서 죽는 죽음은 행복이며 축복입니다. 전혀 우리로써는 게의치 않습니다.바로 부활의 축복이 따라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찍 죽는다 늦게 죽는다 상관없이 오히려 일찍 죽는 것이 더 행복이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아침에 저희 집사람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은퇴할 때 곧 죽을 것 같더냐?” 물으니 하는 대답히 “죽겠다는 생각은 안들더라” 하더라고요. 그리고 그때에 요즘 죽고나면 보람상조 등 보험을 넣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보험에 가입하려다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인고 했더니 죽지 않을 이기에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상조에 가입해도 또, 가입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그때 죽어도 상관없고 더 오래 살아도 상관없습니다. 류광수 목사님은 20년 후면 반드시 제가 하나님 품에 안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생각에는 20년 후든 30년 후든 상관없어요. 지금 제 나이가 70이 다 되어가는데 20년 후면 90세입니다. 정년이 75세이니까 75세 이전에는 천국에 가야 하지 않겠나 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더라도 병들어 시들시들하기 보다는 갑자기 하나님 품에 안겼으면 하는 것이 저의 기도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일찍 죽으나 늦게 죽으나 상관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살아가면서 암으로 죽으나 또는 어떤 불의한 일로 죽으나 상관없습니다. 일찍 죽는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겁내지 마세요.
우리 교회 내에 암 환자들이 많습니다. 근심 중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근심 다 버리세요. 그것도 축복입니다. 누리세요. 주님 앞에 일찍 불려가면 갈수록 그것이 더 행복입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제 마음에 이런 확신이 생긴 이후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 것이 큰 축복이었고 행복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한창 신종풀루로 인해 고민할 때 제 마음에는 신종풀루가 와도 괜찮다며 행복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손 발을 씻는다 난리였지만 저는 손발을 씻기는 씻었습니다만 그것도 귀찮을 때는 씻지 않을 때도 있었습니다. 신종풀루 때문에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겁이 나지 않았습니다. 왜? 지금 죽어도 나는 하나님 앞에 부활의 생명으로 설 것이니까요. 그러니 거기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은 죽음의 근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일과 사건에 대해 담대해 집니다.
그래서 사람이 여유가 생긴다 할 때, 죽음 앞에 생기는 여유만큼 큰 여유는 없습니다. 저는 수술대에 몇 번씩 올랐습니다. 그려면서도 오히려 수술하는 사람들이 염려스럽게 나를 보았지 저는 두려움이 없으니 여유가 생겨요. 수술실에 들어갈 때 의사나 간호사가 저를 보는 걱정스런 얼굴을 향해 저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저는 오늘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상관없습니다”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의 여유가 정말 여유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생명 앞에 선 여유만큼 큰 여유는 없습니다. 거기에 모든 우리내 삶의 여유가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판단과 모든 지혜가 여유 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의 부활이 왜 그렇게 축복이냐? 여러분, 인간사회를 살아가면서 특별히 삶과 개인적으로 힘을 얻는다 합니다만, 개인적으로 힘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아무리 힘을 얻어도 이 땅에서 얻는 힘은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생명의 부활로 얻는, 영원한 생명을 통해 얻는 힘은 완벽합니다. 이것은 이 땅에 잠깐 힘 얻다가 사라지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완벽한 힘입니다. 제가 건강을 되찾는다 해도 이것 또한 불안정한 것입니다. 언제 또 앞아 누울지 모르는 것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부활은 영원한 생명 곧 완전한 생명입니다. 이것은 가다가 아픈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니고 힘 빠지는 것도 아니고 날마다 새 힘얻고 날마다 새 생명의 능력으로 인도 받는 역사입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세요. 살다가 다리에 힘만 없어도 힘 빠집니다. 자기도 모르게 우울증이 올 수도 있고 절망감이 찾아 옵니다. 그런데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가며 날마다 새 힘을 얻는 것은 영원한 행복이며 축복입니다. 부활의 축복은 이렇게 날마다 새 힘을 얻는 완전한 축복입니다. 이 사실을 여러분, 이 땅에서조차 말씀한 것처럼 사는 자들에게 이 축복을 영원토록 지금 누리는 것이 생명의 부활입니다. 이 축복을 누리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죠.
오늘 잠깐 새 힘을 얻었다는 그 말이 아닙니다. 영원한 부활의 축복을 누리는 자, 영원한 생명의 힘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이런 저런 위험한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주변에. 우선 제가 몸이 안 좋다 보니까 자동차를 끌고 가면 항상 저의 집사람이 걱정이에요. 무슨 일이 생길까 싶어서 꼭 휴대폰을 가져가라. 뭘 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새 습관이 되어 휴대폰을 꼭 가져갑니다. 그 배경이 뭐냐하면 사람은 언제나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 땅에서 건강한 생명을 가졌다고 할지라도 언제든지 완벽한 생명이 아닙니다.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생명은 완벽합니다. 그런 위험도 필요 없습니다. 그런 것도 느낄 필요 없습니다. 그걸 영원한 부활의 생명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 사실을 누리는 것이 바로 심판입니다. 생명에서 생명으로, 부활의 생명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 여러분과 제가 이 땅에서 누려야 될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생명으로 통해서 또다시 여러분과 제게 오는 것은 완전한 환경입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에 가면 질문도 그런 질문 많이 받았습니다만, 세상의 일을 하늘나라에 가면 알겠습니까? 보겠습니까? 세상의 내 가족을 보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의문도 그런 것입니다. 과연 하늘나라에 가면 이 땅에 고생하고 있는 여러분을 보겠느냐? 그건 이미 답을 했죠.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그랬습니다. 왜? 세상의 모든 일은 꿈에 본듯 잊으리 그랬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이 다 알지만, 하늘나라에 가면 여러분이 보는 그것이 이 땅에 보통 아닙니까? 내 아내가, 내 자녀가 먼저 죽는 사람이 이런 걸 보고 염려하려면 천국 아직 안가는게 좋지.. 이 땅에 함께 있으면서 염려하는 게 낫지.. 그곳까지 가서 이 땅의 여러분을 보고 염려하고 앉았다면 그건 천국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일을 꿈에 본듯 잊으리. 모든 환경이, 모든 여건이 근심과 염려하는 환경과 여건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여러분 모르는게 아닙니다. 아 맞구나! 더 즐거움과 감사와 찬송의 환경이지, 근심과 걱정의 환경이 아닌, 완벽한 환경입니다. 하늘나라!! 진짜 하늘나라 생각한다는 건 생각만 해도 늘 웃어야 되요. 여러분 예배드리려고 와가지고 부활의 생명이 없다고 그러면 예배드리는 얼굴조차도 바뀌어야 됩니다. 왜? 부활의 생명을 가졌다면 얼굴이 환해야 되지, 화면을 통해서 더러 전문인을 비추지 마세요. 왜? 정면으로 비추면 하나같이 죽상이라. 뭔 걱정 근심이 그리 많은지.. 그리고 젊은 사람들은 그래도 덜 한데 늙었다면 늙은것도 문제인데 거기다가 전부 죽을 상을 하고 있으니 이게 더 큰 문제입니다. 얼굴을 환하게 펴세요. 우리가 그런 걱정 근심을 할 필요 없는 하나님의 부활의 생명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이걸 가졌어요. 아니 이걸 앞으로 누릴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는 누리고 있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요. 죽은 자가 누린다고 그러면 살아서 누리는 것이 바로 여러분과 접니다. 이것이 부활의 생명입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생명의 축복에 늘 감사하는 것은 완벽한 환경이라고 그랬는데 이것이 내 것이라고 누릴 때에 여러분 참 감사하죠. 지금 누리는 것이 가장 편하다. 뭔 얘기냐? 황금집이죠. 12보석이 있는 12기둥은 어떻게 표현이 안되죠. 그리고 황금길이라고 그랬죠. 늘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여러분 걷는 길이 아스팔트만해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지금 60년대 여러나라의 환경을 보면서 우리가 그때에 비오면 질척거리면서 살아가던 송현교회 앞의 도로를 생각하면서 그 도로를 시멘트로 깔고 아스팔트로 깔았을 때에 그때 누렸던 그 기쁨 지금도 나는 기억하고 있어요. 그때는 너무 힘들었으니까.. 완전 황토 흙이었거든요. 마누라 없으면 살아도 장화가 없으면 못산다고 할 정도로.. 그 정도로 길이 질척 거렸습니다. 그 길을 아스팔트로 깔고 나니 얼마나 좋던지 그때는 마누라가 필요하다. 왜? 장화가 필요없으니까.. 그렇게 좋았던 그때 그길.
그런데 그보다 백배, 천배 더 좋은 황금 아스팔트. 여러분 생각하면 기가막히게 좋은 환경아닙니까? 그러니까 염려, 걱정, 근심을 할 필요도 없고 필요 조차를 못 느끼는 완벽한 환경입니다. 전세, 사글세, 옥탑방 좋습니다. 여러분 이 부활의 생명 가진자에게는 그게 염려, 걱정, 근심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갈 때 까지 옥탑방 상관없습니다. 좀 불편하다 상관없어요. 장애인, 비장애인 상관없습니다. 장애는 좀 불편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신장 때문에 투석하러 다니지 않습니다. 완벽한 부활의 생명, 축복입니다. 너무 감사하고 감격하는 것이 그나라의 영광입니다. 이 축복의 영광을 지금 누릴 수 있는 것이 부활의 생명입니다.
완벽한 환경,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약에 옥탑방에 있는 사람들이 삶에 대해 불평이 있다면 잠깐 마음을 정리하면서 죽음 이후에 부활의 생명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감사할 뿐입니다. 복음 받았고 복음을 누린다는 그 속에 다 있습니다. 구원이란 말 속에 과거, 현재, 미래 다 있습니다. 그 복음을 누리면 모든 것이 따라옵니다. 10가지 발판. 그 속에 특별히 8번째, 9번째 부활의 축복을 말하면서 죽음과 고통과 어려움에 이 땅. 주님의 부르시는 그날 빨라도 좋고 늦어도 좋고, 잘 살아도 좋고 못 살아도 좋고, 어떤 환경과 사건에도 오직 한가지 나올 수 있는 말은 감사밖에 없습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주님이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지금도 죽음을 누리고 부활을 누릴 수 있는 축복의 구원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영광을 받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서론: 부활도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믿음도 없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1. 죽음도 반드시 현실적으로 누릴 축복입니다.
(1) 죽음이 하나님의 섭리에 속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히9:27).
(2) 하나님 앞에서 죽는 성도의 죽음은 행복이며 축복입니다.
1) 성도의 죽음은 부활의 축복으로 연결되기에
① 어떤 죽음이든 괜찮음
②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 없음
③ 죽음 앞에서도 여유가 생김
2) 불신자는 아무리 명예스럽게 죽었다 할지라도, 부활이 없기에 영원한 멸망이며 저주임

2. 생명의 부활은 축복입니다.
(1) 부활의 생명으로 얻는 힘은 완벽합니다.
1) 세상에서 얻는 힘은 불안정함
2) 부활의 생명을 통해 날마다 완벽한 새 힘을 얻게 됨
(2) 부활의 생명을 통해 완전한 환경이 주어집니다.
1) 천국에서는 세상의 모든 일은 꿈에 본 듯 잊게 됨
2) 천국에서는 근심과 걱정을 할 수 없는 완벽한 환경임

3. 부활의 생명을 지금 누려라.
(1) (부활 이후 주어질) 완벽한 환경 때문에 감사가 나오게 됩니다.
(2) 그 부활의 생명과 축복을 지금, 그리고 날마다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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