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개오야 내려오라
2008-05-11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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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렐루야! 인사하겠습니다. 평강하십시오. 안녕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여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예배할 수 있는 축복과 예배의 귀한 장소와 또, 이 일에 하나님의 은혜로 같이 하심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예배 참석한 저희들과 유용무용으로 주님 앞에 예배드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위에 은혜 입혀 주옵시고 진정과 신령으로 예배드리는 저들의 마음과 생각에 하나님이 마음껏 축복하셔서 주의 뜻이 성취되고 주의 역사가 이뤄지는 은혜의 말씀으로 임하여 주시옵소서. 연약한 종을 붙드시고 주께서 하시는 말씀마다 저들의 마음 판에 새겨지도록 은혜 입혀 주시옵소서. 주님이 홀로 영광을 받아 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오늘, 제목을 「삭개오야 내려오라」라고 했습니다. 이 메시지에 상징적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복음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우리가 높아졌던 교만과 자만심을 다 내려놓고 그곳에서 내려와 겸손히 주님을 맞이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어버이 주일이기에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길 수 있었는데, 저는 솔직히 아버지에 대해서는 큰 기억이 없습니다만, 어머니라 하면 상당히 많은 추억과 교훈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저도 늙어서인지 ‘어머니’ 라는 말을 떠올려 봐도 예전 같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버이 주일에 눈물 없이 찬송을 불러 본적이 없을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음에 소원하는 것이, 어머니께서는 제가 목사가 되길 원하셨고, 제가 학교를 중단하기까지 했던 시기에 “너는 목사가 될 사람인데 학교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 하시면서 아버지 몰래 돈을 구해 와서 저를 도시로 내보내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시던 어머니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오늘날, 많은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다는 축복을 나누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만약 어머니가 아직까지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 살아 계시다면 연세가 100세가 가까울 테고 지금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을 텐데’생각해 봅니다. 조금 지나친 저의 욕심이겠죠.
늘 저의 마음에 하나님이 이렇게 은혜 주셔서 부족하지만 은혜로 여러분과 복음의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또, 그런 의미에서 좋은 예배의 처소를 허락 하신 것이 감사하고요.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하나교회는 보통교회가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혹은 내가 성도로, 혹은 복음의 일꾼으로 예배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야 합니다.
저는 가끔씩 놀라야 할 사건 속에 안 놀라는 강심장이 참 문제라고 봅니다. 지금쯤 벌써 놀라고 놀라야 하는데 안 놀랍니다. 놀라야 할 것에 안 놀랍니다. 꼬집어 주면 약간 입만 벌릴까 놀라는 기색이 없습니다. 정말 놀랄 일입니다.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복음의 일꾼으로 세워짐을 받았느냐? 이 사실에 놀라야 하고 그 놀람 속에는 감사가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평소에도 나도 모르게 감사가 터져 나와야 합니다. 내 모든 것, 오늘 다 내려놓고 나의 존귀했던 자리에서, 겸손하게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는 귀한 시간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다 했습니다. 옛날 번역에는 뽕나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가 키가 작아서 예수님 보기가 힘드니까, 돌무화과나무 위 즉, 뽕나무위에 올라갔습니다. 돌무화과나무라는 표현이 좀 생소할 수 있습니다만 뽕나무를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이런 나무들이 길가에 상당히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란 사람은 어른입니다. 그것도 세리장입니다. 나름대로 관권을 가지고 있는 관료이고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았다 했습니다. 키가 작았다는 것 때문에 생각이나 정신이 삐뚤어져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그곳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에 부끄러움도 체면도 다 팽개치고 한 낮에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삭개오야 내려오라”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이 말씀을 하시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고 마음속에 계획할 수도 없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이 될 뻔했는데 예수님의 “삭개오야 내래오라” 는 말씀에 이 삭개오는 정신없이 뽕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제가 가만히 상상을 해보면 우스울 수 있는 광경입니다. 키 작은 사람이 나무에서 오르고 또 후다닥 내려오는 것이 이 삭개오에게는 여러 사람 앞에서라도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너무 즐거운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눅19:5에 보면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그리고 6절과 7절에 보면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리와 창녀들을 사람취급 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세리는 제일 큰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금을 거둬서 로마에 바쳐야 하는데, 그 세금을 거둬들이는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세웠습니다.
예전에도 일제강점기하에서 경찰들 중에는 일본 사람보다 더 못된 경찰을 세우기 위해 한국 사람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백성들 곧 로마 정치가 이와 비슷하게 정치일원으로 현지인을 세우는 일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세무담당은 현지인을 세웠습니다. 성경에 본 그대로,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내려오라 하셨는데, 삭개오는 세리요 또한 부자라 했습니다. 이 부자란 말 속에 삭개오의 행실이 포함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세금을 거둬들이는 자에게 불의가 따라가는 것을 간혹 봅니다. 물론 정직한 사람도 있지만, 정직하지 못한 사람도 세리 중에 많이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아는 친구 한 사람도 세무 공무원이었는데, 오랜만에 대구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교회 성가대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데, 양심에 찔려서 성가대에 서지를 못하겠다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왜 양심에 찔리냐고 물었더니, “대구에 내려와서 집을 7채 정도 샀는데, 그것이 정직한 세무 공무원 월급만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말을 하더라고요. 그런 양심을 가지고 교회에서 성가대에 앉아도 예배가 안 되더랍니다.
반드시 예수님이 오신 잔치 집에는, 예수님이 찾아오신 사람에게는 어떤 이유와 상관없이 변화는 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변화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면 저주는 끝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면 반드시 죽음과 멸망은 끝입니다. 그때부터 행복은 시작됩니다. 이 축복된 역사가 어떤 사람에게든지 어떤 집이든지 반드시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 모두가 “예배드리는 동안에 예수님 내게 또, 저희 집에 오시옵소서” 이것이 예배드리는 자의 같은 소원이요 이것이 사실로 이뤄지는 순간에 나도 모르게 나와 가정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삭개오 더러 “속히 내려오라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하시는 말씀에 삭개오는 너무 즐거워서 급히 내려 왔습니다. 몸집이 작아서 다람쥐처럼 내려왔지 싶습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말씀처럼 세리는 같은 유대민족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죄인 취급했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눅19:2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했습니다. 조금 전에 설명한 삭개오의 행위입니다.
중요한 것은, 삭개오는 지금까지의 세리 장으로, 죄인으로, 구원과 멀었던 자이었는데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죄인 취급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던 그에게 예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혹시 오늘, 내게도 예수님이 찾아오실 것인가? 찾아오십니다. 같은 유대민족이었지만 상종도 하지 않는 버려진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그 외롭고 허전한 마음에 위로를 주실 뿐 아니라 그 가정에 “구원이 이르렀도다” 엄청난 축복의 역사를 선언하시면서 찾아오셨습니다. 할렐루야!
눅19:8에 보면,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토색한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아둔 재산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다 거짓재산이다 말이죠. 그래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 고백했습니다.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고백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구원서정을 보면 “부르심을 입고 난 이후에 중생하면 회개가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개가 나오면 반드시 믿음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나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고함지른다고 회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할 때, 깨닫게 될 때에 “주님이 내 안에 오셨구나” 하는 순간에 비로소 회개가 나옵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깨달은 것도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후에, 여러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고향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또 다시 나타나셔서 고기를 잡지 못하던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니 주위에 동료들에게 도움을 받을 정도로 수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는 그때, 비로소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깨닫고 고백하는 베드로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정말 복음잡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고백 깨달으셨습니까? 이 고백해보았습니까? 이 고백이 진심으로 고백되어지는 순간에 여러분은 믿음이 생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순간에 내 중심에서부터 복음의 놀라운 감격이 터져 나오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이 죄인에게 찾아오신 것 감사합니다” 그리고 적은 죄악이라도 예수님 앞에 다 내어놓는 순간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순간이 오면 자신을 낙망시키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신 증거입니다. 붙잡고 주님 앞에 감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나 같은 죄인에게도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앉아계신 여러분에게 이미 찾아오셨습니다. 못 깨달았을 뿐입니다. 붙잡고 나가십시오. 성령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눅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또, 눅19:9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할렐루야!
빨리 뽕나무에서 내려와서 가정에 영접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시간표가 되어서 예수를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에게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구원받은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세리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18:17에 보면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유대교에 들어오지 않은 이방인보다 더 악한자로 세리라 표현했습니다.
눅18:11에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 무슨 기도가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토색·불의·간음이라 했는데, 세리들이 세금을 안냈다는 이유로, 이런 갖은 불의를 행하고 심지어는 가난한 과부에게 가서 엄청난 일을 저질렀던 것이 세리입니다. 이방인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도저히 유대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나는 세리로 태어나지 않는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그 세리 즉, 외롭고 소외된 세리를 기억하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키가 작은 세리 삭개오가 속히 뽕나무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상상해보면서 얼마나 감격했겠으며 또, 사람들은 얼마나 핍박을 했겠습니까?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오늘 여러분, 이 음성 듣기를 원합니다. 모든 것 자존심·교만심 다 내려놓고 주님의 음성듣기를 원합니다. “아무개야 내려오너라” 그럴 때 모든 저주와 재앙도 끝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모든 문제의 해결자라는 사실이 믿어집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정과 가문을 통해 내려오던 것이 끝이 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 어버이 주일이라서, 여러분, 진짜 어버이 주일에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 뭡니까? 부모에게 지금까지 없었다면 이 복음의 역사와 축복을 부모님에게 안겨드리는 것 이상 효도가 없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약에 부모가 복음이 없다면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이 없습니다. 그 저주와 그 재앙들이 자녀들에게 계속 내려옵니다. 그것이 대물림 할 수가 있습니다. 그 가난과 그 재난이 계속해서 대대손손 못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오늘 여러분 앞에 와서 “아무개야 내려오너라”하는 그 음성 들으시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이 집에 구원이 임하였도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을지어다” 여러분, 이 말씀 그대로 여러분 한 사람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백성 삼았다면 여러분 가정과 가문에 이 축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 축복과 은혜가 부모님에게 전달되는 순간 대물림하던 모든 가난과 모든 연약이 허물어집니다. 떠나갑니다. 흑암의 역사는 떠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어려웠던 가정, 가문에 하나님의 축복된 역사가 지속될 것입니다. 이 이상 더 효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님 돌아가시면서 예수 그리스도 영접하고 돌아가셨다면 잔치를 해야 합니다. 웃으면서 손뼉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 돌아가신 일에 손뼉 칠 수 없어서 이불 뒤집어쓰고 웃지만, 실제로 이 축복과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진짜 웃고 싶대요. 진짜 춤추고 싶대요. 복음을 알고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영접한 부모를 보는 자식의 심정이 이렇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오직 어버이 주일에 진짜 효의 축복은 바로 구원의 역사가 우리 가정에 임하게 하는 순간부터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오늘도 조용히 아니 오늘밤에도 조용히 이 가정에 구원이 임하였도다. 눅19:9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세리는 절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없는데도 유대교와 달리 예수님은 감히 이 세리 장에게, 그리고 토색하고 욕심내어 범죄한 이 세리 장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선언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죄를 지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할 수밖에 없지만 상관없습니다. 주님은 오셔서 “이 집에 오늘 구원이 임하였도다” 할렐루야. 이 축복과 역사가 이미 이루어진 가정, 또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가정에 오늘 이 말씀 통하여 또 한 번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이 이 집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이 이 가정에, 너와 네 집이 구원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가정의 모든 저주가 끝나는 시간이요 이 가정의 행복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저는 이 삭개오의 가정을 보면서 비난하든 말든 예수 믿었다고 욕하든 말든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세우신 이 가정이 지금부터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하고 기뻐했나, 나는 삭개오를 생각하면서 이 축복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 바로 이 시간 내 마음에 모시고 우리 마음에 모신고 우리 가정에 모셔서 구원이 이 가정에 임하였도다 확실한 어버이 주일의 감격과 축복의 역사가 재현되는 늘 한 기쁨이 있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여, ‘삭개오야 내려오라’ 주께서 말씀하시고 이 축복된 역사 속에 세우신 주의 종들에게 주님의 음성 듣는 기쁨이 있도록 역사해주옵소서. 말씀 전하는 이 말씀이 우리 가정과 가문에 성취되는 기쁨이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서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복음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우리자신을 다 내려놓고, 거기서 내려와서 겸손하게 주님을 맞이하는데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어버이 주일입니다. 늘 저의 마음에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여러분과 복음의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오늘 내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예수님이 찾아오시자 삭개오의 가정에 저주가 끝나고 행복이 시작되었습니다.
1) 관리이고 부자이나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체면도 버리고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2)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 하시고 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가셨습니다.
3) 예수님이 오신 집에 변화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저주 끝, 행복 시작).
①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변화는 될 수밖에 없음
②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저주, 죽음, 멸망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됨
③ ‘저와 저희 집에 오시옵소서’하고 예배드릴 때 나와 가정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됨
4) 유대인들이 죄인 취급하던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듯이 오늘 내게도 찾아오십니다.
① 예수님은 마음에 위로를 주실 뿐 아니라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시며 찾아오심
② 부르심을 입고 중생하면 비로소 회개가 나옴(삭개오의 고백-눅19:8, 베드로의 고백-눅5:8)
5) 자존심, 교만을 모두 내려놓고 예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때 모든 저주와 재앙도 끝나며 하나님의 영광이 계속됩니다.
2. 복음의 역사와 축복을 부모님에게 안겨드리는 것 이상 효도가 없습니다.
1) 부모가 복음이 없다면 저주와 재앙들이 자녀들에게 계속 대물림 됩니다.
2) 한 사람을 선택해서 하나님 백성으로 삼았다면, 그 가정과 가문에도 구원 축복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5, 9절).
3) 어버이 주일에 진짜 효의 축복은 구원의 역사가 우리 가정에 임하게 하는 순간부터입니다.
결론: 예수님이 삭개오의 가정에 오셔서 “이 집에 오늘 구원이 임하였도다” 선언하셨습니다. 이 가정의 모든 저주가 끝나는 시간이요 행복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아 이 축복의 역사가 여러분의 가정에 재현되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제목을 「삭개오야 내려오라」라고 했습니다. 이 메시지에 상징적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복음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우리가 높아졌던 교만과 자만심을 다 내려놓고 그곳에서 내려와 겸손히 주님을 맞이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어버이 주일이기에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기도와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길 수 있었는데, 저는 솔직히 아버지에 대해서는 큰 기억이 없습니다만, 어머니라 하면 상당히 많은 추억과 교훈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저도 늙어서인지 ‘어머니’ 라는 말을 떠올려 봐도 예전 같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저는 어버이 주일에 눈물 없이 찬송을 불러 본적이 없을 정도로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음에 소원하는 것이, 어머니께서는 제가 목사가 되길 원하셨고, 제가 학교를 중단하기까지 했던 시기에 “너는 목사가 될 사람인데 학교를 중단해서는 안 된다” 하시면서 아버지 몰래 돈을 구해 와서 저를 도시로 내보내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지금도 생각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시던 어머니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오늘날, 많은 성도들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다는 축복을 나누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아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만약 어머니가 아직까지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직 살아 계시다면 연세가 100세가 가까울 테고 지금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을 텐데’생각해 봅니다. 조금 지나친 저의 욕심이겠죠.
늘 저의 마음에 하나님이 이렇게 은혜 주셔서 부족하지만 은혜로 여러분과 복음의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하고 또, 그런 의미에서 좋은 예배의 처소를 허락 하신 것이 감사하고요.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하나교회는 보통교회가 아니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혹은 내가 성도로, 혹은 복음의 일꾼으로 예배드릴 수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야 합니다.
저는 가끔씩 놀라야 할 사건 속에 안 놀라는 강심장이 참 문제라고 봅니다. 지금쯤 벌써 놀라고 놀라야 하는데 안 놀랍니다. 놀라야 할 것에 안 놀랍니다. 꼬집어 주면 약간 입만 벌릴까 놀라는 기색이 없습니다. 정말 놀랄 일입니다.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복음의 일꾼으로 세워짐을 받았느냐? 이 사실에 놀라야 하고 그 놀람 속에는 감사가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평소에도 나도 모르게 감사가 터져 나와야 합니다. 내 모든 것, 오늘 다 내려놓고 나의 존귀했던 자리에서, 겸손하게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는 귀한 시간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다 했습니다. 옛날 번역에는 뽕나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삭개오가 키가 작아서 예수님 보기가 힘드니까, 돌무화과나무 위 즉, 뽕나무위에 올라갔습니다. 돌무화과나무라는 표현이 좀 생소할 수 있습니다만 뽕나무를 일컫는 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는 이런 나무들이 길가에 상당히 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삭개오란 사람은 어른입니다. 그것도 세리장입니다. 나름대로 관권을 가지고 있는 관료이고 부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았다 했습니다. 키가 작았다는 것 때문에 생각이나 정신이 삐뚤어져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그곳을 지나가신다는 소문에 부끄러움도 체면도 다 팽개치고 한 낮에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삭개오야 내려오라” 하셨습니다. 삭개오는 이 말씀을 하시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고 마음속에 계획할 수도 없었던 일입니다. 예수님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이 될 뻔했는데 예수님의 “삭개오야 내래오라” 는 말씀에 이 삭개오는 정신없이 뽕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제가 가만히 상상을 해보면 우스울 수 있는 광경입니다. 키 작은 사람이 나무에서 오르고 또 후다닥 내려오는 것이 이 삭개오에게는 여러 사람 앞에서라도 문제가 안 되었습니다. 너무 즐거운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눅19:5에 보면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그리고 6절과 7절에 보면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리와 창녀들을 사람취급 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세리는 제일 큰 죄인으로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 시절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금을 거둬서 로마에 바쳐야 하는데, 그 세금을 거둬들이는 사람을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세웠습니다.
예전에도 일제강점기하에서 경찰들 중에는 일본 사람보다 더 못된 경찰을 세우기 위해 한국 사람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백성들 곧 로마 정치가 이와 비슷하게 정치일원으로 현지인을 세우는 일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세무담당은 현지인을 세웠습니다. 성경에 본 그대로, 예수님이 삭개오에게 내려오라 하셨는데, 삭개오는 세리요 또한 부자라 했습니다. 이 부자란 말 속에 삭개오의 행실이 포함이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도 세금을 거둬들이는 자에게 불의가 따라가는 것을 간혹 봅니다. 물론 정직한 사람도 있지만, 정직하지 못한 사람도 세리 중에 많이 있습니다.
예전에 제가 아는 친구 한 사람도 세무 공무원이었는데, 오랜만에 대구에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교회 성가대에서 봉사를 하고 있는데, 양심에 찔려서 성가대에 서지를 못하겠다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왜 양심에 찔리냐고 물었더니, “대구에 내려와서 집을 7채 정도 샀는데, 그것이 정직한 세무 공무원 월급만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말을 하더라고요. 그런 양심을 가지고 교회에서 성가대에 앉아도 예배가 안 되더랍니다.
반드시 예수님이 오신 잔치 집에는, 예수님이 찾아오신 사람에게는 어떤 이유와 상관없이 변화는 될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변화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면 저주는 끝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면 반드시 죽음과 멸망은 끝입니다. 그때부터 행복은 시작됩니다. 이 축복된 역사가 어떤 사람에게든지 어떤 집이든지 반드시 성취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 모두가 “예배드리는 동안에 예수님 내게 또, 저희 집에 오시옵소서” 이것이 예배드리는 자의 같은 소원이요 이것이 사실로 이뤄지는 순간에 나도 모르게 나와 가정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삭개오 더러 “속히 내려오라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하시는 말씀에 삭개오는 너무 즐거워서 급히 내려 왔습니다. 몸집이 작아서 다람쥐처럼 내려왔지 싶습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말씀처럼 세리는 같은 유대민족이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죄인 취급했고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눅19:2에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했습니다. 조금 전에 설명한 삭개오의 행위입니다.
중요한 것은, 삭개오는 지금까지의 세리 장으로, 죄인으로, 구원과 멀었던 자이었는데 하나님은 놀라운 축복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죄인 취급하고 상종도 하지 않았던 그에게 예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혹시 오늘, 내게도 예수님이 찾아오실 것인가? 찾아오십니다. 같은 유대민족이었지만 상종도 하지 않는 버려진 삭개오에게 예수님은 그 외롭고 허전한 마음에 위로를 주실 뿐 아니라 그 가정에 “구원이 이르렀도다” 엄청난 축복의 역사를 선언하시면서 찾아오셨습니다. 할렐루야!
눅19:8에 보면,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토색한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아둔 재산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다 거짓재산이다 말이죠. 그래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다 고백했습니다. 놀라운 고백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고백할 수 없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구원서정을 보면 “부르심을 입고 난 이후에 중생하면 회개가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회개가 나오면 반드시 믿음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나 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고함지른다고 회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할 때, 깨닫게 될 때에 “주님이 내 안에 오셨구나” 하는 순간에 비로소 회개가 나옵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베드로가 깨달은 것도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았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후에, 여러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고향으로 가버렸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또 다시 나타나셔서 고기를 잡지 못하던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 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니 주위에 동료들에게 도움을 받을 정도로 수많은 고기가 잡힌 것을 보고는 그때, 비로소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깨닫고 고백하는 베드로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정말 복음잡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고백 깨달으셨습니까? 이 고백해보았습니까? 이 고백이 진심으로 고백되어지는 순간에 여러분은 믿음이 생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믿어지는 순간에 내 중심에서부터 복음의 놀라운 감격이 터져 나오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이 죄인에게 찾아오신 것 감사합니다” 그리고 적은 죄악이라도 예수님 앞에 다 내어놓는 순간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순간이 오면 자신을 낙망시키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신 증거입니다. 붙잡고 주님 앞에 감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나 같은 죄인에게도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여기 앉아계신 여러분에게 이미 찾아오셨습니다. 못 깨달았을 뿐입니다. 붙잡고 나가십시오. 성령이 역사하실 것입니다.
눅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또, 눅19:9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할렐루야!
빨리 뽕나무에서 내려와서 가정에 영접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시간표가 되어서 예수를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에게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구원받은 백성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세리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마18:17에 보면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유대교에 들어오지 않은 이방인보다 더 악한자로 세리라 표현했습니다.
눅18:11에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 무슨 기도가 이런 기도가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이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왜냐하면 토색·불의·간음이라 했는데, 세리들이 세금을 안냈다는 이유로, 이런 갖은 불의를 행하고 심지어는 가난한 과부에게 가서 엄청난 일을 저질렀던 것이 세리입니다. 이방인보다 더 나쁜 사람으로, 도저히 유대사회에서는 용납할 수 없을 만큼 “나는 세리로 태어나지 않는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여러분, 그 세리 즉, 외롭고 소외된 세리를 기억하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너라” 키가 작은 세리 삭개오가 속히 뽕나무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상상해보면서 얼마나 감격했겠으며 또, 사람들은 얼마나 핍박을 했겠습니까?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오늘 여러분, 이 음성 듣기를 원합니다. 모든 것 자존심·교만심 다 내려놓고 주님의 음성듣기를 원합니다. “아무개야 내려오너라” 그럴 때 모든 저주와 재앙도 끝납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모든 문제의 해결자라는 사실이 믿어집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가정과 가문을 통해 내려오던 것이 끝이 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기에 어버이 주일이라서, 여러분, 진짜 어버이 주일에 부모에게 효도하는 길이 뭡니까? 부모에게 지금까지 없었다면 이 복음의 역사와 축복을 부모님에게 안겨드리는 것 이상 효도가 없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약에 부모가 복음이 없다면 이보다 더 무서운 일이 없습니다. 그 저주와 그 재앙들이 자녀들에게 계속 내려옵니다. 그것이 대물림 할 수가 있습니다. 그 가난과 그 재난이 계속해서 대대손손 못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오늘 여러분 앞에 와서 “아무개야 내려오너라”하는 그 음성 들으시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날 이 집에 구원이 임하였도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을지어다” 여러분, 이 말씀 그대로 여러분 한 사람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백성 삼았다면 여러분 가정과 가문에 이 축복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 축복과 은혜가 부모님에게 전달되는 순간 대물림하던 모든 가난과 모든 연약이 허물어집니다. 떠나갑니다. 흑암의 역사는 떠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어려웠던 가정, 가문에 하나님의 축복된 역사가 지속될 것입니다. 이 이상 더 효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부모님 돌아가시면서 예수 그리스도 영접하고 돌아가셨다면 잔치를 해야 합니다. 웃으면서 손뼉을 쳐야 합니다. 그러나 부모님 돌아가신 일에 손뼉 칠 수 없어서 이불 뒤집어쓰고 웃지만, 실제로 이 축복과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의 얘기입니다. 진짜 웃고 싶대요. 진짜 춤추고 싶대요. 복음을 알고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영접한 부모를 보는 자식의 심정이 이렇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오직 어버이 주일에 진짜 효의 축복은 바로 구원의 역사가 우리 가정에 임하게 하는 순간부터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러분, 오늘도 조용히 아니 오늘밤에도 조용히 이 가정에 구원이 임하였도다. 눅19:9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세리는 절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없는데도 유대교와 달리 예수님은 감히 이 세리 장에게, 그리고 토색하고 욕심내어 범죄한 이 세리 장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선언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죄를 지어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할 수밖에 없지만 상관없습니다. 주님은 오셔서 “이 집에 오늘 구원이 임하였도다” 할렐루야. 이 축복과 역사가 이미 이루어진 가정, 또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가정에 오늘 이 말씀 통하여 또 한 번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원이 이 집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이 이 가정에, 너와 네 집이 구원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가정의 모든 저주가 끝나는 시간이요 이 가정의 행복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저는 이 삭개오의 가정을 보면서 비난하든 말든 예수 믿었다고 욕하든 말든 예수 믿고 하나님 앞에 세우신 이 가정이 지금부터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하고 기뻐했나, 나는 삭개오를 생각하면서 이 축복의 역사, 예수 그리스도 바로 이 시간 내 마음에 모시고 우리 마음에 모신고 우리 가정에 모셔서 구원이 이 가정에 임하였도다 확실한 어버이 주일의 감격과 축복의 역사가 재현되는 늘 한 기쁨이 있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여, ‘삭개오야 내려오라’ 주께서 말씀하시고 이 축복된 역사 속에 세우신 주의 종들에게 주님의 음성 듣는 기쁨이 있도록 역사해주옵소서. 말씀 전하는 이 말씀이 우리 가정과 가문에 성취되는 기쁨이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서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복음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우리자신을 다 내려놓고, 거기서 내려와서 겸손하게 주님을 맞이하는데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어버이 주일입니다. 늘 저의 마음에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여러분과 복음의 사역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합니다. 오늘 내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높은 자리에서 내려오는 귀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1. 예수님이 찾아오시자 삭개오의 가정에 저주가 끝나고 행복이 시작되었습니다.
1) 관리이고 부자이나 키가 작은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체면도 버리고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2)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속히 내려오라 하시고 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가셨습니다.
3) 예수님이 오신 집에 변화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저주 끝, 행복 시작).
①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변화는 될 수밖에 없음
②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저주, 죽음, 멸망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됨
③ ‘저와 저희 집에 오시옵소서’하고 예배드릴 때 나와 가정에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게 됨
4) 유대인들이 죄인 취급하던 삭개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듯이 오늘 내게도 찾아오십니다.
① 예수님은 마음에 위로를 주실 뿐 아니라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언하시며 찾아오심
② 부르심을 입고 중생하면 비로소 회개가 나옴(삭개오의 고백-눅19:8, 베드로의 고백-눅5:8)
5) 자존심, 교만을 모두 내려놓고 예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때 모든 저주와 재앙도 끝나며 하나님의 영광이 계속됩니다.
2. 복음의 역사와 축복을 부모님에게 안겨드리는 것 이상 효도가 없습니다.
1) 부모가 복음이 없다면 저주와 재앙들이 자녀들에게 계속 대물림 됩니다.
2) 한 사람을 선택해서 하나님 백성으로 삼았다면, 그 가정과 가문에도 구원 축복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5, 9절).
3) 어버이 주일에 진짜 효의 축복은 구원의 역사가 우리 가정에 임하게 하는 순간부터입니다.
결론: 예수님이 삭개오의 가정에 오셔서 “이 집에 오늘 구원이 임하였도다” 선언하셨습니다. 이 가정의 모든 저주가 끝나는 시간이요 행복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어버이 주일을 맞아 이 축복의 역사가 여러분의 가정에 재현되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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