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신)
2008-09-21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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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렐루야! 인사하겠습니다. 평안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것이 있다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초대교회가 어마 어마한 유대종교와 바리새 사상과 그 막강한 헬라 철학과 또, 로마의 힘을 무너트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그 분이 부활하셨다’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초대교회가 세계를 정복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는다 할 때, 그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내 속에 역사하시는 것을 믿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와 더불어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도 하나님이 이 자리에 역사하심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 한날, 우리가 여기서 예배드리고 있지만, 지금 저와 여러분의 중심 속에 또 이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믿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사실에 대해서 설교도 듣고 이야기도 나눕니다만, 본문의 말씀처럼 예수님이 곁에 서 계심에도 불구하고 서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이것이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묵상 중에 해 보았습니다. 전혀 부활과 상관없는,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이 교회에 역사하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며, 또 안 해도 될 일들을 열심히 함에도 불구하고 응답 못 누리는 부분들을 겪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과 또한 도마가 나옵니다. 하나같이 부활을 놓고 믿지 않은 사건들을 보여줍니다. 1절 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그리고 8절에도 보시면, 베드로와 제자들이 믿지 않은 사실을 보게 되지요.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보고 믿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부활하신 것을 믿은 것이 아니라 “역시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맞구나!” 하며 부활을 믿지 않았던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은 것입니다. 살아계시는 동안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빈 무덤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14절과 15절에 보면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께서 서서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고 동산지기인줄 알고 이야기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것입니까? 실제로 교회에 가장 큰 힘이 있다면,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큰 힘이 있다면 부활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안 되었기에 교회가 가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고 성도들이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힘들어지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것인가? 두 가지로 크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 주일의 대한 중요한 의미들을 깨달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안식 후 첫날을 어떻게 체험할 것인가? 두 가지를 가지고 함께 말씀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1절에 “안식 후 첫날”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절에도 “안식 후 첫날” 로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주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보면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단체를 볼 수 있습니다. “왜 성경에서 유월절과 안식일을 지키라 하는데, 왜 교회 다니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 또, “지금, 기독교에서 지키는 일요일은 로마 태양숭배의 날이 아닌가? 그것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에 결과적으로 또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안식교와 하나님의 교회라는 안산홍 증인회로써 안식일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안식일과 주일을 구별하지 못해서 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중요한 답들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고, 현장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그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답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중요한 부분들인데 꼭 기억해 놓으시길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구약시대의 구심점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주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구심점으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고 신약시대에는 주일을 지켜왔던 것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안식일과 주일이 전혀 다릅니다. 이름도 다르고 의미하는 뜻도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은 유대인들만 지키는 날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제한적으로 유대인 속에 들어온 이방인과 노예 등의 예외도 있습니다만, 안식일은 유대인만 지키는 날입니다. 주일은 세계 모든 사람 어느 누구나 다 지키는 날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구약시대에 태어났다면 안식일을 지킬 수 있을까요? 지킬 수 없을까요? 지킬 수 없습니다.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유대인만 지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은, 분명히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지켰던 안식일과 지금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일을 하시고 그에 유대인들과 충돌하셨고 “안식일의 주인이 나다”라고 정면으로 대치하는 부분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도 안식일을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광복절은 우리나라의 광복절입니다. 그러나 이 광복절이 일본사람들에게는 모욕스러운 날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기쁜 해방의 날이지만, 일본사람에게는 모욕스런 날이 광복절입니다. 마치 그와 같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에게 주일은 수치스러운 날이고 모욕적인 날입니다. 자기들이 죽인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바로 주일이기에 그 주일이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에게는 모욕과 수치스런 날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일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주일 자체가 축복이지만,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일을 지키게 된 역사적인 배경들을 보시면, 처음 초대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과 주일을 지키는 기독교인들이 서로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핍박했는지 모릅니다. 성경에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그 사울이 무엇하러 다메섹 도상에 올라갔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도장 받아 올라간 것 아닙니까? 그리고 스데반이 유대인들에 의해 돌 맞아 죽었습니다. 예수님까지도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사건들을 보게 됩니다. 초기에 서로 공존하며 살았지만, 안식일을 믿는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핍박한 사실들을 보게 되어집니다.
특별히 처음부터 주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일” 이라는 단어 대신에 “안식 후 첫날에”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모일 때 마다 “안식 후 첫날” 이라고 하다가 이들이 모여서 다른 이름을 찾자고 의논 중에 “우리가 예수 때문에 산 것이 아니냐?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예수님을 기념하고 중심으로 해서 만든 것이 결과적으로 주님의 날, 주의 날 이라는 뜻의 주일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1:10에 보면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유배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로 받게 되는데, 그 말씀을 받은 날이 주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알 수 있느냐? 계시록이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된 것이 AD 60년 지났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 60년 정도 지난 이후입니다. 그러니까 1세대들 신앙의 유산들이 2세대들로 흘러가는 그 시점 속에서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라고 하나님 말씀 받은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주일이라는 뜻과 단어들이 통용적으로 사용되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과 주일을 지키는 초대 기독교인들은 서로 공존하고 있었지만, 분명히 그 의미와 날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이 주일이고 주일이 안식일이 아니냐?” 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인으로부터 핍박받을 때,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이 사람이 유대인인지 기독교인인지 구분할 때, 두 가지로 구분했는데, 첫 번째로 할례를 통해 구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았다는 뜻으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바울로 말미암아 세워진 제자들은 할례를 행하지 않은 것도 보게 되지만, 할례의 여부로 구분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들이 안식일을 지키냐, 주일을 지키느냐에 따라 구분했습니다.
여러분, 쉬운 것은 무엇을 지키느냐를 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할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남의 바지를 내릴 수도 없고 말이죠. 주일을 지키면 기독교인이고, 안식일일 지키면 유대인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크리스천이 되어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대교에서 본다면 변절자들이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안식일과 주일은 전혀 다릅니다. 안식일은 매주 마지막 토요일입니다. 주말이지요. 주일은 첫 날입니다.
제가 메시지 정리하고 나서 잠자리 들기 전에 옆에 있는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애야 주일이 첫 날이냐 마지막 날이냐?” 했더니 마지막 날이라는 겁니다. 첫날이라고 알려줬는데도 굳이 자기에게는 마지막 날이라 하더라고요.
여러분은 주일이 첫 날입니까? 마지막 날입니까? 안식일은 마지막 날 토요일이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일동안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가 아니라 오늘을 시작으로 한 주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 첫날이냐를 알아야 합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은 로마시대에서 나왔습니다만 안식 후 첫날을 쓰다가 주일이라는 개념을 쓰기시작 했는데, 왜 주일이 첫날이냐? 주일을 모델로 월요일도 화요일도 그렇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월요일도 또 화요일도 주일인 것입니다. 그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주의 날에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날에 말씀을 받고 그 말씀 붙잡고 한 주간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지요. 마지막 날이 아니라, 왜 첫날이냐? 그 의미는 모든 역사와 날과 시간의 주인이 주님이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날들, 모든 시간들의 주인이 주님이시다 라는 이 고백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첫날로 말이죠. 그 누구도 예외 될 수 없고 인정하며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넷상에서 네티즌들의 글들을 보면 기독교에 대해서 비판을 해놓고 또 “개독교” 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렇든 그렇지 않든 올해가 2008년인데 누구든지 그 역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역사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입니다. 그 영향 속에 모든 인생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역사를 구분 지을 때, B.C.와 A.D.로 구분합니다. 기원전, 기원후라고 하는데 주님 오시기 전(주전)과 주님 오신 후(주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는 “B.C. - Before Christ” 라고 합니다. 주님이 오신 후는 라틴어로 A.D.라고 기록합니다. 이 A.D.는 "Anno Domini(아노 도미니)" 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In the year of our Lord" 라는 뜻으로, “주님의 날들 안에 있는 날” 이라는 뜻입니다. 전혀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2008년도라 하면 주님 안에서 보낸 2008번째 날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를 영어로 “History” 라고 하는데 소유격 His와 이야기라는 Story의 합성어(His + Story)로 그분의 이야기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 주일을 첫날로 지키고 기념하는 것이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고 주님이시며 그리스도 이시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주일날 말씀을 생명처럼 붙잡으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한 주간에 승리할 수 있는 메시지를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 메시지 잡고 한 주간 현장에서 사는 것입니다. 한 주간 실컷 실패하고 와서 “또 이렇게 살았습니다”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날 말씀 붙잡고 새롭게 시작을 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 주간에 오늘 말씀 붙잡고 새로운 시작이 있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일이 첫 주 첫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안식일과 주일이 같다고 개념이 정착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분명히 안식일은 안식일이고 주일은 주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이 주일입니다. 그런데 개념이 혼란스럽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부분들이 혼잡스럽게 되었습니까?
여러분 로마시대에 로마가 큰 나라를 이루고 오랜 동안 다스릴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이 정복한 식민지 국가에게 종교적으로 관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 정권에 반대되지 않는 이상 다 허용을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유독 유대교에 대해서만큼은 엄청난 핍박을 가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왜냐? 유대교는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민족성과 민족우월주의 그리고 이방인들을 개로 취급하는 선민사상 때문에 로마가 유대교만은 엄청난 핍박을 가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결국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하는 사건도 그 시점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런 가운데서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가운데 로마가 초기 기독교인들 또한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는 오해로 말미암아 엄청난 핍박을 로마로 부터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에 보면, 모든 종교가 다 로마 권력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힘 있던 유대교조차도 로마의 변방의 종교로 사라지고 모든 종교가 로마의 권력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만큼은, 톱으로 켜고 짐승에게 물려 죽게 하고 단두대에 목을 자르기도 하고 생매장 시키는 등 엄청난 핍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핍박하면 할수록 더 성장하고 부흥했습니다.
여러분, 잘 알지 않습니까? 313년에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 더 나아가서 로마의 국교로 기독교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자, 여기에 사단의 전략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탈무드에 보면 바람정책, 햇볕정책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북한과 10년 동안 햇볕정책을 폈는데 이 단어들이 탈무드에 나오는데 이 악한 사단이 처음에는 바람정책을 통해 핍박과 환란과 고난과 고통을 가하면서 핍박을 했었습니다. 그래도 안 되어지니까 사단이 햇볕정책을 써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로마 제국의 화려한 옷을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를 종교화 시켜 나간 것입니다.
그러자니까 이들이 기념일과 절기를 만들어야 되겠는데, 물건들을 거룩하다고 구분하기도 하고 사도와 성도들로 말미암아 거리가 멀어지게 하고 뿐만 아니라 결국, 성경은 자신들만 보도록 하고 점차 점차 기독교인들이 지키는 주일을 거룩한 기념일로 만들기 위해서 “일요일”을 만든 것입니다. 요일은 로마시대에 나온 것입니다. 주일을 로마제국이 일요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거기다가 자기들이 섬기는 태양숭배의 신을 일요일에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 후에 로마가 태양신을 숭배하며 그것을 종교화시키기 위해 기독교에 덮어 혼잡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요일은 일요일로 하면서 거기에 태양숭배의 날로, 또 내용은 교황청이 거기에 개입해서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지켰던 그 안식일을 끌어 들였습니다. 왜냐? 그 안식을 지킴으로써 지키는 사람이 거룩하고 성스럽다고 만들기 위해 안식일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일은 일요일로 정해놓고 내용은 안식교를 그대로 사람들을 얽매이게 하기 위해서 안식교를 끌어들인 것입니다. 사실 로마 가톨릭이 엄청난 누를 범하게 된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기독교를 종교화 시키려는 작업 속에 주일과 안식일의 개념이 뒤섞여버린 것입니다.
여기에 종교개혁자들이 여기에 반기를 들어 뛰쳐나온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교회들은 로마 가톨릭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천년동안 로마 가톨릭이 지배했기에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날마다 개혁해 나가야 하는 것이며, 그런 시간표 속에 서 있는 것이 한국과 세계교회의 시간표인 것입니다. 무엇을 말씀드리고 싶으냐면, 분명히 안식일과 주일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슬람교도들은 안식일을 지키지만 우리는 부활하신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느냐 주일을 지키느냐? 어느 것을 지키느냐에 구원을 받느냐가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현장에서 누구와 만나든지 “왜 안식일을 안 지키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교회에서는 일요일이 태양 숭배하는 날인데 이 날을 지키느냐?”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첫 날로써 우리 모든 삶의 시간과 역사와 날들의 주인인 주님을 고백하면서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주일의 축복이 온전히 여러분에게 회복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안식 후 첫날 다시 말해 부활하신 날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축복을 체험해야 합니다. 지금도 부활의 축복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오늘도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것인가? 간단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들어왔었습니다만, 저와 여러분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누리는 것이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말은 내용적으로 볼 때는 죄와 사단과 사망의 법에서 해방 받았다는 말입니다만 진짜 중요한 것은 갈라디아서2:20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말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다시 말하면 내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하고 죄와 저주로 말미암아 재앙 받아야 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실상입니다. 물론 구원이라는 것은 죄로 인한 저주와 재앙에서 빠져나오고 사단과 사망에서 해방 받는 것도 맞는 것이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시며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까? 성령의 내주, 인도, 역사하심으로 함께 계십니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내 걸음 걸음 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이 성령의 사람인 것을 알지 못하고 놓쳐버리니까 자꾸 세상 것 바라보고 내 생각과 내 계획 붙잡고 육신 가운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세상의 죽음 가운데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이 정체성을 놓쳐 버리니까 다 묶여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 깨닫는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이 내 모든 곳에 역사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모든 것들을 이루어 가시게 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1:6에 보면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했습니다. 내 안의 성령께서 나를 복음의 완전함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나는 부족하고 연약하다 할지라도 괜찮아요. 때로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낙심할 수 있지만 괜찮아요. 성령께서는 나를 복음의 완전함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빌립보서2:13에도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혀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와 사건 당하면 그 문제와 사건을 통한 메시지만 잡고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복음의 완전한 곳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 사실을 보지 못하니까 문제 속에서 사건 속에서 사단의 속임수와 역사에 걸려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고 누리지 못하는데, 그 이면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남편을 바라보면서, 아내를 바라보면서, 여러분의 자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붙잡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인도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운명을 뛰어 넘도록 하나님의 성령께서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가 우리를 묶지 못하도록, 현실의 문제가 우리를 옭아매지 못하도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염려들이 우리를 옭아매지 못하도록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운명을 뛰어 넘도록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 기도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있습니까? 거기서부터 하나님은 시작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안된다, 이제는 끝났다, 틀렸다” 라고 사단은 그렇게 결론짓지만, 하나님은 그 결론을 가지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일마다 주시는 메시지를 꼭 붙잡으시고 오늘의 메시지를 붙잡길 바랍니다. 잘 안 붙잡혀 질 수도 있으나 또 붙잡고 또 붙잡게 되면 어느 날 응답을 받게 되고 어느 날 힘이 생기게 되고 눈떠보면 성공의 자리, 응답의 자리, 축복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속에 나오는 것이 규모입니다.
그전에는 규모가 안 잡히게 됩니다. 그 규모를 가지면 “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저절로 전도의 문이 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렘넌트들은 기억하세요. 생활의 습관과 생활의 규모는 참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어떤 생활의 습관과 어떤 생활의 규모를 가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육신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적인 생활습관과 규모가 영적인 것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생활의 습관과 규모를 준비해 나간다면 그 속에서 참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실을 보면서 전도의 문들로 사용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신지 알지 못 했더라” 막달라 마리아는 동산지기인줄 알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번주간에 언약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어떤 언약으로 붙잡느냐? “나는 부활의 주님을 체험해야 하겠다, 부활의 주님을 누려야겠다” 이 언약을 붙잡으시고 한 주간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사랑을 감사함을 드립니다. 부활하신 주의 날에 주의 백성들이 나와서 우리의 모든 날들과 우리의 모든 시간과 우리의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주님이신 것을 고백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 감사함을 드립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주일이 주일이 되도록 주님의 날이 되도록 주의 종들을 사용하여 주옵시고, 특별히 날마다 부활의 주님을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현장 속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또,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어지는 귀한 사실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특별히 이번 한 주간 주의 종들 모든 걸음 속에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실을 체험하는 한 주간의 현장들이 되도록 주님이 축복해 주옵소서.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서론: 기독교 신앙에 가장 위대한 것 중 하나가 부활신앙입니다. 초대교회가 어마어마한 유대 종교와 바리새 사상, 막강한 헬라의 철학과 로마의 힘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시고 그 분이 부활하셨다는 메시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예수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내 속에 역사하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지금 역사하신 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그 응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면 교회와 성도는 갈수록 어려워지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1.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기 전에 주일의 중요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1) 안식일과 주일은 전혀 다릅니다.
1) 안식일은 구약 시대 신앙생활의 구심점, 주일은 신약 시대의 구심점이었음
2) 안식일은 유대인들만 지키는 날, 주일은 세계의 어느 누구나 지키는 날임
3)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을 인정하지 않으시며 정면으로 유대인과 대치하셨음(마12:8)
4)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주일이기에 그들에게 주일은 수치스런 날임
(2) 주일을 지킨 역사적 배경과 의미
1)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공존했으며, 유대인들이 주일을 지키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했음
2) 초기에는 ‘안식 후 첫 날’이란 단어를 사용했으나 예수님을 기념해서 ‘주일’이란 단어를 사용함(계1:10)
3)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고, 역사의 주인이 주님임을 고백하며, 한 주의 첫 날이라는 의미 가지고 주일을 지킴
① 안식일은 한 주의 마지막 날이나 주일은 한 주의 첫날임
② 여기에는 주일을 모델로 삼아서 한 주 동안 살라는 의미,
② 모든 날과 시간과 역사의 주인은 주님이시라는 의미(B.C, A.D, History),
③ 주일날 주신 하나님의 말씀 잡고 한 주간을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가 포함돼 있음
(3) 안식일과 주일이 같다는 오해의 유래
1) 유대교와 모든 종교가 로마제국 앞에 무릎 꿇었으나 기독교만큼은 핍박에도 더 성장하고 부흥했음
2) 사탄은 기독교 공인 이후 초기 기독교에 로마의 화려한 옷을 입혀 종교화 시켜나감
① 로마는 ‘주일’을 로마의 태양신 숭배사상이 담긴 ‘일요일’로 바꾸었음
②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 거룩하다는 안식일의 개념을 주일에 도입함
2. 부활의 능력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습니까?
(1)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누리면 됩니다.
1) 구원은 죄와 사단의 손에서 해방 받는 것임
2) 구원의 진짜 중요한 의미는 내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갈2:20)
3)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분으로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
4)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임
(2)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이 내 모든 것에 역사하십니다.
1) 나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으며, 성령께서 나를 복음의 완전한 수준으로 이끌어가심(빌1:6, 2:13)
2) 성령께서 우리가 운명을 뛰어넘도록 역사하고 계시며,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됨
결론: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안 된다, 끝났다는 결론 내렸어도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주일마다 주시는 메시지를 오늘의 메시지로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어느 날 성공과 축복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 때 규모도 잡혀지고 저절로 전도의 문도 열려지게 됩니다. “나는 부활의 주님을 누리고 체험해야 되겠다”는 결단을 내리시고 언약을 붙잡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것이 있다면,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초대교회가 어마 어마한 유대종교와 바리새 사상과 그 막강한 헬라 철학과 또, 로마의 힘을 무너트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이시고 그 분이 부활하셨다’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초대교회가 세계를 정복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믿는다 할 때, 그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내 속에 역사하시는 것을 믿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와 더불어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도 하나님이 이 자리에 역사하심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이 한날, 우리가 여기서 예배드리고 있지만, 지금 저와 여러분의 중심 속에 또 이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심을 믿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사실에 대해서 설교도 듣고 이야기도 나눕니다만, 본문의 말씀처럼 예수님이 곁에 서 계심에도 불구하고 서 계신 줄을 알지 못하는 막달라 마리아처럼, ‘이것이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묵상 중에 해 보았습니다. 전혀 부활과 상관없는,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이 교회에 역사하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며, 또 안 해도 될 일들을 열심히 함에도 불구하고 응답 못 누리는 부분들을 겪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와 제자들과 또한 도마가 나옵니다. 하나같이 부활을 놓고 믿지 않은 사건들을 보여줍니다. 1절 2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그리고 8절에도 보시면, 베드로와 제자들이 믿지 않은 사실을 보게 되지요.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보고 믿는다고 했는데, 여기서 믿는다는 것은 부활하신 것을 믿은 것이 아니라 “역시 막달라 마리아의 말이 맞구나!” 하며 부활을 믿지 않았던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믿은 것입니다. 살아계시는 동안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에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빈 무덤 앞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14절과 15절에 보면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님께서 서서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고 동산지기인줄 알고 이야기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것입니까? 실제로 교회에 가장 큰 힘이 있다면, 저와 여러분에게 있어서 가장 큰 힘이 있다면 부활의 능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안 되었기에 교회가 가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이고 성도들이 신앙생활 하면 할수록 힘들어지는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것인가? 두 가지로 크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 주일의 대한 중요한 의미들을 깨달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안식 후 첫날을 어떻게 체험할 것인가? 두 가지를 가지고 함께 말씀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1절에 “안식 후 첫날”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9절에도 “안식 후 첫날” 로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주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보면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단체를 볼 수 있습니다. “왜 성경에서 유월절과 안식일을 지키라 하는데, 왜 교회 다니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느냐?” 또, “지금, 기독교에서 지키는 일요일은 로마 태양숭배의 날이 아닌가? 그것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기에 결과적으로 또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안식교와 하나님의 교회라는 안산홍 증인회로써 안식일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그들은 안식일과 주일을 구별하지 못해서 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중요한 답들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고, 현장에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 그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답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중요한 부분들인데 꼭 기억해 놓으시길 바랍니다.
분명한 것은, 구약시대의 구심점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신약시대에는 주일이었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구심점으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켰고 신약시대에는 주일을 지켜왔던 것으로 보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안식일과 주일이 전혀 다릅니다. 이름도 다르고 의미하는 뜻도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은 유대인들만 지키는 날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제한적으로 유대인 속에 들어온 이방인과 노예 등의 예외도 있습니다만, 안식일은 유대인만 지키는 날입니다. 주일은 세계 모든 사람 어느 누구나 다 지키는 날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구약시대에 태어났다면 안식일을 지킬 수 있을까요? 지킬 수 없을까요? 지킬 수 없습니다.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은 유대인만 지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은, 분명히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지켰던 안식일과 지금 우리가 지키는 주일은 전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일을 하시고 그에 유대인들과 충돌하셨고 “안식일의 주인이 나다”라고 정면으로 대치하는 부분도 보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도 안식일을 인정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광복절은 우리나라의 광복절입니다. 그러나 이 광복절이 일본사람들에게는 모욕스러운 날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기쁜 해방의 날이지만, 일본사람에게는 모욕스런 날이 광복절입니다. 마치 그와 같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에게 주일은 수치스러운 날이고 모욕적인 날입니다. 자기들이 죽인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바로 주일이기에 그 주일이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에게는 모욕과 수치스런 날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일을 지키는 자들에게는 주일 자체가 축복이지만, 유대인들은 그렇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주일을 지키게 된 역사적인 배경들을 보시면, 처음 초대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과 주일을 지키는 기독교인들이 서로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얼마나 핍박했는지 모릅니다. 성경에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그 사울이 무엇하러 다메섹 도상에 올라갔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도장 받아 올라간 것 아닙니까? 그리고 스데반이 유대인들에 의해 돌 맞아 죽었습니다. 예수님까지도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사건들을 보게 됩니다. 초기에 서로 공존하며 살았지만, 안식일을 믿는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핍박한 사실들을 보게 되어집니다.
특별히 처음부터 주일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주일” 이라는 단어 대신에 “안식 후 첫날에” 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모일 때 마다 “안식 후 첫날” 이라고 하다가 이들이 모여서 다른 이름을 찾자고 의논 중에 “우리가 예수 때문에 산 것이 아니냐? 존재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냐?” 그래서 예수님을 기념하고 중심으로 해서 만든 것이 결과적으로 주님의 날, 주의 날 이라는 뜻의 주일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1:10에 보면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유배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로 받게 되는데, 그 말씀을 받은 날이 주의 날이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알 수 있느냐? 계시록이 사도 요한에 의해 기록된 것이 AD 60년 지났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 60년 정도 지난 이후입니다. 그러니까 1세대들 신앙의 유산들이 2세대들로 흘러가는 그 시점 속에서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이 “주의 날에” 라고 하나님 말씀 받은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초대 기독교 공동체 속에서 주일이라는 뜻과 단어들이 통용적으로 사용되어진 것을 보게 됩니다.
분명한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과 주일을 지키는 초대 기독교인들은 서로 공존하고 있었지만, 분명히 그 의미와 날이 달랐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안식일이 주일이고 주일이 안식일이 아니냐?” 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만 전혀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유대인으로부터 핍박받을 때,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이 사람이 유대인인지 기독교인인지 구분할 때, 두 가지로 구분했는데, 첫 번째로 할례를 통해 구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택함 받았다는 뜻으로 할례를 행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바울로 말미암아 세워진 제자들은 할례를 행하지 않은 것도 보게 되지만, 할례의 여부로 구분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들이 안식일을 지키냐, 주일을 지키느냐에 따라 구분했습니다.
여러분, 쉬운 것은 무엇을 지키느냐를 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닙니까? 할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남의 바지를 내릴 수도 없고 말이죠. 주일을 지키면 기독교인이고, 안식일일 지키면 유대인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서도 크리스천이 되어서 기독교로 개종한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대교에서 본다면 변절자들이죠. 다시 말씀드리지만 안식일과 주일은 전혀 다릅니다. 안식일은 매주 마지막 토요일입니다. 주말이지요. 주일은 첫 날입니다.
제가 메시지 정리하고 나서 잠자리 들기 전에 옆에 있는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애야 주일이 첫 날이냐 마지막 날이냐?” 했더니 마지막 날이라는 겁니다. 첫날이라고 알려줬는데도 굳이 자기에게는 마지막 날이라 하더라고요.
여러분은 주일이 첫 날입니까? 마지막 날입니까? 안식일은 마지막 날 토요일이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일동안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가 아니라 오늘을 시작으로 한 주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왜 첫날이냐를 알아야 합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물론 월, 화, 수, 목, 금, 토요일은 로마시대에서 나왔습니다만 안식 후 첫날을 쓰다가 주일이라는 개념을 쓰기시작 했는데, 왜 주일이 첫날이냐? 주일을 모델로 월요일도 화요일도 그렇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월요일도 또 화요일도 주일인 것입니다. 그것이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주의 날에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날에 말씀을 받고 그 말씀 붙잡고 한 주간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지요. 마지막 날이 아니라, 왜 첫날이냐? 그 의미는 모든 역사와 날과 시간의 주인이 주님이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날들, 모든 시간들의 주인이 주님이시다 라는 이 고백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첫날로 말이죠. 그 누구도 예외 될 수 없고 인정하며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마찬가지입니다.
인터넷상에서 네티즌들의 글들을 보면 기독교에 대해서 비판을 해놓고 또 “개독교” 라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그렇든 그렇지 않든 올해가 2008년인데 누구든지 그 역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역사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입니다. 그 영향 속에 모든 인생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역사를 구분 지을 때, B.C.와 A.D.로 구분합니다. 기원전, 기원후라고 하는데 주님 오시기 전(주전)과 주님 오신 후(주후)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주님 오시기 전에는 “B.C. - Before Christ” 라고 합니다. 주님이 오신 후는 라틴어로 A.D.라고 기록합니다. 이 A.D.는 "Anno Domini(아노 도미니)" 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In the year of our Lord" 라는 뜻으로, “주님의 날들 안에 있는 날” 이라는 뜻입니다. 전혀 관계없는 것이 아니라 2008년도라 하면 주님 안에서 보낸 2008번째 날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를 영어로 “History” 라고 하는데 소유격 His와 이야기라는 Story의 합성어(His + Story)로 그분의 이야기 곧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 주일을 첫날로 지키고 기념하는 것이 그냥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고 주님이시며 그리스도 이시다 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주일날 말씀을 생명처럼 붙잡으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한 주간에 승리할 수 있는 메시지를 주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 메시지 잡고 한 주간 현장에서 사는 것입니다. 한 주간 실컷 실패하고 와서 “또 이렇게 살았습니다”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주일날 말씀 붙잡고 새롭게 시작을 하시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번 주간에 오늘 말씀 붙잡고 새로운 시작이 있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일이 첫 주 첫 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모르게 안식일과 주일이 같다고 개념이 정착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분명히 안식일은 안식일이고 주일은 주입니다. 기독교인들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것이 주일입니다. 그런데 개념이 혼란스럽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이 부분들이 혼잡스럽게 되었습니까?
여러분 로마시대에 로마가 큰 나라를 이루고 오랜 동안 다스릴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들이 정복한 식민지 국가에게 종교적으로 관대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로마 정권에 반대되지 않는 이상 다 허용을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가 유독 유대교에 대해서만큼은 엄청난 핍박을 가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왜냐? 유대교는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민족성과 민족우월주의 그리고 이방인들을 개로 취급하는 선민사상 때문에 로마가 유대교만은 엄청난 핍박을 가한 사실을 보게 됩니다.
결국 로마 군인들이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하는 사건도 그 시점 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런 가운데서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가운데 로마가 초기 기독교인들 또한 똑같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라는 오해로 말미암아 엄청난 핍박을 로마로 부터 받게 됩니다.
그러나 역사에 보면, 모든 종교가 다 로마 권력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힘 있던 유대교조차도 로마의 변방의 종교로 사라지고 모든 종교가 로마의 권력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만큼은, 톱으로 켜고 짐승에게 물려 죽게 하고 단두대에 목을 자르기도 하고 생매장 시키는 등 엄청난 핍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핍박하면 할수록 더 성장하고 부흥했습니다.
여러분, 잘 알지 않습니까? 313년에 콘스탄틴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고 더 나아가서 로마의 국교로 기독교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자, 여기에 사단의 전략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탈무드에 보면 바람정책, 햇볕정책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북한과 10년 동안 햇볕정책을 폈는데 이 단어들이 탈무드에 나오는데 이 악한 사단이 처음에는 바람정책을 통해 핍박과 환란과 고난과 고통을 가하면서 핍박을 했었습니다. 그래도 안 되어지니까 사단이 햇볕정책을 써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로마 제국의 화려한 옷을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를 종교화 시켜 나간 것입니다.
그러자니까 이들이 기념일과 절기를 만들어야 되겠는데, 물건들을 거룩하다고 구분하기도 하고 사도와 성도들로 말미암아 거리가 멀어지게 하고 뿐만 아니라 결국, 성경은 자신들만 보도록 하고 점차 점차 기독교인들이 지키는 주일을 거룩한 기념일로 만들기 위해서 “일요일”을 만든 것입니다. 요일은 로마시대에 나온 것입니다. 주일을 로마제국이 일요일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거기다가 자기들이 섬기는 태양숭배의 신을 일요일에 섬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 후에 로마가 태양신을 숭배하며 그것을 종교화시키기 위해 기독교에 덮어 혼잡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요일은 일요일로 하면서 거기에 태양숭배의 날로, 또 내용은 교황청이 거기에 개입해서 구약시대에 유대인들이 지켰던 그 안식일을 끌어 들였습니다. 왜냐? 그 안식을 지킴으로써 지키는 사람이 거룩하고 성스럽다고 만들기 위해 안식일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일은 일요일로 정해놓고 내용은 안식교를 그대로 사람들을 얽매이게 하기 위해서 안식교를 끌어들인 것입니다. 사실 로마 가톨릭이 엄청난 누를 범하게 된 사건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기독교를 종교화 시키려는 작업 속에 주일과 안식일의 개념이 뒤섞여버린 것입니다.
여기에 종교개혁자들이 여기에 반기를 들어 뛰쳐나온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아직까지 교회들은 로마 가톨릭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천년동안 로마 가톨릭이 지배했기에 벗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날마다 개혁해 나가야 하는 것이며, 그런 시간표 속에 서 있는 것이 한국과 세계교회의 시간표인 것입니다. 무엇을 말씀드리고 싶으냐면, 분명히 안식일과 주일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슬람교도들은 안식일을 지키지만 우리는 부활하신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느냐 주일을 지키느냐? 어느 것을 지키느냐에 구원을 받느냐가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현장에서 누구와 만나든지 “왜 안식일을 안 지키느냐?” 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교회에서는 일요일이 태양 숭배하는 날인데 이 날을 지키느냐?” 라고 말할 수 있지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첫 날로써 우리 모든 삶의 시간과 역사와 날들의 주인인 주님을 고백하면서 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주일의 축복이 온전히 여러분에게 회복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안식 후 첫날 다시 말해 부활하신 날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축복을 체험해야 합니다. 지금도 부활의 축복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오늘도 체험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것인가? 간단합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부활에 대한 메시지를 많이 들어왔었습니다만, 저와 여러분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누리는 것이 부활의 주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말은 내용적으로 볼 때는 죄와 사단과 사망의 법에서 해방 받았다는 말입니다만 진짜 중요한 것은 갈라디아서2:20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말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다시 말하면 내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하고 죄와 저주로 말미암아 재앙 받아야 할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실상입니다. 물론 구원이라는 것은 죄로 인한 저주와 재앙에서 빠져나오고 사단과 사망에서 해방 받는 것도 맞는 것이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입니다. 그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시며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분이 어떻게 우리 가운데 역사하십니까? 성령의 내주, 인도, 역사하심으로 함께 계십니다.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인도하시고 내 걸음 걸음 속에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하시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이 성령의 사람인 것을 알지 못하고 놓쳐버리니까 자꾸 세상 것 바라보고 내 생각과 내 계획 붙잡고 육신 가운에 빠져나오지 못하고 세상의 죽음 가운데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이 이 정체성을 놓쳐 버리니까 다 묶여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누구인가 깨닫는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이 내 모든 곳에 역사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모든 것들을 이루어 가시게 되어 있습니다. 빌립보서1:6에 보면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했습니다. 내 안의 성령께서 나를 복음의 완전함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나는 부족하고 연약하다 할지라도 괜찮아요. 때로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실망하고 낙심할 수 있지만 괜찮아요. 성령께서는 나를 복음의 완전함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빌립보서2:13에도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혀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와 사건 당하면 그 문제와 사건을 통한 메시지만 잡고 있으면 하나님이 나를 복음의 완전한 곳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 사실을 보지 못하니까 문제 속에서 사건 속에서 사단의 속임수와 역사에 걸려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고 누리지 못하는데, 그 이면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남편을 바라보면서, 아내를 바라보면서, 여러분의 자녀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붙잡기 바랍니다. 부활하신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인도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운명을 뛰어 넘도록 하나님의 성령께서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거가 우리를 묶지 못하도록, 현실의 문제가 우리를 옭아매지 못하도록,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래에 대한 염려들이 우리를 옭아매지 못하도록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운명을 뛰어 넘도록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왜냐? 기도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가지고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 있습니까? 거기서부터 하나님은 시작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안된다, 이제는 끝났다, 틀렸다” 라고 사단은 그렇게 결론짓지만, 하나님은 그 결론을 가지고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주일마다 주시는 메시지를 꼭 붙잡으시고 오늘의 메시지를 붙잡길 바랍니다. 잘 안 붙잡혀 질 수도 있으나 또 붙잡고 또 붙잡게 되면 어느 날 응답을 받게 되고 어느 날 힘이 생기게 되고 눈떠보면 성공의 자리, 응답의 자리, 축복의 자리에 서게 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속에 나오는 것이 규모입니다.
그전에는 규모가 안 잡히게 됩니다. 그 규모를 가지면 “아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저절로 전도의 문이 열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렘넌트들은 기억하세요. 생활의 습관과 생활의 규모는 참 중요합니다. 어릴 때부터 어떤 생활의 습관과 어떤 생활의 규모를 가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육신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적인 생활습관과 규모가 영적인 것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어릴 때부터 생활의 습관과 규모를 준비해 나간다면 그 속에서 참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실을 보면서 전도의 문들로 사용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신지 알지 못 했더라” 막달라 마리아는 동산지기인줄 알고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이번주간에 언약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어떤 언약으로 붙잡느냐? “나는 부활의 주님을 체험해야 하겠다, 부활의 주님을 누려야겠다” 이 언약을 붙잡으시고 한 주간 승리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사랑을 감사함을 드립니다. 부활하신 주의 날에 주의 백성들이 나와서 우리의 모든 날들과 우리의 모든 시간과 우리의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을, 주님이신 것을 고백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심 감사함을 드립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주일이 주일이 되도록 주님의 날이 되도록 주의 종들을 사용하여 주옵시고, 특별히 날마다 부활의 주님을 체험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현장 속에서 새롭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고 또,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어지는 귀한 사실을 누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특별히 이번 한 주간 주의 종들 모든 걸음 속에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나와 함께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사실을 체험하는 한 주간의 현장들이 되도록 주님이 축복해 주옵소서.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서론: 기독교 신앙에 가장 위대한 것 중 하나가 부활신앙입니다. 초대교회가 어마어마한 유대 종교와 바리새 사상, 막강한 헬라의 철학과 로마의 힘을 무너뜨릴 수 있었던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시고 그 분이 부활하셨다는 메시지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예수께서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내 속에 역사하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이 부활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지금 역사하신 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그 응답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면 교회와 성도는 갈수록 어려워지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1.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기 전에 주일의 중요한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1) 안식일과 주일은 전혀 다릅니다.
1) 안식일은 구약 시대 신앙생활의 구심점, 주일은 신약 시대의 구심점이었음
2) 안식일은 유대인들만 지키는 날, 주일은 세계의 어느 누구나 지키는 날임
3)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을 인정하지 않으시며 정면으로 유대인과 대치하셨음(마12:8)
4) 유대인들이 죽인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 주일이기에 그들에게 주일은 수치스런 날임
(2) 주일을 지킨 역사적 배경과 의미
1) 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이 공존했으며, 유대인들이 주일을 지키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했음
2) 초기에는 ‘안식 후 첫 날’이란 단어를 사용했으나 예수님을 기념해서 ‘주일’이란 단어를 사용함(계1:10)
3) 부활하신 주님을 기념하고, 역사의 주인이 주님임을 고백하며, 한 주의 첫 날이라는 의미 가지고 주일을 지킴
① 안식일은 한 주의 마지막 날이나 주일은 한 주의 첫날임
② 여기에는 주일을 모델로 삼아서 한 주 동안 살라는 의미,
② 모든 날과 시간과 역사의 주인은 주님이시라는 의미(B.C, A.D, History),
③ 주일날 주신 하나님의 말씀 잡고 한 주간을 새롭게 시작하는 의미가 포함돼 있음
(3) 안식일과 주일이 같다는 오해의 유래
1) 유대교와 모든 종교가 로마제국 앞에 무릎 꿇었으나 기독교만큼은 핍박에도 더 성장하고 부흥했음
2) 사탄은 기독교 공인 이후 초기 기독교에 로마의 화려한 옷을 입혀 종교화 시켜나감
① 로마는 ‘주일’을 로마의 태양신 숭배사상이 담긴 ‘일요일’로 바꾸었음
② 로마 카톨릭 교회는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 거룩하다는 안식일의 개념을 주일에 도입함
2. 부활의 능력을 어떻게 체험할 수 있습니까?
(1)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누리면 됩니다.
1) 구원은 죄와 사단의 손에서 해방 받는 것임
2) 구원의 진짜 중요한 의미는 내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갈2:20)
3)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 분으로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임
4)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고 역사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임
(2)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에 부활하신 주님이 내 모든 것에 역사하십니다.
1) 나는 성령의 사람이 되었으며, 성령께서 나를 복음의 완전한 수준으로 이끌어가심(빌1:6, 2:13)
2) 성령께서 우리가 운명을 뛰어넘도록 역사하고 계시며,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면 됨
결론: 부활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안 된다, 끝났다는 결론 내렸어도 하나님은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주일마다 주시는 메시지를 오늘의 메시지로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어느 날 성공과 축복의 자리에 있게 됩니다. 그 때 규모도 잡혀지고 저절로 전도의 문도 열려지게 됩니다. “나는 부활의 주님을 누리고 체험해야 되겠다”는 결단을 내리시고 언약을 붙잡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번호 | 제목 | 본문 | 설교일 | 첨부파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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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4 | 전환점을 이룬 안디옥 선교 | 행11:19-30 | 2025-04-27 | |
1483 |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메시지 | 고전15:1-11 | 2025-04-20 | |
1482 | 새로운 싸움을 위하여 | 삿7:9-18 | 2025-04-13 | |
1481 | 날마다 영적싸움에 승리하라 | 삿7:1-8 | 2025-04-06 | |
1480 | 이 시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해답 | 삿4:1-10 | 2025-03-30 | |
1479 | 하나님이 쓰시는 기준 | 삿3:12-23 | 2025-03-23 | |
1478 |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 삿3:7-11 | 2025-03-16 | |
1477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 삿2:6-10 | 2025-03-09 | |
1476 | 새로운 축복을 위해 남겨두신 과제 | 삿1:1-7 | 2025-03-02 | |
1475 |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 단12:1-4 | 2025-02-23 | |
1474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용맹을 떨치리라 | 단11:28-39 | 2025-02-16 | |
1473 | 네 말이 들으신 바 되었으므로 | 단10:10-21 | 2025-02-09 | |
1472 |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 단9:20-24 | 2025-02-02 | |
1471 | 육신의 번영과 영원한 형통 | 단8:15-27 | 2025-01-26 | |
1470 |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 | 단7:9-14 | 2025-0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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