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예배

복 받을 그릇
2004-05-07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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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마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마 5:2)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오늘 말씀 속에서 "복 받을 그릇" 이라 그렇게 제목을 삼았습니다. 이미 여러분과 저는 복을 다 받았습니다. 지난주에 말씀한 것처럼 이미 이 복을 받은 사실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더 나아가서 이 복을 받았는데, 담으면 되는데, 누리면 되는데, 그 누림이 어느 정도 우리에게 적용이 되느냐? 하는 것이 오늘 그릇으로 조금 표현을 해 봤습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사이다 뚜껑 열어놓고는 받지 못합니다. 몇 방울 받지 못하죠. 큰그릇을 놓고 흐르는 빗물을 받아야 목욕도 할 수 있고 거기다가 온갖 것도 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모든 것 다 주셨다 하지만 마음 문 꼭꼭 닫아놓고 앉아 있으면 일이 안 되게되어 있어요.

여러분들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난주간에 주신 말씀처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그랬을 때에 그 복이 있는 심령의 가난함이 내게 감사함으로 또 일이나 사건이 바로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이 역사 하시는 시작으로 받아 들여야 되는데, 이것이 안 될 때는... 그래서 기도가 응답되는 그것이 시작으로 되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과 일은 불평과 불만이 되고 원망이 될 수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산다는 우리 신앙에 자각이 오히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을 진노하는, 하나님을 율법에 중심이 되어져서 하나님에게 향한 것이 믿음과 평안으로 아니고 우리를 간섭하시고 괴롭히는 하나님으로 보여지게 되고 또 그런 하나님으로 만나 지게됩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을 향해서 계속 바라본다는 그 사실 자체가 오히려 엄한 하나님을 바라보고, 징계하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히려 괴롭히는 하나님으로 바라본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가 얼마나 '어렵다!' 이렇게 될 때에 나타나는 것이 갈증으로 나타나고, 열심히 노력하고 애를 쓴다는 사실이 종교로 나타나고, 또 내게는 평안보다도 안식보다도 다른 부작용으로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계속 바라보고 바라보는 그런 자각증세들이 바로 성경에 가난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오늘은 좀더 나아가서 그런 가난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여러분과 제게 기도응답으로 시작하는, 평안과 안식으로 시작해야 되는데 그 평안과 안식으로 시작하는 그 증상이 온유함으로 나타난다! 그랬습니다. 온유함으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는 그릇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자체가 오랜 그 우상숭배나 이런 것이 배경이 되어서 여유가 참 없다는 것을 많이 느끼게 되어요. 그래서 부드러움이라든가, 이 온유함이라는 것이 이 우리 민족 속에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화 속에 잘 흥분하고 또 대화 속에 다른 사람을 자꾸 평가하고 저주하는 이런 일들이 참 많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신문에 나온 것을 제가 봤습니다. 웃지 못할 사건이 있더라 구요. 그게 뭐냐하면, 이제 빚 관계도 있고 그래서 서로 대화하는 속에서 '너를 죽이겠다! 너를 죽여 버린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 가지고 뭐 고발을 하고 구속이 되었더라 구요. 그런 이야기를 한 사람이, 우리 민족들이 갖는 하나의 특성입니다. 그 미국 가서 느낀 것은 아무리 다급하고 아무리 일이 이상해도 절대로 이런 극한 소리를 안 해요. 그냥 가만히 웃고 있지, 웃고 있고 오히려 더 부드럽게 그렇게 표현을 하지! 그런 소리를 안 합니다.

그래서 뭐 어떤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극한 소리를 하면 단번에 총 가지고... 총기를 가지고 다니기 때문에 뭐 쏜다고 그래서 그렇다고 그러지만, 나는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구요. 그 민족 자체에 벌써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뭐 흔히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만은,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뒤에 차가 많이 밀렸는데 내려 가지고 서로 안다고 해서 껴안고, 그렇게 나가 가지고, 운전석 밖에 나가 가지고... 그런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빵빵거리고 그렇지 만은 미국에서는 그것을 보고도 싱긋이 웃고 그냥 보고 있어요. 앞에 차가 가도록 기다립니다.

'아, 우리가 정말 참 여유가 없다!' 여유가 없는 배경이 뭐냐하면, 힘이 없다 그런 것 같아요. 이제 그 미국 같은 대국에서 힘있는 나라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지는 몰라도 우리는 너무 힘이 없다! 그러면 우리 민족의 문화가 그 '한의 문화!' 라 그럽니다. 그러면 힘이 없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 '한' 입니다. 힘있는 사람은 한이 나올 필요도 없잖아요. 힘이 없는 사람이 생기는 것이 한이다! 그렇게 보여지고요. 또 그래서 그런지 너무 가정에도 너무 여유가 없어요. 너무 여유가 없고, 너무 부드러움이 없고, 너무 이런 그런 온유함이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어요.

보니까 어떤 것을 볼 수 있느냐 하면, 약한 동물일수록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방어의 방법으로... 그래서 사단은 독이 없어요. 강한 짐승일수록 독이 없습니다. 약한 짐승일수록 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약한 짐승일수록 독을 가지고 있으면서 독을 통해서 나오는 부작용이 상당히 심하더라 구요. 우리 민족성이 뭔가 어떤 그 우상 문화를 통해 가지고 이런 어떤 독이 있는 그런 그 분위기가 되어 있다는 것이 참 불행스러운 것이다 싶어요. 가정에서도 보면은 저도 뭔가 상당히 부드러우려고 노력을 하는데도 부드러운 게 잘 안돼요.

뭐든지 이렇게 일이 생기거나 이러면 '내가 좀 잘못했다! 내가 좀 실수했다!' 그러면 뭐 간단하잖아요. '미안합니다. 내가 실수했습니다!' 그래버리면 되는데, 절대로 내가 실수 한 것 실수했다고 잘 안 하죠. 가만히 입다물고 그럴수록 더 엄한 얼굴을 하고있고, 그럴수록 더 이상한 얼굴로 내 아내를 탓하게 되고, 그렇게 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가정들이 거의 다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조금 뭔가 부족하면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아이들도 아예 훈련이 되어 가지고, 저희 부모 닮아 가지고 아예 똑같아 져요.

제가 그 우리 집에 손자가 잠깐 와 있는 동안에, 아이들이 뭐 조금 이러면 '감사합니다!' 시키고 '고맙습니다!' 시키고 그 다음에 뭐 이렇게 아이가 울려고 그러면 '울지 말고 할아버지 주세요!' 하라 그러고, 그러면 이렇게 두 손 내밀어 가지고 '주세요!' 그러면 주고받고 인사하도록 만들고... 그걸 내가 가만히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저게 좀 필요하다 싶어요 왜? 워낙 우리는 이게 없어요. 그래서 '부드럽다! 온유하다!' 그런 게 여유가 없어요. 아마 여러분 보세요. 뭐 그 남편한테도 똑같이 이러니까 남자들만 이러는 줄 아는데, 여자들은 더 해요. 전혀 여유가 없어요. 자기가 조금 미안하면 '미안합니다!' 그러고 '내 실수입니다!' 이게 안 되거든요. 그래서 온유함이라는 것이 힘있는 자에게서 나오는 그런 고백입니다.

그래서 이런 배경에서 오늘 그 온유하다는 사실을 두고 가장 성경에 모델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마태복음 11장에 한번 찾아봅시다.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30절입니다. 우리 다같이 한번 합독을 하겠습니다. 시작"(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29절에 "나는 마음이" 뭐라 그랬습니까? '온유하고 겸손하다' 그랬습니다.

하기는 우리 예수님만큼 이 땅에 오실 때에 힘있는 분이 어디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분 아닙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요. 마음대로 말씀한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셨는데 그 뭐 더 '힘이 있다 없다!' 그건 평가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 보면 예수님이 그런 신분으로 오셨지 만은 이 땅에서 행하신 것이 얼마나 어려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30절 보면"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뭐라 그랬어요? 가볍다 그랬습니다.

흔히 우리 성도들이 뭐라 그랬냐 하면, 아이가 애를 먹이면 '참 내 십자가다!' 그래요. 자기 잘못해서 인지는 모르고, 교육 잘못시켜서 그런지 모르고 십자가라 그럽니다. 십자가는 그런데 붙이는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뭐냐? 전혀 내가 받을 것이 아닌데도 상대방을 위해서 받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누구만 질 수 있느냐? 예수그리스도만 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자격이 못 되어요. 아예! 그래서 조금 어렵다 그러면 '십자가' 라 그러고 '내 십자가라!' 그러고 여러분 십자가도 붙이지 말아요. 그것은 십자가가 아니고 내 허물로 내 잘못된 것으로 따라오는, 말하자면 그것도 뭐 직설적으로 말하면 죄 값이지. 어떤 면에서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이런데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지신 십자가가 어떤 것이냐 하면, 너무 우리는 상상도 안 될 문제입니다. 온유함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면 예수님께서는 전혀 상관도 없는 죄가 있으신 분도 아니고 또 죄를 지은 분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여러분과 저의 죄를 대신해서 구속 제물로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런데 그 우리 온유함이다! 이럴 때에는 온유하다는 말을 그냥 '부드럽다!' 그저 늘 '복종한다!' 이런 것으로 생각되기 쉬운데... 그래서 오늘 여기 유대인들도 온유하다는 말을 잘 이해를 못했다고 그렇게 주석 상 나오고 있어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당당합니다. 너무 유대인들이 당당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래서 '온유함이라는 것은 노예들이나 종들이 하는 일이지 우리는 아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만은, 마태는 이 마태복음서에 온유하다는 말을 가장 축복된 그릇들로 이 온유를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세상 사람들이 온유하다! 그럴 때에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세상에 부드럽다! 이런 것이 아니고 세상에는 늘 사람과 사람의 싸움에 있어서는, 또 다툼에 있어서는 어떤 것을 말하느냐 하면, '내가 너보다 똑똑하다, 내가 너보다 낮다, 내가 너보다 힘이 있다!'는 것에 증거로,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나오는 싸움들이 참 많습니다. 부부간에도 자존심 대결할 때에 바로 이런 것이거든요. '내가 너보다 똑똑하다, 내가 너보다 낫다!' 이런 것이 바로 싸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동안에 온유라는 것이 나올 수가 없죠. 온유라는 것이 뭐냐하면, 부족과 상대방의 연약과, 상대방의 너무 가난함을 채워주는 것이, 저 사람을 통해서 채워 주고 이익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온유의 배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배경이 그것이것든요.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신 배경은, 여러분의 죽음과 멸망과 고통과 여러분의 모든 것들을 완전히 채우시고 남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축복된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게 우리에게 사실로 임해져야 온유라는 그런 모습이 그런 것이 나올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이 비로소 내가 모든 것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그릇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안 되었다 그럴 때는 우리는 그 자체가 벌써 하나님의 약속을 못 누린다는 것이 되고 있거든요. 지난 시간에 말씀한 것처럼 '가난하다!' 그럴 때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문제 해결자다!'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다 받았다 그랬습니까? 못 받았다 그랬습니까? '받았다는 것을 누리는, 기도 응답으로 시작하는 것이 가난한자다!' 그랬습니다. 이게 안 될 때에는 갈증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게 안 될 때는 뭐냐하면, 종교 속으로 빠지고 신비 속으로 빠집니다. 그래서 늘 막 답답하고 그렇게 나가는 것이죠. 여러분과 저는 답답함이 시작이 아닙니다. 여러분과 저는 뭐로 시작입니까? 평안이 시작입니다. 이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나 사건은 주실 수 있는 주시기 위한 문입니다. 이미 벌써 여러분께 문제가 생겼다. 주시기 위한 문입니다. 그 문제를 그때부터 붙들고 뭐 합니까? 기도하는 겁니다. 기도하면 이게 다 오는 거니까, 주시는 문이니까! 그러니까 온유함이라 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이미 다 받은 자가 표현되는, 다른 사람에게 표현되는, 풍겨지는 분위기입니다! 배경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함은 모든 것을 주고도 남는 그래서 주고도 남는 이 사실 자체가 온유함입니다.

우리들이 이제 흔히 그것을 조금 알아야 될 것이 우리가 '온유하다, 그 사람 참 온유한 사람이다!' 이럴 때는 어떤 것이 있느냐 하면, 그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낮다는 표현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모든 부족을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것 정도가 아니고 그 이상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유익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그런데 그게 안 될 때에는 그게 연결이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될 수 있기 위해서는 '가장 큰 힘있는 분이 아니면 온유함이라는 것이 나올 수 없다!' 그랬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허물을 다 한 몸에 지시고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신 분으로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고 이 땅에 오셔서 여러분과 저를 향해서 '나를 따라오너라!' 그 다음에 '내게 배워라 내 멍에는 쉽고 가볍다!' 그러니까 뭐냐하면 예수님의 멍에를,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어려운데도 이 예수님께서 지시면서 하신 그걸 내가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에 바로 온유함이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조금 전에 말씀한 것처럼 우리가 어떤 당하고, 우리가 당할 수밖에 없는 그런 배경이 아니라 그랬죠. 그리고 또 예수님이 지신 이 십자가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고의 고통입니다. 이건 뭐 쉽고 가벼울 수가 없어요.

로마인들이 십자가형을 집행을 할 때에 절대로 노예나 속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십자가 형틀을 집행을 하지, 본 국민들, 시민들에게는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땅에 가장 잔인한 죽음이 십자가 형틀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십자가 형틀은 고통을 최고로 주면서 그 고통을 당하는 동안에 죽어 버리면 끝나는데, 그 고통을 최고로 당하면서도 오래 오래 죽지 않도록 고안해 낸 사형 틀이 십자가입니다. 저는 내 개인적으로 뭐 사고를 당했다. 죽을 뻔했다. 이건 뭐 별로 어렵지 않아요. 제가 교통사고를 통해서 잠깐 뭐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것은 뭐 '아, 죽을 뻔했다!' 그건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병원에 이미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고 나 후에 뭐 깁스를 해 가지고 한 열흘동안 저희 아내하고 같이 이등 실에서 둘이 얼굴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만은, 그것은 그냥 '참, 은혜 감사합니다!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습니다!' 그걸 별로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그런데 이번에 내가 뭔가 죽음이 사실적으로 내게 임해가지고 이 죽음의 고비를 왔다갔다하는, 죽음의 고비를 안고 시간이 가니까, 이게 어려워요. 지금 여기 앞에 서서 설교하는 이 시간도 벌써 고비를 넘긴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내가 호흡이 곤란하고 이렇게 되니까! 그 시간이 가는 동안에, 그 시간 속에서, 죽음을 왕래하는 그 시간 속에서 그 고통이 어려워요. 그 다음에 그 고통이 정신적 문제도 오고 이런 것이 오더라 구요.

그런데 예수께서 가장 혹독한 고통을 당하시면서 십자가에서 이제 죽음을 넘나드는데 그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가장 길게 만들어 놓는 것이 십자가 형틀입니다. 여러분 무슨 말인가 좀 이해가 금방 잘 안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이 십자가 형틀에서 예수님께서는 너무 고통스러웠었는데, 예수님은 뭐 한 4-5시간 밖에 안 걸렸습니다. 그런데 기록에 보면 이틀 간 가는 사람도 있다고 그래요. 이 십자가에 달려 가지고, 보통 하루 가는 것은 보통이고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가장 아픈 부위에 못을 박습니다. 여기 손바닥이 아닙니다. 손목 위에 못을 박습니다. 발등에 못을 박고 발목에다가... 이래가지고 피를 흘리면서 이 피를 계속 흘리는 진액이 빠지는 과정에서 그것도 또 잠깐이 아니고 하루나 이틀을 계속 그 고통을 견뎌야 됩니다. 이래서 가장 역사 속에 잔인한 죽음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 십자가 지신 이 십자가의 고통! 그러면서 예수께서 뭐라고 말씀 하셨느냐? 이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지신 그 분이 오늘 여러분과 저게 '내 짐은 가볍다!' 그 다음에 '내 짐은 쉽다!'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배경이 뭐냐? 가장 힘있는 분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고 여유 있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리고 말씀하기를 "나는" 뭐라 그랬습니까? '마음이 온유하니' 예수께서 육체의 고통과 괴로움이, 그래서 오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온유하니...'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셔 가지고, 가장 힘있는 분으로, 가장 이 땅에 여유 있는 분으로 표현된 분입니다. 그래서 온유의 모범이 되고 있죠.

그 다음에 온유하신 분이 누구냐 하면 민수기 12장입니다. 민수기 12장 한번 찾아봅시다. 민수기 12장 1절부터 3절까지 우리 다같이 합독을 합시다. 민수기 12장 1절부터 다같이 시작 "(민 12: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민 12: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민 12:3)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모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그 다음에 모세는 왜 그렇게 예표가 되었느냐? 하나님을 직접 대면한 분은 모세입니다. 하나님을 확실히 봤습니다. 그리고 만졌습니다. 믿었습니다.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을 가장 확실하게 증거 했던 분이 모세입니다. 구약시대 때에 그래서 '지면에 모세보다 더 온유한 자가 없더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확인하는 만큼 그리스도의 축복과 역사가 확인되는 만큼, 그래서 지금 잘 보셔야 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름이요 그리스도는 누구라 구요? 직책이라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그분을 내 마음에 영접하는 순간에 나의 문제는, 여러분의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었습니다.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이 해결된 그 분을 마음에 모시므로 기도의 사실적인 응답을 받습니다.

그러면 사건이 생겼습니다. 억울한 일이 생겼습니다. 뭐 하면 됩니까? '온유함으로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아뢰라!' 그랬습니다. 배경입니다. 그런다고 막 성을 내고 내가 너보다 강하다는 것을 표시할 필요가 없어요.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아뢰라!' 온유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면 됩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왜? 가장 힘있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 분명히 응답하신다. 이 사실이 안 될 때에 우리도 모르게 자꾸만 어디로 빠지느냐? 흑암에 빠지게 되어요. 저주에 빠지게 됩니다.

왜 그러느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고백되어질 때마다 누가 무너지느냐? 사단의 세력이 무너집니다. 왜냐? 창세기 3장! 여러분과 저의 창세기 3장의 현장은 멀리 남에게 '이렇다, 저렇다!' 아닙니다. 누구든지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이 창세기 3장의 현장이 무너지게 될 수 있는 배경이, 아니 그 사실이 그리스도입니다. 바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내가 죽고, 여러분이 죽어야 될 그 죽음을 완전히 해방시켜 주신 분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사망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사단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동시에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했음이니라!' 이건 법입니다. 이건 뭐 되고 안되고가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그 메시지 속에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대통령이 사면을 시켜도 법에 의해서 시킨다!' 그랬습니다. 맞습니다. 대통령이 이제 크리스마스 되면, 이제 사면시킬 겁니다. 그때 대통령이 사면시키면 살인죄도 상관없고 더 흉악한 범죄도 상관없습니다. 사면되어 나갑니다. 나갈 때에 대통령이 어느 날 '너 나가라!' 그런 게 아닙니다. 법에 의해서, 그것도 반드시 법에 의해서 사면을 시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실 것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흑암 세력을 깨뜨렸습니다. 죽음과 멸망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습니다. 바로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여러분을 해방했다!' 할 때에 법에 의해서 해방 시켰습니다. 법입니다. 그게 여러분과 제가 구원받는 축복에 은혜죠.

바로 이것이 안 되게 될 때는 흑암 권세에서 놓여 날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그러면서도 흑암권세를 알지 못하고 여기서 놓여나지 못하면 심각한 문제가 오게됩니다. 종교에 빠지게 되고, 그 다음에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비에 빠지게 되고, 그러면 심각한 저주가 그리고 내가 받았던 저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내게 임했던 저주가 누구에게? 자손들에게까지 임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누리는 순간에, 내가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모든 저주와 흑암의 세력이 완전히 내 당대에 꺾여 버립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완전히 해결됩니다. 이 사실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그 사실을 우리는 '누린다!' 그럽니다. 그때부터 뭐냐? 기도가 시작됩니다. 기도응답이 나오게 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 해결되었다는 사실이 나와 여러분에게 온유함으로 표현됩니다. 누가 어떻다! 상관없어요. 또 어떤 사건이 생겼다! 상관없어요. 뭐하면 됩니까? 기도하면 응답이 온다! 그렇게 확실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신약에는 또 어떤 분이 있느냐 하면, 누구보다도 신약에 잘 표현 된 한 분이 있죠. 바울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얼마나 당당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 바울의 사건이 디모데 전서 1장 12절 말씀 한번 봅시다.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딤전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그러면서 바울이 계속 여기에 말씀하는 것은 '내가 긍휼을 입은 것은 잘났기 때문이 아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뭐라고 말씀하느냐 하면, 15절 보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뭐라 그랬습니까? "괴수니라" 죄인 괴수다! 그랬습니다. 첫 번째 바울과는 너무 다릅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베냐민 지파에서, 청년 바리새인으로서 흠이 없다고 하던 그런 바울이, 그런 사울이죠. 그런 사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내가 지극히 못나고 지극히 가난하고 지극히 연약한 자다!'

16절에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뭐가 되어요?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만큼 고난과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온유함을 보였던 일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면서부터 이 일이 나왔습니다. 바울은 그 전에는 스스로가 당당한 자요. 스스로 부요한 자요. 스스로 강한 자입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통해서 비로소 믿음을 가지게 되는 순간 누구보다도 당당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말씀이냐? 여러분 성령의 은혜로 인해서 믿음이 바로 되어야 됩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신앙을 심으면 믿음의 열매가 나오고 불신앙을 심으면 불신앙의" 뭐가 나옵니까? 열매가 나옵니다! 그러니 여러분 중요한 것은, 신앙도 심으면, 신앙을 자꾸 가꾸면, 신앙이 자꾸 자랍니다. 그런데 불신앙도 심고 불신앙을 키우면 자꾸 뭐가 되느냐? 불신앙이 자랍니다. 여러분 불신앙의 결과는 엄청난 저주입니다. 신앙의 결과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나는 차라리 어떤 면에서 '아멘' 하기에 너무 겁나는 말이 있더라 구요. 그게 뭐냐하면?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아멘 안 나오네요! 왜? 너무 불신앙을 가지고있어요.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그러면 불신앙이 오히려 더 많은데...

여러분 참 두려운 말이더라 구요. 우리가 정말 믿음가지고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아멘 순수하게 이렇게 '아멘'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참 감사한 일이죠. 온갖 불신앙 다하고, 막 온갖 염려 다하고, 온갖 의심 다하고... 그런데 예수께서 하신 말씀처럼 '내 믿음대로 될지어다!' 이러면 불신앙 해 놓았는데, 불신앙대로 되어 버리면 큰일나잖아요. 여러분 바울이나 특별히 모세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 그 사실이 확인되는 만큼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이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교회를 건축하고, 또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솔직히 말해서 여러분과 저에게 우리가 참 하나님 앞에 고백해야 될 것은, '아버지 어쩌다가 이런 큰복을 받았습니까!' 이래야 될 건데, '어쩌다가 내가 교회 건축하는데 들어와 가지고...' 불신앙입니다. '어쩌다가 하나님께서 이런 엄청난 자리에 세우는지...' 이건 너무 너무 감사할 일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게 잘 안되어요. 불신앙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자녀요, 세계복음화 할 사람들이요. 여러분과 저를 통해서 이 땅에 참 된 하나님의 제자를 삼기를 작정하셨다면,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면, 여러분 통해서 저를 통해서 교회 건축한다! 분명한 사실 아닙니까! 이게 믿어졌다! 편해져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온갖 불신앙의 의심이다 올라와요. '교회가 짓다 가 무너지는 게 아니냐! 내 집이 잽혔다가 넘어 가는 게 아니냐!' 조금만 뭐하면 열이 받쳐 가지고... 여러분 불신앙입니다. 또 막말로 해 가지고 주의 교회를 위해서 헌신했다가 넘겨졌다 그러면 또 어떻습니까! 막 말로 해 가지고 길거리에 나왔다! 교회 건축해서 하나님 앞에 다 바치고 길거리에 나왔다! 하나님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진짜 하나님 살아 계신다면 그걸 못 믿는 게 전부 불신앙 아닙니까! 그래가지고 온갖 불안이 다 오고...

여러분 그 결과가 어떤 줄 압니까! 엄청난 저주에 빠지게되는 문제가 오더라 구요. 너무 좋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불신앙 할 때에 오는 문제가 엄청난 문제가 오더라 구요. 여러분 진짜 우리 하나님 앞에,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느냐? 오늘 이 시간 어쩌다가 이 축복된 자리에 왔느냐! 이게 되어야 됩니다. 미안합니다 만은, 저는 제가 목사로 있으면서 어떤 때는 불신앙을 나 혼자 하는 게 아니냐 싶은 생각이 들만큼 불신앙이 되더라 구요. 교회 안에서는 이 뭔가 메시지 통해서는 여러분들에게 큰 소리 쳐놓고는 집에 가서는 '야, 진짜 이게 될까!' 이게 불신앙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너무 답답하죠. 불신앙 그 자체가요 사람을 얼마나 괴롭히고, 사람을 답답하게 하는 줄 모릅니다. 여러분 의심만큼 괴롭히는 게 없어요.

미안합니다. 우리 그 장로님들이 흔히 그러더라 구요. 뭐 특히 이제 여러 가지 헌금 면에서 '헌금 안나오면 어떻게 하느냐? 막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 또 우리 이제 선교헌금에도 선교헌금에 미리 미리 거기서 돈이 잘 안나올 것을 생각해 가지고, 우리 앞으로 뭔가 선교하는 것도 좀 줄이고 뭐도 줄이고 자꾸 이런 염려부터 먼저 하더라 구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부터 안 주실 것을 미리 전제를 하고 자꾸 그게 자꾸 나와요. 먼저 그래가지고 엉뚱한 불신앙을 자꾸 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교회 건축하고 선교헌금이 줄었다. 별로 그렇게 그런걸 내가 보이지는 못한 것 같아요. 제가 늘 이렇게 싸인을 하니까! 그런 것 같지는 않아요. 만약에 안 주신다! 그러면 안 하면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 선교 헌금이 전혀 선교할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합니까!' 못 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저는 그럽니다. 선교헌금이 없다! 안 주신다! 안 하면 되는 겁니다. 주신다!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어려운 문제 아니잖아요.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섰다 그러면요. 불신앙의 마음, 생각, 말! 바로서야 합니다. 이것이요, 씨가 되어 가지고 엄청난 흑암이 역사 하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우리도 모르게...

그래서 저는 연말이 되면 연말연시 귀신이 있다고 그래요. 왜 그러는지 모르게 불신앙이 와요. 그리고 왜 그런지 모르게 맞는 말을 하는데도 불신앙 하게 하는 말을 합니다. 맞는 말하는데도... 그것은 전부 사단이 좋아서 날뛰는 것이지, 사단이 좋아서 축제를 하는 소리지, 하나님께 영광과 찬미가 아닙니다. 여러분 통해서 하나님이 찬미 받고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데, 사단이 좋아하는 것으로 말하면 됩니까! 그래서 우리가 연말 연시에 참 축복 받고 새로운 시작, 얼마나 귀한 순간입니까! 불신앙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신앙을 키우면 키울수록 저주가 옵니다. 죽음과 고통이 와요.

지난주간에 조금 말씀했습니다 만은, 어쩐 일인지 우리 신앙들이 합리성에 빠지고, 그 다음에 지식에 빠지고, 과학성에 빠져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리고 이 다락방 하면서 옛날에 뭐 신비처럼 '믿습니다!' 이걸 안 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뭔가 믿음이 없어져요. 자꾸 계산에만 너무 뚜렷하고... 그 다음에 또 어떤 문제가 오느냐 하면, 다락방 하는 교회가 사람을 자꾸 비판을 잘해요. '저기 그리스도가 없구나! 복음 되었구나! 안되었구나!' 이런 것이 눈이 열리면서 받으라는 축복은 안 받고, 하라고 그러는 신앙생활은 안하고, 이러면서 자꾸 불신앙으로 보고 막 '어떻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에 여러분 잘 아셔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거나 남을 평가하는 것이 언제 모르게 발달이 되어 있더라 구요. 그래서 걸핏하면 뭐 남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여러분은 절대로 형제 자매든지, 교회 안에서든지 절대로 남을 비판하지 마세요. 비판하게되는 만큼 여러분이 정죄 당합니다. 왜? 비판하는 것에 똑같은 일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거든요. 그래서 실수하고 뭔가 조금 있더라도 온유함으로 포용하세요. 힘있는 자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모든 축복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더라는 겁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면에서 더 어렵고 힘들다!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 하실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면 이루어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아니라면 교회 짓는 것 아예 안 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셨다면 '반대한다, 안 한다!'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그 일에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조금만 믿음가지면, 조금만 믿음으로 헌신하면 얼마나 하나님이 축복하실 겁니다.

저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뭔가 이 건축헌금을 하는 사람들이나 또 매 강단, 매 주일마다 참 한사람, 한사람 꼭 기도를 했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못하고, 나는 뭔가 하나님께서 너무 뭔가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면 그 사람을 하나님 일을 하도록 만들어 놓고 '고통스럽게 만들 것이냐? 괴롭게 만들 것이냐?' 아니라고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건축을 부탁해 놓고 하나님이 뭐냐하면, 부살렐이라는 사람 오홀리압이라는 사람에게 그 건축을, 아주 지혜로운 공교한 실을 짜고 이러는데 그걸 감당할 수 있는 뭘 줍니까? 지혜를 주셔 가지고 그걸 감당하게 만들더라 구요.

여러분 건축하게 되는 사람! 나는 역사에 지금가지 교회 건축하고 난 후에 복을 안 받은 사람 한사람도 없다는 것을 나는 고백합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래서 건축하다가 뭐 얼치기 건축자가 뭐 그냥 교회 건축에 같이 하다가 그 건축하고 난 후에 완전 건축 전문가가 되어 가지고... 이 교회 건축한 그 뭐 여러분 잘 알다시피, 구 장로라는 사람 안 있습니까! 순 엉터리였습니다. 처음에 건축도 아예 몰라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이 교회를 건축하고 너무 하나님 앞에 복을 받아 가지고 한꺼번에 돈이 엄청나게 많이 왔어요. 그래서 자만이 생겨 가지고... 사람이 돈을 줘도 살살 줘야지, 참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돈을 너무 많이 줘 버리니까 헤까닥 뒤집어져 버렸어요.

이제는 돌아왔으니 제가 이 말해도 안 괜찮겠습니까! 뭐 엄청나게 뭐 딴 짓을 하는데, 아내 하나면 충분하잖아요! 나중에 회개하고 돌이켜 가지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나 같으면 '야, 이 엉뚱한 짓을 하니까 맛봐라!' 그러고 좀 오래 놔둘 건데, 하나님께서 금방 회복을 시켰어요. 지금은 완전 건축 기술자가 되어 가지고 하나님께 엄청난 축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것을 제가 봅니다. 자녀들은 완전히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아 가지고 그 아들들도 다 결혼 잘하고 하나는 뭔가 신학교 공부를 하면서 저 프랑스인가 어디 가서 또 유학을 지금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뭘 말씀하고 싶으냐 하면,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이 교회 지었던 사람이거든요. 이 교회 짓는 이 일이, 여러분과 제가 지금까지 은혜 받고있는 이 일이 얼마나 축복된 역사입니까! 이 일을 감당한 그 사람에게 무조건 쏟아 부어 버렸어요. 약간 실수 했는 것 그냥 안 두더라 구요. 금방 돌이켜요. 한 6개월 정도 그랬어요. 혹시 여기 아시는 분들은 고개를 끄덕일 겁니다. 진짜 하나님께서 역사 하시는 것을 봤습니다. 여러분 정말 주님께서 역사 하는 하나님이 계획이라면, 여러분과 저를 세워서 하나님이 기쁘신 뜻에 조금 믿음으로 헌신해 보세요. 이것은 뭐 엄청난 하나님의 역사와 능력이 여러분 사실이 체험이 될 겁니다.

그래서 제가 건축하기 전에 '개인 가정과 직장과 사업에 교회가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그 말이 이 말입니다. 여러분 개인이 엄청나게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조금만 믿음으로 헌신하게 되면요. 하나님이 얼마나 축복하시느냐? 아마 지금도 오늘 여기에 우리 교회에 오신 분들 고백을 하지 않아서 일지는 모르지만, 아마 정말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믿음을 자기고 하나님의 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내가 정말 믿음으로 헌신하겠다는 그런 마음을 조금만 가지고 사업하고 생활한다! 그러면 여러분 사업에 사실적인 역사와 증거가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늘 믿음으로 안 하고 불신앙 하니까! 축복 받아야 될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고통이 따라오는 겁니다.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정말 모세나 바울처럼 하나님을 대면하고 만났던지, 아니면 성령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바울아 음성을 들었던지, 아니면 성령께서 역사 하셔서 음성 듣지 않아도 내 중심에 내 양심에 상관없이 내게 실제로 하나님의 살아 계신 임마누엘의 역사가 사실적으로 이루어지든지! 하나님을 확신하는 만큼,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역사! 믿음으로 확신하는 만큼 내게 뭐가? 믿음이 키워지게됩니다. 믿음이 심어지게 되고 믿음이 키워지게됩니다. 이 믿음이 가정, 가정에 키워지게되는 만큼 그 가정이 온유한 가정입니다. 부드러운 가정이 됩니다. 이 축복된 은혜의 역사!

그래서 성도들의 가정이 얼마나 부드럽고 이웃이 볼 때에 '아, 저 가정 진짜 참 행복한 가정이다!' 이렇게 되어야 될 것인데, 이게 안 되니까 뭐냐? 뭐 조금만 이상하면 뭐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 가 어디 있어! 고함부터 먼저 나오는데... 여러분 정말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온유한 자에게 주신 축복의 그릇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온유한 자로 세워 놓았습니다. 힘있는 자입니다. 다 받았습니다. 우리가 빌빌하고 살아갈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기도하면 됩니다. 온유한 자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축복을 받을 그릇 - 온유함

☞ 복을 어떻게 누리고 적용하느냐를 그릇이라고 표현해 보았습니다. 어떤 그릇으로 준비되어 있느냐에 따라서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 이미 기도 응답으로 평안과 안식을 가지고 가난함으로 시작하였다면, 그 다음에는 축복을 누리는 그릇으로 온유함이 나타납니다.

☞ 그러나, 우리 민족은 우상 숭배의 배경이 강하기 때문에 다른 민족들보다 여유있지 못하고 너그럽지 못한 모습이 있습니다.


[2] 온유함의 모델 - 예수 그리스도 ▶ 유익

☞ 온유함의 가장 중요한 모델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마11:28-30)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신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대속 제물로 친히 십자가를 지실 만큼 온유하셨습니다. 온유함이란, 상대방의 부족과 연약과 가난함을 채워주고 상대방에게 유익이 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그 온유함의 충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죄악과 부족과 연약과 가난함을 다 해결하고 우리에게 참된 유익을 주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분이셨기 때문에 능히 우리에게 온유함을 보일 수 있는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십자가를 받아들일 때, 십자가와 함께 예수님의 온유함이 우리 안에 스며드는 것입니다.


[3] 온유함의 모델 - 모세 ▶ 확신

☞ 모세도 온유함의 중요한 모델입니다.(민12:1-3) 하나님을 만난 후 모세는 가장 확실하게 하나님을 증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확인하는 만큼 사건과 문제를 만날 때 온유함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되고,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응답하십니다.

☞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고백되는만큼 사단이 무너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흑암의 세력이 꺽여집니다. 이 때부터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확신으로 온유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4] 온유함의 모델 - 바울 ▶ 믿음

☞ 바울도 온유함의 중요한 모델입니다.(딤전1:12)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베푸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날 수 있게 하신 후에야 바울은 비로소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당당하게 되었습니다.

☞ 신앙을 심으면 신앙의 열매가 나오고, 불신앙을 심으면 불신앙의 열매가 나옵니다. 우리 교회의 건축을 두고도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확신할 수 있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 언약 잡은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몸조차도 대속 제물로 바치심으로 내게 유익을 주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만나고 큰 확신으로 나아갔던 모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믿음으로 당당하게 나아갔던 바울처럼 내게도 온유함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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