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원수
2005-06-12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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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말씀을 통해 제목을 신앙의 원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이 직설적인 이야기도 되지만 고상한 단어를 쓰려고 하다가 직설적인 이야기가 좋겠다 생각을 하여 신앙의 원수라고 제목을 적었습니다. 우리 삶이 아무리 애를 써도 신앙 생활이 안되는 원인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원수입니다. 쉽게 말해서 강단에서 몇 주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는 원수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믿어지면 되는데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 내용이 뭐냐?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싶어도 이것이 걸려서 안되는 것입니다. 뿌리가 내려서 조금 내려간다 싶으면 안되고 또 안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노력하고 애쓰고 울고 참아도 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신앙의 원수가 내 안에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원수가 내 집안이라고 이해를 하죠. 식구보다도 더 가까운 내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베드로가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럴때에 예수님께서 너무나 기뻐서 마태복음 16:16 이후에 보면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한 것은 네가 지혜로워서 재주가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알게 하셨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하는 것도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아무리 지식으로 알아도 가슴에 와 닿지 않습니다. 은혜받지 않으면 나에게 사실이 안됩니다. 은혜받는 것은 노력과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은혜받고 나면 하나님의 주권이 저절로 믿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믿으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것과 믿어지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믿으려고 하는 것과 믿어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뿌리가 다릅니다. 믿으려고 하는 것은 종교요. 믿어지는 것은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막 8:33에 이런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한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내용을 설명을 하니 이해가 안됩니다. 그래서 주님이여 절대로 안됩니다. 주님이 죽는다니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이렇게 붙들고 죽지 말라고 간할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돌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그렇게 위대한 축복과 은혜를 받았는데 순식간에 사단의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이런 갈등이 참 많습니다. 그 이유가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쉽게 이야기해서 네가 원하는 욕심대로 생각하는구나. 내가 아직 살아있습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전국에서 더러 전화가 올때가 있고 제 병이 다 나았다는 헛소문이 나서 온 세상이 떠들썩하고 미디어 편집하는 사람들이 뉴스로 내 보내려고 저를 만나자고 합니다. 완강히 거절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슨 뉴스가 되노? 내가 무어라고 하겠노? 병이 있다가 나았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반사로 있는데 나한테 무슨 일이냐? 확실히 어떤 면에서 입당예배를 통해서 제가 강단에 못서고 비디오를 보여드린 것이 전국적인 기도의 제목이 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병나은 것에 대해서 취재를 하겠다고 하는 것을 지금까지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인가 찾아오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거절하고 있습니다. 막상 그렇게 되면 할 말이 없어요. 내가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인데 무어라고 하겠어요?
어떤 갈등들이 있는가 하면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을 분명히 믿고 있음에도 위장이 끊어질 듯 아프고 이 병이 들어서 죽을 지경일때 아무리 신앙고백을 해도 왜 낫지 않습니까? 목사님 어찌하여 병이 낫게 되었습니까? 참 대답하기가 정말 어려워요. 이것만큼 갈등되는 것이 없습니다. 이 갈등 속에 빠진 자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확실히 말하고 그것을 믿고 따라가는데도 왜 내게 영적인 문제가 옵니까? 표시나지 않는 이런 갈등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자기가 살아있어서 그렇습니다. 자존심이 그래도 남아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주권보다도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서 그렇습니다. 유달리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 웃대로부터 내려오는 영적인 문제들이 잘 안깨집니다. 영적인 문제는 평생간다고 류목사님이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뿌리를 내리게 되면 영적문제가 내게 영향을 못준다고 그랬는데 사실은 아무리 영적인 문제가 뿌리를 내려도 순간순간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나는 자존심이 강하다는 가정과 개인을 대할 때에 조상때부터 내려오는 그러한 뿌리가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유달리 그 가문, 가정, 형제가 자존심이 강합니다. 그런 배경 속에 저도 세상을 자존심 하나 가지고 살았습니다. 무슨 일이 다 있어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면 문제가 심각하게 됩니다. 나 뿐 아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들 교회와서 자존심 키우고 사는 것이 교인들입니다. 약간 부딪힐 때 자존심 상하면 모든 것 제쳐놓고 눈알에 쌍심지를 켜는 것이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면 풀지도 않고 어떤 경우는 대대로 가려고 합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것은 어디서 오느냐? 이것이 사단에게서 옵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영적문제에 걸리기 쉽다가 아니라 이미 걸려있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을 용서 못할 뿐 아니라 자기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오장육부가 상하게 됩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병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장육부가 그대로 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신앙 생활의 암적인 문제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그 유명한 고백을 하였지만 이 일이 해결이 되지 않았을 때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예수님께서 가차없이 내치셨던 문제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고백과 업적도 소용없습니다.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자기가 죽지 못하면 열가지 발판의 첫 번부터 무너집니다. 아무리 되고 싶어도 안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인데 내가 살아있는데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됩니까? 근본적으로 이게 안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계속 하나님의 주권과 열가지 발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만 그냥 넘기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왜 안되느냐? 중요합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죽고 예수가 살아계셔야 이것이 믿음의 가장 기초적인 문제인데 이것부터 안됩니다. 그래서 믿는다하면서 말씀의 뿌리를 내린다하면서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암적인 이런 문제와 요소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이것이 해결이 안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어렵게 생각하는데 신앙생활만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8:34에 ‘무리와 제자를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를 내안에 모시면 제일 먼저 자신이 없어집니다. 자기라는 것이 없어집니다. 신앙의 뿌리를 내리면 이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하면 내가 죽고 예수가 내 안에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제일 먼저 복음 받게 되고 복음의 뿌리 내린다는 것은 내가 죽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남편, 자식, 아내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누릴 수 있는 첫 번째 발판이 이것입니다. 가정에 문제가 나면 내 문제구나. 이리로 돌아오면 그 사람은 복음을 누릴 수 있는 눈이 열려가는 중입니다. 아니 눈이 열렸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이것은 남편때문이야, 아내때문이야. 교회와서 말씀을 들으면 이것은 저사람이 들어야 될 문제야, 나하고는 상관없어. 이런 사람들은 도저히 복음을 누릴 수가 없고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무슨 문제가 닥칠 때에 주여 내 문제입니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이렇다 저렇다 그러다가 복음을 바로 붙잡고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정말 기도하면 남편이 변화가 됩니다. 원망하면 변화는 커녕 더욱 사나워집니다.
이러한 사실이 삶에서 신앙의 뿌리를 내리면 쉽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와야 될 것이 십자가의 뜻이 무언가 이해가 되고 이미 예수께서 이땅에 메시아로 오셔서 메시아 사역을 완성하신 곳이 십자가입니다. 다 이루었다. 여러분과 제가 할 일이 없습니다. 믿으면 됩니다. 십자가의 약속을 언약을 붙잡고 누리면 되는 것이 신앙의 생활입니다. 복음의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 역사가 저 사람에게 임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저께 류목사님의 완전 복음이라고 했는데, 완전 복음을 알아가지고 완전히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나 사건을 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된다는 눈으로 보면 그것이 완전 복음입니다. 남편이 별짓을 다해도 복음만 임하면 됩니다. 우리 눈이 그 남편을 볼때에 절망이 아닌 복음의 눈으로 볼때에 그 남편에게 희망을 걸 수 있는 믿음이면 됩니다. 완전 복음이라 할 때에 복음이 완전히 되었다 다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건이나 문제 앞에서도 이런 시각으로 바뀌어지게 되면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내 힘으로 안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됩니다 수동입니다. 그래서 행1:8에도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가지 이르러서 내 증인이 되리라! 수동입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십니다. 제일 신나는 단어가 하나님이 나를 하게 하실 것이다. 진짜입니까? 아멘.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바울이 고전15:31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의 신앙생활의 자랑이 이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 힘으로 나를 죽이려고 머리를 치고 벽에다가 박고 왜 안됩니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여 은혜를 주시옵소서.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 안됩니다. 몸부림쳐도 안되고 가슴을 쳐도 안되고, 머리를 박아도 안됩니다. 하나님 은혜를 주시옵소서.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옵소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의 자랑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이 자랑할 것이 얼마나 많고 자존심이 유달리 강한 바울이 그 신앙생활에서 자랑스럽게 비밀을 표현하면서 죽는다고 했습니다. 누가 죽습니까? 내가 죽는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의 주권이 저절로 인정되어 버립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다 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병, 건강, 부, 지혜도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저는 이번 병을 통해 느낀 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은혜주시면 되는 것이고 은혜 안주시면 몸부림쳐도 안됩니다. 원망해도 아무래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간표에 의해서 병이 나아라 하면 낫는 것입니다. 병이 나을때까지 여러 가지 체험과 깨달음을 주시고 때가 되었다 싶으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고통과 어려움이 올때에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문제와 사건이 올 때에 내 탓이구나. 그리고 믿음의 갈등이 올 때에 다른 것이 아니라 ‘아직도 내가 생생하게 살았구나. 팔팔하게 살았구나.’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이것만 이해되고 해결이 되면 성령으로 이 일만 이루어지게 되면 모든 문제 해결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죽고 내 안에서 예수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축복입니다.
그저께 식탁에 앉아서 지난 과거를 좀 이야기했습니다. 과거에 성질이 더러웠다. 나만 더러운게 아니라 당신도 더러웠다. 그러니까, 옛날 생각이 났는지 ‘당신은 옛날에 성질이 더러운 정도가 아니고 사건이 생기면 눈이 시퍼렇게 되었다. 미쳤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생각이 좀 나요.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은 그때보다 천사다. 다 되었다’고 그래요.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옛날에 내가 살았어요. 그 배경을 보면 많은 경우 살아오면서 상처 때문에 일어난 나라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으로 치료되면 다 없어집니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좀 더 부드러워집니다. 누굴 대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안되면 그대로 살아있으면 되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믿어지지 않는다. 참 불행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신앙의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전부다 내가 주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내가 죽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깊이 들어갈수록 뿌리가 깊어집니다. 이런 삶일수록 확신에 차 있습니다.
이번 전도캠프에 참여하면서 들은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이 되자면 다른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확신있는 교인들이 지역지역마다 심어놓는 것이다 확신이 있을 때에 다락방이 나오고 응답이 나오고 모든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교인들의 실제적인 삶의 간증이 나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교인들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확신없는 곳에는 전부 세상적이고 인간적이고, 욕심적입니다. 거기에 참 복음의 승리의 간증이 나올 수 없습니다. 전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핵심 속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전도 합숙을 받고 확신이 생기고 복음의 역사가 확인이 되면 제일 먼저 이 확신을 간증할 수 있는 개인적인 다락방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 다락방을 여는 것은 자기 확신도 지속하고 다음으로 나로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확신주고 응답받는 개인 응답의 중요한 기회입니다.
이것이 요즘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중직자들과 준비하는 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합숙가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와서 할 일이 합숙을 통해서 확실한 신앙을 가지게 될 때에 그 응답이 지속될 수 있는 다락방을 찾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죽으면 성령의 인도가 저절로 됩니다.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성령인도가 안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주장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니까 판단의 주체가 전부 내가 되어있습니다.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심이 믿음으로 내가 없어지는 순간에 성령인도가 되어집니다. 이 사실이 이루어져야 진실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은혜를 구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이것이 안되면 기도가 되어질 수가 없습니다. 성령인도가 믿어지지 않는데, 내가 모든 것을 다하는데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까? 간단한 일이지만 오늘까지 여러분과 제가 깊은 암초처럼 박혀있기 때문에 문제와 사건이 터질때마다 율법으로 판단하고 옛 습관과 전통으로 판단하고 내가 살아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여기에서 복음이 안되고 헌신이 안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때부터 내 생각과 방법이 아니라 말씀인도가 성취되는 현장을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없어져야 말씀이 이루어지는구나. 이것이 보여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교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내가 살아있고, 내 욕심이 살아있고 내 생각이 살아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인도해주옵소서. 너무 지금까지 하나님의 역사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통로를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신앙의 원수로 살아왔던 이런 삶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현장에 가면 전도와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간증이 나오고 그것이 전도요, 선교입니다. 이땅에서 말하면 전도요, 외국에 나가서 간증이 나가면 선교요, 현장을 살리겠다, 전도해야겠다 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깊이 신앙의 뿌리를 진짜 내리십시오.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습니다.
이때부터 여러분들은 예수님은 모든 문제 해결자시다. 하나님이 완전 책임지십니다. 날마다 이 말을 해도 안됩니다. 완전 책임질 수가 없는 것이 자기가 살아있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 맡기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상 9:11에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주님의 주권입니다. 유명한 다윗의 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한 말입니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할렐루야! 내손에 있다고 맨날 발버둥치니까 책임지실 주님께서 책임을 안 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마음뿐 아니라 물질과 경제와 삶, 인격도 다 주의 손에 있습니다. 혹시 멸시받습니까? 주의 손에 있습니다. 혹시 억눌림이 있습니까? 엎드려 계십시오. 어느 순간 일으켜 세워주실 순간이 시간표에 따라서 나옵니다. 이것이 안되니까 내가 하려고 하니까 모든 것이 갈등이요, 고통입니다.
죽으면 내세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죠. 여러분 삶이 이땅이 아니라 내세가 목표입니다. 마지막으로 상급이 있다는 말을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이땅에서 여러분과 제가 해야할 몫입니다. 그것이 헌신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제게 헌신을 구합니다. 막8:35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절에 ‘사람이 만일 온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참 생명과 연결된 것이 헌신입니다. 쉽게 말해서 죽을 각오하고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하고 주 앞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안되면 주의 일에 피곤하고 어려워집니다. 혹시 주의 일을 하다가 쓰러져봤습니까? 죽을 각오로 헌신하십시오. 하나님이 여기에 새 힘을 주실 수 있고 여러분도 알지 못하는 깊은 간증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바로 헌신입니다. 구원의 뿌리를 내리면 복음에 유익된다면 생명도 불사한다는 것이 초대교회의 헌신입니다. 이것이 말씀들고 나가서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게 복음을 위해서 제자 위해서 물 한그릇을 떠 드리는 것도 하늘의 상급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참 복음을 위해서 전도와 선교에 유익한 것이 있다면 헌신입니다. 헌신은 생명과 연계되어있습니다. 참 생명의 결단과 순교의 각오 없이 헌신이 나올 수 없습니다. 내 일도 바쁜데 무슨 교회 일에 헌신을 합니까? 그것은 순교와 연결되어있지 않으면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간단하게 하는 것 같아도 여기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순교의 각오가 없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해 놓고도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생명과 연계된 헌신의 축복이 눈이 열리면 하면 할수록 감사함이 나옵니다. 주여 정말 감사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세우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다 됩니다. 막8:38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 쉽게 말해서 우리 모든 삶의 역사를 내 자신이 죽어버리고 내가 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하면 이것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락방도 주의 제자. 많은 표현을 들었습니다만, 다락방을 할 때에 내 제자를 만들려고 1,2년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순간순간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제자를 만들려고 끝까지 따라다닙니까? 빨리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고 나는 또 다른 제자를 찾고. 이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과 동기가 나오면 절대로 안 놓칩니다. 놓치게 되면 굉장히 실망합니다. 왔다가 떠나는 것 상관없습니다. 여러분 제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박목사의 제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제자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박목사의 제자면 박목사가 알아주면 기분좋고 못알아주면 기분이 나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제자.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다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죽고 하나님 앞에 진짜 순수하게 서 보십시오. 응답이 그때부터 임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시퍼렇게 살아서 응답 안준다고 고함쳐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조용히 하나님의 제자.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고 심판 날에 하나님이 잘했다 칭찬하게 될 때에 나와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알아주실 때에 모든 영광이 걸려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귀한 계획 속에 세워주신 이 엄청난 시대적인 축복과 사명 앞에서 내가 살아서 이 모든 것을 막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겸손히 우리 자신이 주님앞에서 성령으로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순간마다 죽노라.’ 성령의 인도받는 축복과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여. 바울처럼 내가 자랑하는 것 날마다 죽노라. 순간마다 죽는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처럼 정말 우리 자신이 욕심과 정욕과 동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앞에서 복음의 뿌리를 내리고 날마다 죽는 귀중한 축복으로 인도해주옵소서. 주님이 완전히 맡아서 역사하시는 그 축복의 역사가 날마다 우리 속에 일어나도록 체험되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올리옵니다. 아멘.
전국에서 더러 전화가 올때가 있고 제 병이 다 나았다는 헛소문이 나서 온 세상이 떠들썩하고 미디어 편집하는 사람들이 뉴스로 내 보내려고 저를 만나자고 합니다. 완강히 거절하였습니다. 그것이 무슨 뉴스가 되노? 내가 무어라고 하겠노? 병이 있다가 나았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반사로 있는데 나한테 무슨 일이냐? 확실히 어떤 면에서 입당예배를 통해서 제가 강단에 못서고 비디오를 보여드린 것이 전국적인 기도의 제목이 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병나은 것에 대해서 취재를 하겠다고 하는 것을 지금까지 거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인가 찾아오겠다고 합니다. 그것도 거절하고 있습니다. 막상 그렇게 되면 할 말이 없어요. 내가 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인데 무어라고 하겠어요?
어떤 갈등들이 있는가 하면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것을 분명히 믿고 있음에도 위장이 끊어질 듯 아프고 이 병이 들어서 죽을 지경일때 아무리 신앙고백을 해도 왜 낫지 않습니까? 목사님 어찌하여 병이 낫게 되었습니까? 참 대답하기가 정말 어려워요. 이것만큼 갈등되는 것이 없습니다. 이 갈등 속에 빠진 자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확실히 말하고 그것을 믿고 따라가는데도 왜 내게 영적인 문제가 옵니까? 표시나지 않는 이런 갈등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자기가 살아있어서 그렇습니다. 자존심이 그래도 남아있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주권보다도 내가 모든 것을 다 해서 그렇습니다. 유달리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 웃대로부터 내려오는 영적인 문제들이 잘 안깨집니다. 영적인 문제는 평생간다고 류목사님이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뿌리를 내리게 되면 영적문제가 내게 영향을 못준다고 그랬는데 사실은 아무리 영적인 문제가 뿌리를 내려도 순간순간 괴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나는 자존심이 강하다는 가정과 개인을 대할 때에 조상때부터 내려오는 그러한 뿌리가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유달리 그 가문, 가정, 형제가 자존심이 강합니다. 그런 배경 속에 저도 세상을 자존심 하나 가지고 살았습니다. 무슨 일이 다 있어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으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면 문제가 심각하게 됩니다. 나 뿐 아니라 교회 다니는 사람들 교회와서 자존심 키우고 사는 것이 교인들입니다. 약간 부딪힐 때 자존심 상하면 모든 것 제쳐놓고 눈알에 쌍심지를 켜는 것이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면 풀지도 않고 어떤 경우는 대대로 가려고 합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것은 어디서 오느냐? 이것이 사단에게서 옵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영적문제에 걸리기 쉽다가 아니라 이미 걸려있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은 남을 용서 못할 뿐 아니라 자기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으면 오장육부가 상하게 됩니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병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장육부가 그대로 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게 신앙 생활의 암적인 문제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그 유명한 고백을 하였지만 이 일이 해결이 되지 않았을 때에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예수님께서 가차없이 내치셨던 문제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고백과 업적도 소용없습니다.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자기가 죽지 못하면 열가지 발판의 첫 번부터 무너집니다. 아무리 되고 싶어도 안되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인데 내가 살아있는데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됩니까? 근본적으로 이게 안되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계속 하나님의 주권과 열가지 발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만 그냥 넘기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왜 안되느냐? 중요합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죽고 예수가 살아계셔야 이것이 믿음의 가장 기초적인 문제인데 이것부터 안됩니다. 그래서 믿는다하면서 말씀의 뿌리를 내린다하면서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암적인 이런 문제와 요소가 그대로 남아있어서 이것이 해결이 안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신앙생활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어렵게 생각하는데 신앙생활만큼 쉬운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너무 쉽게 말씀하셨습니다. 막 8:34에 ‘무리와 제자를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를 내안에 모시면 제일 먼저 자신이 없어집니다. 자기라는 것이 없어집니다. 신앙의 뿌리를 내리면 이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하면 내가 죽고 예수가 내 안에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제일 먼저 복음 받게 되고 복음의 뿌리 내린다는 것은 내가 죽고 없어지는 것입니다. 남편, 자식, 아내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누릴 수 있는 첫 번째 발판이 이것입니다. 가정에 문제가 나면 내 문제구나. 이리로 돌아오면 그 사람은 복음을 누릴 수 있는 눈이 열려가는 중입니다. 아니 눈이 열렸습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이것은 남편때문이야, 아내때문이야. 교회와서 말씀을 들으면 이것은 저사람이 들어야 될 문제야, 나하고는 상관없어. 이런 사람들은 도저히 복음을 누릴 수가 없고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무슨 문제가 닥칠 때에 주여 내 문제입니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이렇다 저렇다 그러다가 복음을 바로 붙잡고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으로 정말 기도하면 남편이 변화가 됩니다. 원망하면 변화는 커녕 더욱 사나워집니다.
이러한 사실이 삶에서 신앙의 뿌리를 내리면 쉽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와야 될 것이 십자가의 뜻이 무언가 이해가 되고 이미 예수께서 이땅에 메시아로 오셔서 메시아 사역을 완성하신 곳이 십자가입니다. 다 이루었다. 여러분과 제가 할 일이 없습니다. 믿으면 됩니다. 십자가의 약속을 언약을 붙잡고 누리면 되는 것이 신앙의 생활입니다. 복음의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그 역사가 저 사람에게 임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제가 그저께 류목사님의 완전 복음이라고 했는데, 완전 복음을 알아가지고 완전히 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무슨 일이나 사건을 볼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된다는 눈으로 보면 그것이 완전 복음입니다. 남편이 별짓을 다해도 복음만 임하면 됩니다. 우리 눈이 그 남편을 볼때에 절망이 아닌 복음의 눈으로 볼때에 그 남편에게 희망을 걸 수 있는 믿음이면 됩니다. 완전 복음이라 할 때에 복음이 완전히 되었다 다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사건이나 문제 앞에서도 이런 시각으로 바뀌어지게 되면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어렵고 힘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내 힘으로 안됩니다. 은혜를 받으면 됩니다 수동입니다. 그래서 행1:8에도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가지 이르러서 내 증인이 되리라! 수동입니다. 하나님이 하게 하십니다. 제일 신나는 단어가 하나님이 나를 하게 하실 것이다. 진짜입니까? 아멘.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바울이 고전15:31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의 신앙생활의 자랑이 이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것이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어떤 사람은 내 힘으로 나를 죽이려고 머리를 치고 벽에다가 박고 왜 안됩니까?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여 은혜를 주시옵소서.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 안됩니다. 몸부림쳐도 안되고 가슴을 쳐도 안되고, 머리를 박아도 안됩니다. 하나님 은혜를 주시옵소서.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옵소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의 자랑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바울이 자랑할 것이 얼마나 많고 자존심이 유달리 강한 바울이 그 신앙생활에서 자랑스럽게 비밀을 표현하면서 죽는다고 했습니다. 누가 죽습니까? 내가 죽는다. 내가 죽으면 하나님의 주권이 저절로 인정되어 버립니다. 여기에서 모든 것이 다 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병, 건강, 부, 지혜도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저는 이번 병을 통해 느낀 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은혜주시면 되는 것이고 은혜 안주시면 몸부림쳐도 안됩니다. 원망해도 아무래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시간표에 의해서 병이 나아라 하면 낫는 것입니다. 병이 나을때까지 여러 가지 체험과 깨달음을 주시고 때가 되었다 싶으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고통과 어려움이 올때에 하나님이 하시는구나. 문제와 사건이 올 때에 내 탓이구나. 그리고 믿음의 갈등이 올 때에 다른 것이 아니라 ‘아직도 내가 생생하게 살았구나. 팔팔하게 살았구나.’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이것만 이해되고 해결이 되면 성령으로 이 일만 이루어지게 되면 모든 문제 해결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죽고 내 안에서 예수님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믿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축복입니다.
그저께 식탁에 앉아서 지난 과거를 좀 이야기했습니다. 과거에 성질이 더러웠다. 나만 더러운게 아니라 당신도 더러웠다. 그러니까, 옛날 생각이 났는지 ‘당신은 옛날에 성질이 더러운 정도가 아니고 사건이 생기면 눈이 시퍼렇게 되었다. 미쳤다’고 하더라고요. 나도 생각이 좀 나요.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은 그때보다 천사다. 다 되었다’고 그래요.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옛날에 내가 살았어요. 그 배경을 보면 많은 경우 살아오면서 상처 때문에 일어난 나라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으로 치료되면 다 없어집니다. 그리고 내가 죽으면 좀 더 부드러워집니다. 누굴 대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안되면 그대로 살아있으면 되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믿어지지 않는다. 참 불행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신앙의 뿌리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전부다 내가 주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내가 죽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깊이 들어갈수록 뿌리가 깊어집니다. 이런 삶일수록 확신에 차 있습니다.
이번 전도캠프에 참여하면서 들은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이 되자면 다른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확신있는 교인들이 지역지역마다 심어놓는 것이다 확신이 있을 때에 다락방이 나오고 응답이 나오고 모든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교인들의 실제적인 삶의 간증이 나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교인들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확신없는 곳에는 전부 세상적이고 인간적이고, 욕심적입니다. 거기에 참 복음의 승리의 간증이 나올 수 없습니다. 전도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핵심 속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전도 합숙을 받고 확신이 생기고 복음의 역사가 확인이 되면 제일 먼저 이 확신을 간증할 수 있는 개인적인 다락방이 필요합니다. 개인적으로 다락방을 여는 것은 자기 확신도 지속하고 다음으로 나로 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확신주고 응답받는 개인 응답의 중요한 기회입니다.
이것이 요즘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중직자들과 준비하는 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합숙가는 사람들은 제일 먼저 와서 할 일이 합숙을 통해서 확실한 신앙을 가지게 될 때에 그 응답이 지속될 수 있는 다락방을 찾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죽으면 성령의 인도가 저절로 됩니다.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성령인도가 안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주장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니까 판단의 주체가 전부 내가 되어있습니다.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심이 믿음으로 내가 없어지는 순간에 성령인도가 되어집니다. 이 사실이 이루어져야 진실로 하나님께 의지하고 은혜를 구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이것이 안되면 기도가 되어질 수가 없습니다. 성령인도가 믿어지지 않는데, 내가 모든 것을 다하는데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까? 간단한 일이지만 오늘까지 여러분과 제가 깊은 암초처럼 박혀있기 때문에 문제와 사건이 터질때마다 율법으로 판단하고 옛 습관과 전통으로 판단하고 내가 살아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여기에서 복음이 안되고 헌신이 안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때부터 내 생각과 방법이 아니라 말씀인도가 성취되는 현장을 볼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내가 없어져야 말씀이 이루어지는구나. 이것이 보여지게 됩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은 교회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과 함께 하십니다. 내가 살아있고, 내 욕심이 살아있고 내 생각이 살아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인도해주옵소서. 너무 지금까지 하나님의 역사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단의 통로를 스스로 만들어가면서 신앙의 원수로 살아왔던 이런 삶이 너무나 많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현장에 가면 전도와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간증이 나오고 그것이 전도요, 선교입니다. 이땅에서 말하면 전도요, 외국에 나가서 간증이 나가면 선교요, 현장을 살리겠다, 전도해야겠다 이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깊이 신앙의 뿌리를 진짜 내리십시오. 내가 죽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습니다.
이때부터 여러분들은 예수님은 모든 문제 해결자시다. 하나님이 완전 책임지십니다. 날마다 이 말을 해도 안됩니다. 완전 책임질 수가 없는 것이 자기가 살아있고 자기 마음대로 하고 맡기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대상 9:11에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주님의 주권입니다. 유명한 다윗의 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한 말입니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할렐루야! 내손에 있다고 맨날 발버둥치니까 책임지실 주님께서 책임을 안 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마음뿐 아니라 물질과 경제와 삶, 인격도 다 주의 손에 있습니다. 혹시 멸시받습니까? 주의 손에 있습니다. 혹시 억눌림이 있습니까? 엎드려 계십시오. 어느 순간 일으켜 세워주실 순간이 시간표에 따라서 나옵니다. 이것이 안되니까 내가 하려고 하니까 모든 것이 갈등이요, 고통입니다.
죽으면 내세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죠. 여러분 삶이 이땅이 아니라 내세가 목표입니다. 마지막으로 상급이 있다는 말을 잘 이해하셔야 됩니다. 이땅에서 여러분과 제가 해야할 몫입니다. 그것이 헌신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과 제게 헌신을 구합니다. 막8:35에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36절에 ‘사람이 만일 온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참 생명과 연결된 것이 헌신입니다. 쉽게 말해서 죽을 각오하고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하고 주 앞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안되면 주의 일에 피곤하고 어려워집니다. 혹시 주의 일을 하다가 쓰러져봤습니까? 죽을 각오로 헌신하십시오. 하나님이 여기에 새 힘을 주실 수 있고 여러분도 알지 못하는 깊은 간증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바로 헌신입니다. 구원의 뿌리를 내리면 복음에 유익된다면 생명도 불사한다는 것이 초대교회의 헌신입니다. 이것이 말씀들고 나가서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제게 복음을 위해서 제자 위해서 물 한그릇을 떠 드리는 것도 하늘의 상급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참 복음을 위해서 전도와 선교에 유익한 것이 있다면 헌신입니다. 헌신은 생명과 연계되어있습니다. 참 생명의 결단과 순교의 각오 없이 헌신이 나올 수 없습니다. 내 일도 바쁜데 무슨 교회 일에 헌신을 합니까? 그것은 순교와 연결되어있지 않으면 나오지 않습니다. 교회 일을 하는 사람들이 간단하게 하는 것 같아도 여기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순교의 각오가 없으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해 놓고도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생명과 연계된 헌신의 축복이 눈이 열리면 하면 할수록 감사함이 나옵니다. 주여 정말 감사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세우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다 됩니다. 막8:38에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 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 쉽게 말해서 우리 모든 삶의 역사를 내 자신이 죽어버리고 내가 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한다고 하면 이것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다락방도 주의 제자. 많은 표현을 들었습니다만, 다락방을 할 때에 내 제자를 만들려고 1,2년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순간순간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제자를 만들려고 끝까지 따라다닙니까? 빨리 다른 사람에게 인계하고 나는 또 다른 제자를 찾고. 이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 욕심과 동기가 나오면 절대로 안 놓칩니다. 놓치게 되면 굉장히 실망합니다. 왔다가 떠나는 것 상관없습니다. 여러분 제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제자를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박목사의 제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제자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박목사의 제자면 박목사가 알아주면 기분좋고 못알아주면 기분이 나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의 제자. 하나님이 알아주시면 다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죽고 하나님 앞에 진짜 순수하게 서 보십시오. 응답이 그때부터 임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시퍼렇게 살아서 응답 안준다고 고함쳐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오늘 조용히 하나님의 제자. 하나님이 나를 알아주시고 심판 날에 하나님이 잘했다 칭찬하게 될 때에 나와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알아주실 때에 모든 영광이 걸려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귀한 계획 속에 세워주신 이 엄청난 시대적인 축복과 사명 앞에서 내가 살아서 이 모든 것을 막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겸손히 우리 자신이 주님앞에서 성령으로 바울처럼 ‘나는 날마다 순간마다 죽노라.’ 성령의 인도받는 축복과 역사가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여. 바울처럼 내가 자랑하는 것 날마다 죽노라. 순간마다 죽는다 이렇게 고백하는 것처럼 정말 우리 자신이 욕심과 정욕과 동기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앞에서 복음의 뿌리를 내리고 날마다 죽는 귀중한 축복으로 인도해주옵소서. 주님이 완전히 맡아서 역사하시는 그 축복의 역사가 날마다 우리 속에 일어나도록 체험되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올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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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9 | 하나님이 쓰시는 기준 | 삿3:12-23 | 2025-03-23 | |
1478 | 한 구원자를 세워 구원하게 하시니 | 삿3:7-11 | 2025-03-1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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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5 | 끝까지 전도하는 교회 | 단12:1-4 | 2025-02-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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