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
2007-01-14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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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평강하십시오. 안녕하십시오. 당신은 세계 살릴 선교사입니다. 성가대를 보니 연세 많으신 분들도 많이 신청을 했습니다. 음성이 성숙한 때가 40세 이후 죽을 때까지입니다. 보통 사람은 나이들 수록 음성이 가지만 성악가들은 나이들 수록 음성이 성숙해집니다. 음악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에는 부지런히 자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중창단을 모집하는 데 찬양을 좋아하고 음치만 아니면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많이 신청하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데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악기를 다루는 아이들도 보니 몇 안 됩니다. 악기를 다루는 재능이 있는 사람도 관현악단 모집에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떤 교회에서 트럼펫을 부는데 어찌나 좋던 지요? 전문가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다룰 수 있다면 지금부터 연습하면 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제목을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했습니다. 패역한 세대는 믿음이 떠나면 나오게 됩니다. 이 세대가 바로 요즘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익을 위해서 자식이 부모를 배반하고, 친구가 친구를 배반하는 것이 오늘날 세대입니다. 인터넷을 보니 40대 남자가 내연의 처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려고 하다가 상처를 많이 입은 기사를 보았습니다. 오늘날 자식이 부모를 폭행하고, 부모가 자식을 폭행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TV 프로그램도 있고 단체도 있지만 가정마다 이런 일들이 만연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불신앙하면 뭔들 못하겠습니까?
제가 예전 얘기를 이미 했습니다. 형님 부부에게 대들던 적이 있었습니다. 한참 방황하던 시기에 뭔들 못하겠습니까? 둘째 형수를 팬다고 비를 들고 나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마음에 찔려 나중에 사과를 했는데, 당시는 방황할 때, 하나님이 없을 때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이 믿어지고 신앙생활 한다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진짜 불신앙을 하면 별 희한한 짓을 다할 수 있는 세대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따라오는 것이 패역한 세대입니다.
변화산에서 은혜를 받고 성령이 충만하여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니 불신앙이 충만하고 패역한 세대가 산 아래 현장에 구체적으로 보여집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산에 갔던 세 제자는 성령이 충만하여 내려왔습니다. 베드로가 변화산 현장이 너무 좋아서 원하시면 자신이 초막 셋을 짓겠다고 할 정도로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너무 축복되고 황홀해서 자신이 하는 말을 모르더라고 합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면 구속의 은혜에 감격되어서 황홀해져야 합니다.
강사 목사님들이 강단에 서서 늘 하는 이야기가 “나는 행복합니다.”입니다. 이 구원 하나 때문에 가정, 형제자매의 문제와 상관없이 행복해야 합니다. 내가 이 행복 누리고 감격할 때 하나님이 내 주변의 모든 것 해결하시는 축복과 역사가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행복과 안식이 없다면 하나님 앞에서 구체적으로 누리고 이룰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아무리 말씀에 은혜를 받고 그 축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집에 돌아가면 현장은 패역한 세대입니다.
특히 렘넌트들에게 이 귀한 계획과 소원이 바로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 듣고 복음 통해 기뻐하지만 렘넌트의 모든 사는 배경은 세상의 불신앙입니다. 학문부터 불신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과 자녀들이 잃지 말아야 될 것이 구원에 대한 감격, 복음에 뿌리 내리고 하나님 인도를 구체적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악한 자리에서도 성령인도 받으면 승리합니다. 아무리 좋은 자리라도 성령인도 받지 못하면 실패하고 맙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축복과 은혜를 누리며, 신앙을 회복하며 살아갈 것이냐? 참 중요한 일입니다. 먼저 붙잡을 것이 일상생활 속에 하나님이 위대한 계획과 역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붙잡혀지면 승리하게 됩니다.
시인들이나 화가가 똑같은 사물을 보면서 나뭇잎이 흔들리고 떨어지는 것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러면 시가 나옵니다. 저녁에 창을 열고 달빛을 바라보면 옛날에 생각했던 시상이 떠오릅니다. 그러면 왠지 시를 한 수 쓰고 싶은 생각이 나오더라고요. “저 달이 그렇게 밝은 줄 옛날엔 몰랐소.” 이 모든 것들을 보통 사람들은 다 놓칩니다. “초겨울이니 서리 맞아 다 떨어지지.”합니다. 심지어는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조차도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을 꼭 말씀합니다. 평안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이 지금도 기도의 응답을 하고 계십니다. 기도는 뭣 같이 해놓고 평범함 속에 역사하시는 기도의 응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 응답을 구체적으로 누리는 것에서 떨어지게 합니다. 아침에도 저녁에 밤에 몽중에서도 기도 응답은 되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세상 끝날 까지 항상 함께 하겠다 약속했습니다. 평범함 속에 이미 응답하신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을 발견하는 눈이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다음에 큰 사건과 일 속에 하나님이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신 계획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그렇게 설명해도 별로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여러분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고 축복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큰 고통과 어려움 오면 그 속에서 우리에게 엄청난 미래를 준비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 생기면 ‘하나님 내게 왜 이럽니까?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합니다. 신앙생활 잘해도 이런 문제 생길 수 있고, 또 생겨야 합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더 큰 축복과 역사를 준비하시고 그 속에 설 수 있기 위해서는 그릇을 만들어야 합니다. 좋은 꽃방석에서 그릇이 잘 준비되지 않더라고요. 풀무 불에 들어가는 혹독한 시련을 견디면서 축복하시는 그릇으로 준비됩니다. 그러면서도 문제와 어려움 생기면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생기는 과정일 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0년 가까운 투병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왜 이런 어려운 문제를 계속 두시는가하고 생각할 때는 이상하게도 현실 신앙에 대한 감사가 나오지 않고 불평이 나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게 이런 시련 주신 때에는 쓰시기 위한 계획이 있다 하면 참 평안합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습니다. 왜 하나님이 계속해서 문제와 시련, 특히 병고를 통해 10년 가까이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 ‘그동안 하나님이 만드시고 장차 하나님의 필요에 진짜 쓰임 받도록 하시기 위한 역사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잘 생각했지요? 이게 잘못된다면 당장 불평이 나오고 어려움이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창45:3-5에 보면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능히 대답하지 못하는지라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이것을 읽고 요셉이 참 훌륭하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형들에게 팔리고 노예와 감옥생활을 거쳐서 총리까지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 속의 요셉은 한 번도 원망치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형통하게 하신지라”입니다. 계속 나옵니다. 무엇으로 바라보아야 합니까? 그 형들 만났을 때에 원망과 불평이 전혀 없습니다. “여러분이 날 팔아 감옥 간 사실이 오늘에 이르게 하셨고, 이 일은 하나님이 하셨지 사람이 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무슨 불평과 원망이 나옵니까? 감옥에 들어가고 노에로 팔려가서도 불평대신 감사가 나왔습니다. 진짜 성도라면, 구원에 감격하는 사람이라면 “나를 어디로 보내시던지 하나님이 승리의 역사고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하고 붙들어야 합니다. 거기서 모든 일이 달라집니다.
저는 요셉이 보디발 아내가 모함해서 감옥에 가는데 그 사실이 늘 석연치 않습니다. 한 마디만하면 될 텐데 꼭 그렇게 당해야 합니까? 그런데 요셉은 ‘이 일도 하나님이 하셨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소리 않고 모함을 다 덮어쓰고 감옥에 갔습니다. 제 자신과 교인들을 보니까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사정없이 자기를 대변합니다. 보통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맨발로 도망치는 상황에도 시므이가 저주할 때에 장군이 당장 치려하자 “아니다. 하나님에게 저를 보내셔서 내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냐?” 합니다. 어떤 억울한 사실과 문제가 교회 안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만드셔서 큰 계획 속에 성취시키는 역사로 인도하시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조금만 이해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쓰시는 역사가 나옵니다.
전에는 “축복하옵소서!”하고 기도를 많이 했는데 지금은 새벽기도 나와서도 기도할 말이 없어요. 내가 축복 받을 자격이 안 되고 자리에 없어서 간절히 기도하는 포인트가 “나를 어떻게 만들어서든지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 되게 하옵소서.”이게 기도의 제목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주실 것도 필요한 것도 아십니다. 내 그릇이 안 되어서 주님이 나를 쓰시고 원하는 일들이 많지만 그걸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나는 피곤하다는 소리를 않겠다.”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에 생각했습니다. “맞어! 하나님이 쓰실 때는 쓰시기에 필요한 자로 언제든지 준비되고 예비 되어져야 하는데 내가 육신적인 적은 것 때문에 피곤하다고 핑계대고. 이게 하나님 앞에 설 일이 아니구나!” 자녀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쓰시겠다는 일꾼으로 준비되면 주님이 다 이루십니다. 그 과정에서 뭔가 쓰임 받을 때에 교만하고 자만하지 말고 피곤하다고 핑계대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모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요셉은 무슨 큰일을 만나도 그 안에서 하나님이 큰 계획을 발견했지요. 창37:9-11에 보면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요셉의 특징이 바로 이 언약 속에 있습니다. 어떤 장소에 가든지, 어떤 문제가 와도 요셉은 확실한 언약을 잡고 있습니다. “내 앞에 형들과 부모도 엎드릴 것이다.”라는 언약을 잡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붙잡고 가다가 이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창45에서 형들이 와서 절할 때에 자랑하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일을 하나님이 하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특징처럼 자랑하거나 다른 어떤 불평을 낼 필요 없습니다. 승리할수록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라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인간의 반대 때문에 성취되지 못하는 계획이 아닙니다. 성취됩니다. 우리와 후대를 향하신 영원한 계획이 그대로 성취될 것입니다. 마음을 바로 잡아 주세요.
그래서 이 믿음 가지고 어떤 사건 속에서도 언약 속에 계십시오.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게 되면 형통하게 됩니다. 어떤 자리에서도 이 사실이 가능한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미래의 큰 역사를 보고,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큰 계획을 볼 수 있다는 눈이 열린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다윗이 사자를 죽인 일에 하나님이 보호하신 것을 보고, 골리앗을 칠 미래를 보았습니다.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삼상17:35-37). 여러분, 렘넌트에게 이 신앙 부어주어야 합니다. 우리 어른들 통해 자녀들에게 이 신앙 주어야 합니다. 다윗이 현실 속에서 양을 치는 목자가 아닙니까. (다윗이 말합니다.) “사자의 발톱과 곰의 먹이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벗어나게 하신 이가 나를 버려두지 않고 골리앗 앞에서도 나를 보호하실 것입니다.” 전 이스라엘이 벌벌 떠는 가운데 작은 어린 소년이 와서 왕에게 자기가 나가서 싸우겠다하니까 왕이 너는 아직 소년이니까 갈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 때에 다윗이 확실하게 이 말씀을 했습니다. 렘넌트들에게 뭔가 비전과 확신을 주실 필요가 있습니다.
렘넌트들이 자라고 있는 과정에서 세상에 나가면 참 어려움이 많습니다. 어려움 많은 정도가 아니고 더 큰 괴로움 있습니다. 그래서 적은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이 보호하신 사실을 체험하면서 더 큰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시련과 누구에게든지 시련과 시험 없이 신앙은 성장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문제가 왔을 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을 문제 삼는 그의 신앙생활이 문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렘넌트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닙니다.

미래와 현실은 하나입니다. 오늘 현실을 충실히 못 살면 미래가 현실이 되었을 때 충실히 살지 못합니다. 창39:1-3에 보면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요셉이 노에로 보디발 집에 팔렸지만 노예로 산 것이 아닙니다. 벌써 하나님이 약속한 언약을 잡고 이 축복의 미래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것이 간단한 말 같지만 참 중요합니다. 이것을 두고 다락방에서 ‘비전’이라고 합니다. 이 눈이 다 열리면 다 끝납니다. 쉽게 말해서 오늘 어려운 고통과 염려와 근심 속에서도 하늘나라 영광의 비전이 열리면 문제가 아닙니다. 웃고 감사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큰 권능 속에서 주의 뜻을 이루었고 이런 문제를 내게 주신 것이 감사합니다.
그런 비전이 없으니까, 제가 하늘나라 메시지를 전해도 하늘나라 감각이 없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구원 받았다, 이 비전입니다. 그래서 모든 문제가 오면 걱정, 근심, 염려, 죽는 것에서도 이 비전이 바로 현실로 오면, 여러분이 눈을 뜨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제가 병환 중에 수술 직전이나 죽음 직전에 가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병명도 모르고 배가 불러와 수술실에 들어가는데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병명이 뭔지도 모르고 배를 갈라야 할 지경에도 제 마음은 하늘나라 가 있기에 너무 담담했습니다. 죽음 직전에도 비전을 갖고 있기에 너무 담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라의 비전이 잘 안 됩니다.
따라 해보십시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 받았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옥 가려해도 천국 간다.” 할렐루야! 얼마나 감사한가. 아무리 지옥 가려해도 안 됩니다. 우리는 천국백성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이 사실이 확실히 안 이루어지면 너무 어렵습니다. 연세 많을수록 이게 확인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 불쌍한 자가 됩니다. 죽기 전에 안 가려고 발버둥치고. 얼마나 좋은 곳인데 가야지요. 이 땅에서 수고하고 염려하던 모든 것이 끊어지고 하늘의 영광 속에 주님 품에 안기게 되는 이 축복의 역사가 비전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큰 시련과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눈이 열리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행19:21에 “이 일이 다 된 후 바울이 마게도냐와 아가야로 다녀서 예루살렘에 가기를 경영하여 가로되 내가 거기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지금 바울이 죄수로 잡혀서 끌려가는 중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로마까지 가게 하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비전입니다. 슬프지 않고 외롭지 않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감옥에 갇힌 게 아니었습니다. 어떤 학자가 그러던데 바울이 감옥에 갇힌 것이 아니라 바울에게 감옥이 갇혔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릴 하지만 그럴 듯합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메시지를 전하면서 로마 안의 시위대부터 바꿨습니다. 군인과 권력자들입니다. 또 이 메시지를 통해서 250년 만에 로마가 완전히 기독교화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비전을 가지고 로마에 들어갔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날이라 생각하셔야 합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의 역사가 보여져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그 큰 영광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비전입니다. 성도들이 이것이 없으면 불쌍하게 됩니다. 더욱이 중직자일수록 이것이 안 되면 불쌍하게 됩니다. 교회에 봉사할수록 불평과 불만이 나옵니다. 조금 교회에 봉사했다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미 큰 상을 준비하시고 있습니다. 불평하지 마십시오. 불평하는 사람들은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불평해도 하나님이 주십니까? 나는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게 된다면 곤란합니다. 그 영광의 면류관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중심으로 찬양해야 합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이 비전을 내가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자녀들에게 이 비전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점점 세대는 불신앙의 세대로 빠지고 하늘나라의 영광이 다 무시되는 시대입니다. 미국과 유럽의 경우도 보셨잖습니까. 성경을 믿고 하늘나라를 믿는 사람이 없어진다는 통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특별한 축복을 하나교회에 주시고 거룩한 사명과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그릇들로 삼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아버지여, 이 놀라운 축복 속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고, 오늘도 정말 하나님이 주신 언약을 붙잡고 비전을 갖고 나갈 수 있도록 나와 내 후손들에게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1. 패역한 세대는 믿음이 떠나면 나오게 됩니다.
1) 예수님의 세 제자는 변화산에서 은혜 받고 성령이 충만했지만 산 아래 현장은 패역한 세대였습니다.
2) 아무리 말씀에 은혜 받고 축복 받았다 할지라도 집에 돌아가면 현장은 패역한 세대입니다.
3) 세상의 불신앙 배경 가운데에서도 성도는 승리하기 위해 성령인도를 구체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2. 축복과 은혜를 누리고 신앙을 회복하며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과 역사가 붙잡혀져야 합니다.
- 평안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고 계십니다(발견하는 눈 열려야).
2) 큰 사건과 일 속에 우리의 미래를 준비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 시련을 통해 축복의 그릇으로 만드십니다.
- 10년 투병생활의 예, 요셉의 예(창45:3-5), 다윗의 예(삼하16:5-13).

3. 미래와 현실은 하나입니다
1) 요셉은 무슨 큰일을 만나도 그 안에서 하나님의 큰 계획을 발견했습니다(창37:9-11).
- 형들과 부모도 자기 앞에 엎드릴 것이라는 언약을 잡고 있었습니다.
2) 다윗은 현실 속에서 미래에 이루실 하나님의 큰 역사를 보았습니다(삼상17:35-37).
- 다윗은 목자로서 사자를 죽인 일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보고 골리앗을 치는 미래를 보았습니다.
3) 렘넌트들은 적은 괴로움 속에서 하나님이 보호하심을 체험하며 더 큰 하나님의 계획과 역사를 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4) 미래와 현실은 하나 - 현실은 미래와 관계있으며, 축복의 미래를 지금 현실에서 누려야 합니다.
- 노예 신분의 요셉이 누린 비전(창39:1-3), 죽음 전에 가졌던 목사님의 비전, 바울의 비전(행19:21).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하나님의 역사가 보여져야 합니다. 그 큰 영광의 나라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비전’입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내 자녀들에게 이 비전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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