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있는 아이들
2004-05-07 00:00:00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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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마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어린이 주일이라고 꼬마가 앞에 나와 서서 노래를 했습니다. 사실은 이 자리에 절대로 못 나오는 시간인데도 오늘 특별히 나왔습니다. 어린이 주일이라서 그렇게 이해가 됩니다. 내가 노래를 가만히 들으면서 뭐를 느끼느냐 하면, 우리교회 성가대원들은 그 음성이 상당히 맑아요. 그런데 우리 어린아이에 비해서는 꼭 구정물 같은 음성이더라 구요. 아, 이렇게 차이가 나는 구나!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마 내 느낌이겠죠. 오늘 어린이 주일이라고 하니까, 그런 느낌이 더 든 것 같습니다. 이런 어린 아이들에게 능력 있는 아이들을 만들어야 된다! 오늘 그래서 제목을 '능력 있는 아이들' 그렇게 제목을 잡았습니다. 자식들을 바로 교육을 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는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위해서 갖은 애를 쓰고 있지만 현실은 더 이런 문제가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5월 5일! 어제 잠깐 등산을 한다고 조금 걸었습니다. 전 가족들이 그 등산하는데 아이들의 손을 전부 잡고 올라 왔더라 구요. 와 가지고 가는 것을 이렇게 보면서 어떻게든지 아이들을 바로 키우려고 하고 애를 쓴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더욱이 가장 기초적인 학교 수업조차도 안 되는 이런 시점에서 유달리 '어린이 날!' 이라 그래가지고 행사도 하고 그 다음에 여러 가지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공허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얼마나 안 되고 있느냐? 이런 사실 속에서 마음이 괜히 허전한 것이, 그런 생각이 들더라 구요. 여러 가지 행사를 또 TV를 통해서 화면을 보고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는 데로 자녀들이 문제 있다! 청소년 문제 있다! 그건 아니라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우리 다락방에서 누가 문제 있어요? 어른들이 문제 있다! 그러니까 청소년들은,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문제 속에 어떻게 했습니까? 빠졌어요. 그래가지고 그 지난번 신문에, 또 그리고 검찰에서 이렇게 보니까, '원조교제 하는 것은 어른들이 문제이니까! 어른들만 잡아서 뭐 취조를 하고 그렇게 하자!' 이래서 어른들을 뭐 명단조사하고 찾고 그렇게 하더라 구요. 어린아이는 뭐 그대로 보내고...
그런데 나중에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어른들도 문제 있지만 문제에 빠진 청소년들도 문제가 있더라 구요. 그래가지고 어른들에게도 책임을 묻고, 청소년들에게도 책임을 묻는 이런 방향으로 또 이렇게 나가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뭔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 하면, 어른들이 만든 문제 속에 청소년은 이미 빠졌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문제가 구조적으로 지속 될 겁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지속해서 빠질 겁니다. 그래서 이 시간을 빌어서 조금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것이요, 여기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능력 있는 아이들을 만들어 놓지 못하면 소망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지속해서 말세가 갈수록 점점, 점점 구조적으로 청소년들이 문제가 '있다, 없다! 이전에 이 구조적인 문제 속에 빠지도록 되어있습니다. 앞으로 뭐, 문화 문제라던가 여러 가지 모든 사건을 통해서 그렇게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여러 가지 매스컴이라는 것을 통해서 보면서 느낀 것은 이상하게 우리나라가 이런데 잘 빠져요. 아예 급속도로 잘 빠지더라 구요. 그래서 청소년 흡연 율이라던가 타락 율이라든가 이런 것이 지금 세계에서 제 1위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될 것 같지만 이해될 수 있어요. 왜? 원래 우리나라 사람이 단순하게 이런 짓을 잘 해요. 쉽게 빠지고 쉽게 또 나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기도 있어요.
그래서 문제는 여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능력 있는 아이들을 키운다' 라는 것은 여러분과 저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게 안 되는 겁니다. 다른 어디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여러분과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오직 교회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도들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오직 송현교회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책임입니다. '다른데서 할 수 있다!' 맡기고 나가면 돼요. 그러나 아닙니다. 말세가 될수록 정말 우리 교회, 그리고 성도 여러분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아이들을 키우고 만든다면 이상하지만 그렇게 인도하는 것이 누구에게도 허락지 않는 말세에 특별한 은혜요, 그러면서 기회요, 책임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좀 붙잡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 이런 구조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이들에게 능력 있는 아이들을 만들 수 있는 길이, 만들 수 있는 교회가 다른 어느 교회보다 여러분에게, 제게 책임이 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붙잡고 뭔가 진지하게 좀 기도하고 '인도를 받아야 되겠다!'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 좀 말씀을 잡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되겠습니다.
제일 먼저 뭐를 좀 말씀을 하고 싶으냐 하면, 실제적으로 아이들이 응답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사실을 실제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지난주에도 설명을 드렸습니다 만은, 우리 송현교회에서 여러분 '교회에 모인다, 교회 온다!' 그럴 때에 여러 가지 많은 안 좋은 조건들이 많습니다. '뭐, 송현교회 어떻다. 저렇다!' 뭐, 그것도 조건이 되겠지 만은 제일 먼저 여러 가지 조건들이 일단은 우리 교회 오면 인정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온 사람들이 좀 그런걸 느끼는 것 같아요. 이제는 인정이 날 때쯤 되었는데 원래 이 대구라는 사회가 좀 그런 것이 있어요. 1, 2년 동안은 인정이 없다가도 한 2년만 지나버리면, 또 찰떡같아요. 별로 표정은 없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마 차츰, 차츰 그걸 느낄 겁니다 만은, 그러나 인정이 있다, 없다. 문제가 아닙니다. 내게 여러분에게 응답이 되고, 치유가 되고, 그리스도의 역사가 사실이 되어 버리면 상관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암만 밀어도 안 가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안 된다! 암만 웃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인들 붙들고 좀 이상하다 싶으면 백 번 웃어 보세요, 더 이상해집니다. '야, 진자 송현교회 이상하네!'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원래 생긴 데로 노는 것이 좋습니다. 그 뭐 덤덤하면 그대로 있는 겁니다. 뭐 하기야, 일평생 무심하게 살았었는데 또 뭘 그렇게 생색을 내겠습니까 만은, 어쨌든 문제는 뭐냐? 하나님의 사실이 내 안에 지금 사실이 되어 있으면 다 괜찮습니다. 아무리 문제가 생겨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바울을 요즘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바울이 지금 전도 사역을 하고 있는 과정 속에서 어떤 문제가 와도, 문제가 있어도 당당하더라 구요. 뭐 한번도 당황하거나 이상하게 흔들리거나 그런 게 없어요. 그래서 그 요즘 바울에 마지막 사도행전 부분을 보면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는 사건이라든지! 그 다음에 그 광풍을 만나기 이전에 바울에 의견이 거절이 되는 사건이든지. 뭐, 이렇든 저렇든 바울은 거절이 되도 당황하고 실망하지 않고 또 안되었다고 하지 않고 늘 당당합니다. 그 다음에 잡혔을 때도 늘 당당하고 늘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심지어 유라굴로 광풍대문에 14일 동안 먹고 마시는 일을 하지 못하고 죽음 직전에 있을 때도 바울은 당당했습니다. 멜리데 섬에 가서 독사가 물었을 때도 그냥 뚝 떨어버리고 당당했습니다. 모든 문제가 도전! 그 다음에 당당함 그것으로 일관되었습니다. 한번도 흔들린 기색이 없어요.
그러나 뱃사공들 보니까 난파선이 되어 가지고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싶을 때에, '이제는 우린 죽었구나!' 생각했던지 도망가려고 그네 줄을 준비하고 도망치려고 하는 이런 모습을 봅니다. 바울이 그것을 보고 군사들에게 저들이 도망가면 우리가 구원받기 힘드니까 안 된다 그러니까 그네 줄을 끊어 버리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모습들이라든가 바울은 벌써 이런 어떤 과정 속에서 한번도 그의 인생 속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와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그게 딱 한가지입니다. '어제 밤에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내 곁에 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 중에' 뭐가?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하마!'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의 고백입니다. 받아합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확신합니다. 이게 바울의 인생입니다. 거의!
그래서 여러분 오늘 새삼스럽게 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이 축복과 은혜가 바울은 다 커 가지고, 성인이 되었죠. 다메섹 도상에서 보좌 우편에 계시는 하나님, 부활하신 하나님, 그 역사의 사실을 바울은 체험해 버렸습니다. 이걸 사실로 가졌어요. 여러분 그때부터 바울의 인생은 한번도 바꾸어 진 일이 없습니다. 여기에 제가 조금 드리고 싶은 것은, 이 부활과 이 축복의 생명! 쉽게 말해서 구원의 생명을 어른들이 어느 순간 체험을 해도 이렇게 확실하게 인도함을 받아갈 수 있는데... 왜? 저는 오늘 부탁드리는 것보다도 여러분들이 다 마음에 붙잡고 기도하고 해야 될 것이요. 이 부활의 생명을 어릴 때에 사실로 붙잡았다! 이건 너무 귀중한 축복이 됩니다. 너무 귀중한 은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새삼스럽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말할 것도 없죠. 이것이 안 되었을 때에는 어떤 경우가 있느냐 하면, 믿기는 믿어요. 믿기는 믿으면서도 자꾸 중간, 중간 뭔가 이 자꾸 영향을 받더라 구요. 제가 심방을 하면서 쭉 물어봤습니다. 이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좀 때에 따라서 물어보니까! 확실히 믿는 분들이 초 신자일수록 더 확실하게 대답을 해요. 그 다음에 묵은디이일수록 씩 웃으면서 넘어가는 경향이 있고 그러나 한결같이 거기서 느낀 것은 뭔가 자연스럽게 확실히 믿고 대답한다는 그런 기쁨보다는, 그냥 믿음으로 일시적으로 대답하고 그런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정말 뿌리깊은 어떤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조금 느낌에 있어서, 그러니까 내가 잘못 느낀 건지 모르지 만은... 이게 다른 게 아닙니다. 어릴 때에 이 은혜의 역사가 확인되면 너무 살아갈수록 자연스럽습니다. 이게 얼마나 귀중한지 몰라요. 어릴 때에 이런 생각 변화, 의식 변화! 말하자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안에 오신 이 축복과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신다는 이 축복의 역사가 사실로 마음에 와 닿아버리면요. 너무 자연스럽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9절에 제가 특별히 좀 포인트를 두었어요. 9절에 뭐라 그랬냐 하면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어릴 때에 기도 응답을 받았다. 여러분 간단한 것 같지만 자연스럽습니다. 커 가면 커 갈수록 뭐냐하면, 문제나 사건이 생기면 절대로 당황하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저절로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그 목회 하는 과정 속에서 제가 어머니를 통해서 어머니가 신비 성향이 많이 있었습니다 만은, 어머니를 통해서 내게 전해준 것이 있다 그러면 뭐냐하면, '기도하면 된다!' 는 겁니다. 기도하면 된다는 것! 그래서 제가 이 지금까지 목회를 해오는 과정에 있어서 가난한때도 있었고, 개척교회 뭐, 시골교회! 전혀 재정적으로 안 되는 그런 교회도 들어가서 감히 모든 보조를 완전히 끊어 버리고, 갈 때마다 왜, 하나님의 교회가 보조받아야 되느냐?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딱 기도하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나가면 반드시 됩니다. 안 될 이유가 없습니다. 했던 부분이, 배경이 어릴 때입니다. 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은 확신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어느 교회 가던지 인간 보조는 제가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되는데... 그래서 지금 까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까지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뭐 좀 지나치게 좀 신비적인 경향이 있어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40일 금식기도도 하고 이런 배경이 왜냐? 기도하면 된다는 것이 제게 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있던지 당연히 뭐냐? 자연스럽게 내게는 기도하는 것으로만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너무 귀중한, 어릴 때에 구원의 확신과 그리스도의 사실의 역사가 가슴속에 확인이 되는 만큼 구조적인, 아무리 모든 어렵고 힘든 문제 속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 있는 아이들이 됩니다. 이걸 바로 해 줘야 됩니다. 어릴 때라는 것이 참 중요한 겁니다.
제가 어릴 때에 어떤 그 배경이 있느냐 하면, 육체적으로는 저희 아버님이 너무 엄하셨다고 그렇게 지금 기억이 나요. 뭐 엄청나게 엄하신 그런 배경이에요. 그러니까 아버지께 제가 '뭘, 달라!' 소리를 못했어요. 아예, 이 공과금은 하는 수 없이 그 납부금을 내야 되니까! 요즘은 뭐 전부 은행으로 가고 부모들이 다 내지만 옛날에는 그게 아니었어요. 납부금 못 내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았으니까! 그래서 납부금 통지서가 오면, 통지서 같다 주는 것으로 끝냈습니다. 그 이상 더 말을 못했어요. 왜? 아버지가 한번 딱 말해서 주고, 이런 어떤 성품도 아니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또 그럴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도 아니고 이러니까 뭘 달라 그러면 몇 번 말해야 내가 받지, 그냥 한번에 뭐 '아버지!' '아빠!' 소리도 못했어요. 그때는 '아버지' 이랬습니다. 그래서 그걸 한번 거절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참 받기가 힘들어요.
이런 어떤 어릴 때 인상이 뭐냐하면, 제가 다른 사람에게 뭐를 요구하는 것을 전혀 못해요. 그런 어떤 그 습관이 뭐냐하면, 아버지로부터 내가 구하면 받았다는 것이 되어 버렸으면, 어느 정도 됐으면, 반대로 쉽게 '뭘 달라!' 그러고 이렇게 될 건데, 저는 그게 안 돼요. 전혀 다른 사람 앞에 뭘 얻는 것을 '죽어도 못한다!' 그러면 이상하죠. 못해요. 너무 이것이 안 되니까! 남의 집에 가서 주는 것은 할 수 있어도 '괭이' 농촌에 말하자면 호미 한 자루 가져오는 것도 말하기 힘들어요. 그게 뭐냐하면, 어릴 때 배경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버지로부터 쉽게 받았던 그런 것이 내 마음에 되어 있으면 쉽게 어디서 달라! 그럴 텐데 그게 안 되더라 구요.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나는 나름대로 뭘 했느냐 하면, 너무 이래서는 안 된다 싶어서 제가 작정하고 나갔던 그 무전 여행 배경 속에서 이게 있습니다. 나는 남의 집에 가서 도저히 '밥 주십시오!' 하는 그런 건 죽어도 못하니까! 그런데 과연 나가보니까, 죽어도 못하겠더라 구요. 몇 일을 굶어도 못하겠더라 구요. 그런데 너무 굶으니까, 드디어 밥을 얻어먹어 봤습니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변신입니다. 여러분 간단하잖아요. 배고프면 가서 '밥 달라!' 그러면 먹을 것이 왜 없습니까! 그게 안 되더라 구요. 어릴 때에 나는 아버지로부터 쉽게 받아본 적이 없어요. 이것이 내 인생 속에 쭉 내려가면서 그런 것이...
더 나가서 뭐냐하면, 대인 관계가 소극적이 되는 배경이 이것입니다. 여러분 왜, 오늘 어린 자녀들에게 자녀들과 같이 대화하고 이걸 잘 하라 그러느냐! 그리고 요즘은 뭐 아이들이 달라 그러면 무조건 주잖아요. 이것도 문제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줘요. 무조건 준다는 생각만 하면, 아무데나 가서 자기 것같이 가져가 버리고 이런 문제가 나오거든요. 그것도 예의를 차릴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한번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본 적이 없다! 안됩니다. 기도라는 자체가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구한다는 자체가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어떤 청년이죠. '하나님 아버지!' 그러니까, 자기는 하나님을, 하나님만 불렀지, 아버지는 절대로 붙여본 적이 없대요. 왜? 아버지는 어릴 때에 너무 이상한 아버지, 평생을... 하나님은 하나님 밖에 불러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그래요. 어릴 때에 그 상처입니다. 여러분 어릴 때에 이걸 풀어주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요. 어릴 때 가지고 있는 이것이 얼마나 위대하냐? 너무 너무 위대합니다. 여러분 간단하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 설명하고 영접하는 것이 어릴 때에 간단한 문제 같지만 일생을 엄청나게 지배합니다.
저는 어릴 때에 교회에서 '시냇물 졸졸졸~' 늘 불렀던 노래 '가자 어디로 들로 산으로~' 전부 동요 아닙니까! 그렇게 부르면서도 그 어설픈 성경의 창조론을 어릴 때에 들었어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전 세계를, 지구를 창조하시고 땅에 나는 풀도 짐승도 고기도 종류대로 만드셨다." 절대 진리는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다. 절대로 바꾸어 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때에 사실은 얼마나 많은 그런 복음을 가지고 설명을 받은 지는 나는 기억은 잘 못하지만, 나는 내가 볼 때는 요즘처럼 확실한 복음 가지고 설명하지 않은 것 같아요. 왜? 노래 가르치는 것 보면 알아요. 뭐, 전혀 복음이 없는 노래거든요. '가자 어디로 들로 산으로' 한번 해 보세요. 여러분 동요이지,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 '시냇물 졸졸졸 흘러, 흘러 내려와 돌 위에 부딪혀 돌돌 흘러서...' 내가 너무 잘 기억합니다. '재미로운 이야기 서로 속삭이면서...' 그런 것 부르면서도, 그래도 이야기는 창조론을 들었어요.
그런데 내 인생에 있어서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뭘 배우느냐? 진화론을 배웠습니다. 중학교 들어가면서 계속해서 진화론을 구체적으로 배웠습니다. 첫 번 세대 'F1, 2' 나가면서 그 다음에 이걸 구체적으로 배우는데, 제가 중학교 때에 그걸 생물시간에 배웠거든요. 생물시간에 지금도 기억해요. 제가 시험을 치면요, 생물시간에 좀 자랑이 될 것 같아서 성적은 말 안 하겠습니다 만은, 일단 잘했습니다.
그랬는데도 이상합니다. 어릴 때에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것이 내 마음에 먼저 들어왔기 때문에 한번도 진화론을 믿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안 믿습니다. 절대로 어느 종류가 진화해 가지고 꼬리가 끊어지고, 어느 종류가 진화해 가지고 인간 비슷하게 되고, 어느 종류가 진화해 가지고 원숭이가 사람이 됐다. 나는 절대로 믿어지지를 안 해요. 어릴 때 나는 창조론을 배웠습니다.
여러분 뭔 말입니까? 여러분 어릴 때에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하나님의 생명,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해 나갈 수 있다. 이 사실이 자연스럽게 되어져버리면요, 이것이 사실로 되어지면 시간 갈수록 믿어진다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마음속에 저절로 자리 잡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안 되면 노력하고 애쓰는 것으로 많은 세월 허비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 안 드렸습니까! 1부 예배 때 잘못 찬양을 불렀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무 사실을 불렀어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어떻게요?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왜, 내가 그 찬송이 그렇게 사랑을 많이 받았느냐? 시골에 가면요. 할머님들이 이 찬송 늘어지게 '네~~~ 주를' 늘어지게 부르거든! 다른 건 못 불러도 이건 잘 불렀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느냐? 자기의 실제 문제입니다. 왜? 찬송하며 가는 사실적인 누림은 안돼요. 그건 꿈이지 안 되고 있습니다. '야곱이 돌 단을 쌓고 돌 베개 베고 잠 같지만은' 그래도 '꿈에도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꿈뿐이지, 사실은 늘 안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것이 안 되었어요.
그런데 이 사실이 사실로 어느 순간 바울처럼, 한번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바울아!' 한번만 체험을 해도 생각이 달라져 버립니다. 그런 사실들을 중간에 겪어 보지도 못했어요. 뭔가 말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뭔가 요즘도 설명이 앞뒤 딱 맞아 가지고 '예수는 그리스도!' 설명은 잘 듣는데, 고개는 끄덕여 지는데, 사실적인 문제로 왔는데 이 사실이 영적으로 우리 가슴속에 사실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조금만 우리가 사실적인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누린다는 정도가 아니고 기쁨과 감사가 사실이 되고 참 평화가 임하게 되는데 이 사실이 안 되어 있으니까! 맞기는 맞는 것 같은데 늘 뭐합니까? 애를 쓰는 정도이지, 실제가 안 되더라 이겁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어릴 때에 조금만 되었다! 조금만 된 것이 아니고 그것이 기점이 되어 가지고 성장하면 할수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요. 나는 이 사실이 위대하다 싶어요. 나는 진화론은 안 믿고 창조론을 굳게 믿는 것은, 어릴 때에 내가 들었던 어설픈 교사로부터 별로 복음도 안 된 교사로 통해서, 이야기로 통해서, 성경이해를 가졌던 창조론에 대해서, 어릴 때 들었던 이것 때문에 너무 위대한 믿음이 굳혀졌습니다. 뭡니까? '이 땅에 모든 문제는 창조이지, 진화가 된 것이 아니다!' 이건 누가 설명을 해서 되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딱 자리잡고 있어요. 여러분 이것은 자연스럽게 오는 겁니다.
좀 더 나가서 구원의 문제입니다. 이제 죽었다가 살아나셨다. 여러분 구원받는다는 문제가 이것이 사실이 안 되면, 진짜 '내가 죽고 예수가 살고, 하나님의 인도에 지도를 받고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 이 사실 자체가 안 돼요. 우리가 어디서 이것이 비롯되느냐? 지난주에도 설명을 했습니다. 구원에 기초적인 가장 첫 출발이 뭐냐?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와 상관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살아나심이 바로 나와 상관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분명히 믿어야 됩니다. 이 시간에 눈을 감고 묵상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확실히 이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은 우리 청년들한테 한번 물어봤어요. 예배를 드리다가 청년들에게 물어봤어요. '죽었는 것을 믿느냐? 살았는 것을 믿느냐?' 이러니까 뭐라 그러냐 하면요. '믿습니다!' 그러는데 왜, '(실없는 미소를 띠며 씩 웃으면서) 믿습니다!' 그러더라 구요. 내가 그것을 보고 '오냐, 알았다. 믿기는 믿는데 확신이 없구나!' 이게 청년들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릴 때에 이 사실이 와졌다! 참 엄청난 축복이거든요.
저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사실상 확실히 믿는다 이전에 그렇게 큰 갈등은 없었습니다. 왜? 어릴 때에 예수 그리스도 죽음에 대해서, 부활에 대해서 방황하고 그랬지만은 그것을 그대로 성경대로 뭔가 믿었던 교단에서 자랐고 그렇게 가르침은 그래도 받았습니다. 받았는데 그것이 뭔가 지식으로 자리 잡았어요. 성장하는 과정에서 내가 성령의 구체적인 체험이 나오고 그 다음에 더군다나 요즘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이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설명이 나올 때에 그때 가졌던 조그만 내 신뢰와 믿음이 어떻게 됩니까? 확증을 주는 것 있잖아요! 확증을...
그 다음에 말씀을 볼 때마다 그 말씀이 나올 때에 내가 어떤 근본적인 의심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믿음의 뿌리로 다가오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더라 구요. 아마 여러분 오늘 분명히 분석을 해야 될 겁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 나셨습니다. 믿습니까? 분명히 믿습니다 만은, 체질로 딱 그게 마음에 와 닿지는 않거든요. 많은 경우! 믿기는 믿어요.
혹시 안 믿는다는 마음이 양심에 있다면 '나는 버림받았느냐?' 괜찮습니다. 정상입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으면 왜, 복 받았다 그럽니까?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 죽었다가 살아 나셨다!' 믿습니다! 그래 놓고서 갈등이 온다. 그런 정도만 해도 엄청난 축복입니다. 아예 믿을 수조차도 없어요. 정상인이란, 그렇습니다. 그것 가지고 갈등하고 있다! 내게 의문이 나고 있다! 그건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왜 여기에서 흑암 세력이 깨어지거든요. 여기서 모든 축복이 나오게 됩니다.
그 첫 번째가 뭔지 압니까? 바울의 오늘 말씀 보면요. '어떻게든지 내가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부활에 참여를 한다' 그랬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내가 죽는 만큼" 뭐가 나와요? 부활의 능력이 나옵니다. 죽는 만큼... 죽음이 없다! 그러면 부활이 나올 수 없어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실적인 죽음으로 여러분 중심 속에 하나님이 정말 사단의 권세와 사단의 저주와 사단의 모든 일들을 완전히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해서 다 이루었다! 무덤까지 내려 가셨습니다!
이것이 나 위해 우리 위해 이 사실이 믿어지는 만큼 부활의 생명의 역사가 비로소 체험됩니다. 이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죽는 만큼 능력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바로 이것과 연결되는 겁니다. 내가 죽는 만큼 나는 없어지고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라 그러는데 하나님의 주권이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주권 속에 세워진 사실에는 어떤 문제에 부닥쳐도 갈등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어릴 때부터 이루어졌다! '위대합니다!' 나는 이걸 위대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지난 과거를, 사실은 뭐, 그렇게 훌륭하지도 않지만 적은 경험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가고, 하나님 앞에 나가면 응답 받는다는 조그만 것까지도 어떤 문제가 와도 한번도 흔들리지 않더라 구요. 그러면 기도가 나가고 기도하게 되고 물론 여기서 별나게 기도한다고 설치기도 했지만... 왜, 그러냐? '기도하면 된다' 는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하나님께서 실패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하신다는 걸 알았어요.
혹시 이 시간에, 이 말씀을 듣는 동안에 여러분 자신이 기도하면, 긍휼에 풍성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가기만 하면 응답하신다는 믿음 여러분 자신이 갖는다! 성공입니다. 단번에 성공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우리 후손들에게 조금만 붙잡게 만들어 줬다! '능력 있는 아이들' 이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어떤 문제가 나와도 이들이 좌절하거나 주저 않지 않습니다. 기도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사건과 문제 속에 구조적인 틀 속에서 주저앉지 않습니다.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죽고 난 후에도 말입니다.
왜 이런 말씀합니까? 나는 어머님 일찍 돌아 가셨고 아버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말하자면, 혼자 쫌 고아라 그러면 이상하지만, 방황했습니다. 그리고 온통 안 돌아다닌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지난 과거에 대해서 상당히 좀 복잡한 과거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은 그런 과거 속에서도 오늘에 이른 이 자리에 서 있었다는 배경이 뭔지 압니까? 어릴 때에 내게 주었던 믿음입니다. 그리고 어릴 때에 부모로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면 된다!' 라는 적은 믿음! 그것도 요즘처럼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확실한 것 줬다. 그러면 문제는 달라졌죠..
그런데 그 믿음이 나를 완전히 구조적인 그런 밑바탕에 들어가서도 다시 고개를 들로 일어 설 수 있었던 배경이었습니다. '잘했다, 못했다!' 이전입니다. 여러분 자식들에게 이 언약에 축복을, 이 구원에 위대한 비밀을 어릴 때에 붙잡도록 해 준다! 이것은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능력 있는 아이들로 키운다! 이끈다! 이런 말입니다. 능력 있는 아이들로 이 땅을 살아가게 만드는 축복된 역사라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긴 시간 말씀을 드리지 못합니다. 어린이 주일이라 그래서 특별히 그저 우리가 한가지 가질 수 있다면, 여러 가지 문제나 사건을 당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이 조용히 잘못해서 복음을 말하지 못하고 잘못된 것으로 어린 아이들에게 뭔가 들어가게 되면요. 애들은 단순해 가지고 굉장히 다른 길로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 이단들이 아이들을 이용한 것이 그런 배경입니다. 여러분 껌 하난 들고 사명을 심어주니까요, 완전히 장사꾼이 되어 버립니다. 아이들이요! 복음이 없을 때에 이것은 엄청난 문제가 옵니다.
하물며 여러분 바른 복음을 주었을 때에 우리 어린 아이들이, 그리고 우리 후손들이 이 땅과 세계를 향한 그들의 해석, 그들에게 이해가 얼마나 엄청나게 될 것인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영접했을 때에 어린 마음속에, 잠시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평안이 임했습니다. 이 작은 평안 같을지 모르지만 세계를 싸 않는 평안입니다. 이 작은 것일지 모르지만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겁니다.
어릴 때에 이 축복이, 여러분과 저희 후손들이 잡고 있는 이 축복이 간단하게 어느 날 부모로부터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그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임재 하시며 그 어린 가슴속에 하나님의 평안이 임재 했을 때에 이 평안이야말로 우주를 덮는 평안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의 희망입니다. 능력 있는 자식들을 만드는, 우리 후손들을 만드는 귀중한 축복의 역사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능력있는 아이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 어른들이 만든 문제 속에 수많은 청소년들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른들이 먼저 문제지만, 또한 문제에 빠진 청소년들도 문제입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문제들은 구조적으로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있는 아이들을 만들어 놓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땅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 세상 사람들은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들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 일을 할 수 있는 은혜와 기회와 책임이 있습니다.
[2] 아이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 교회에 올 때 좋지 않은 조건이 많이 있지만, 나에게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고, 치유가 되어지고, 그리스도의 역사가 사실이 되면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되어지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들을 갖추어도 소용없습니다.
☞ 바울은 어떤 문제 속에서도 당당했습니다. 그러한 배경은,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자녀들이 어릴 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사실로 붙잡는다면 너무나도 놀라운 축복이 될 것입니다.
☞ 우리의 자녀들이 어릴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면, 살아가면서 문제나 사건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하나님 앞에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3] 아이들이 실제적으로 응답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 먼저 복음을 올바르게 가르쳐서, 아이들에게 복음이 정확하게 심어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아이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서, 우리의 아이들이 부활의 생명을 확신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실적으로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체험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 우리의 아이들이 이러한 것들을 사실적으로 체험할 때, 어떠한 문제가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설 수 있습니다.
▣ 언약 잡은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살아계시며 응답하시는 사실들을 체험하며 삶 속에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들 속에서 담대하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마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 6: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마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줄 생각하느니라
(마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어린이 주일이라고 꼬마가 앞에 나와 서서 노래를 했습니다. 사실은 이 자리에 절대로 못 나오는 시간인데도 오늘 특별히 나왔습니다. 어린이 주일이라서 그렇게 이해가 됩니다. 내가 노래를 가만히 들으면서 뭐를 느끼느냐 하면, 우리교회 성가대원들은 그 음성이 상당히 맑아요. 그런데 우리 어린아이에 비해서는 꼭 구정물 같은 음성이더라 구요. 아, 이렇게 차이가 나는 구나!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마 내 느낌이겠죠. 오늘 어린이 주일이라고 하니까, 그런 느낌이 더 든 것 같습니다. 이런 어린 아이들에게 능력 있는 아이들을 만들어야 된다! 오늘 그래서 제목을 '능력 있는 아이들' 그렇게 제목을 잡았습니다. 자식들을 바로 교육을 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요구되는 현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일을 위해서 갖은 애를 쓰고 있지만 현실은 더 이런 문제가 어두워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5월 5일! 어제 잠깐 등산을 한다고 조금 걸었습니다. 전 가족들이 그 등산하는데 아이들의 손을 전부 잡고 올라 왔더라 구요. 와 가지고 가는 것을 이렇게 보면서 어떻게든지 아이들을 바로 키우려고 하고 애를 쓴다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더욱이 가장 기초적인 학교 수업조차도 안 되는 이런 시점에서 유달리 '어린이 날!' 이라 그래가지고 행사도 하고 그 다음에 여러 가지 것을 보면서 이상하게 마음이 공허해지는 것을 느끼고 있어요. 얼마나 안 되고 있느냐? 이런 사실 속에서 마음이 괜히 허전한 것이, 그런 생각이 들더라 구요. 여러 가지 행사를 또 TV를 통해서 화면을 보고 그렇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아는 데로 자녀들이 문제 있다! 청소년 문제 있다! 그건 아니라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우리 다락방에서 누가 문제 있어요? 어른들이 문제 있다! 그러니까 청소년들은, 어린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문제 속에 어떻게 했습니까? 빠졌어요. 그래가지고 그 지난번 신문에, 또 그리고 검찰에서 이렇게 보니까, '원조교제 하는 것은 어른들이 문제이니까! 어른들만 잡아서 뭐 취조를 하고 그렇게 하자!' 이래서 어른들을 뭐 명단조사하고 찾고 그렇게 하더라 구요. 어린아이는 뭐 그대로 보내고...
그런데 나중에 어떤 결과가 나오느냐 하면, 어른들도 문제 있지만 문제에 빠진 청소년들도 문제가 있더라 구요. 그래가지고 어른들에게도 책임을 묻고, 청소년들에게도 책임을 묻는 이런 방향으로 또 이렇게 나가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뭔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 하면, 어른들이 만든 문제 속에 청소년은 이미 빠졌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문제가 구조적으로 지속 될 겁니다.
그리고 청소년들은 지속해서 빠질 겁니다. 그래서 이 시간을 빌어서 조금 심각하게 생각해야 될 것이요, 여기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능력 있는 아이들을 만들어 놓지 못하면 소망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지속해서 말세가 갈수록 점점, 점점 구조적으로 청소년들이 문제가 '있다, 없다! 이전에 이 구조적인 문제 속에 빠지도록 되어있습니다. 앞으로 뭐, 문화 문제라던가 여러 가지 모든 사건을 통해서 그렇게 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제가 이 여러 가지 매스컴이라는 것을 통해서 보면서 느낀 것은 이상하게 우리나라가 이런데 잘 빠져요. 아예 급속도로 잘 빠지더라 구요. 그래서 청소년 흡연 율이라던가 타락 율이라든가 이런 것이 지금 세계에서 제 1위입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될 것 같지만 이해될 수 있어요. 왜? 원래 우리나라 사람이 단순하게 이런 짓을 잘 해요. 쉽게 빠지고 쉽게 또 나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기도 있어요.
그래서 문제는 여기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능력 있는 아이들을 키운다' 라는 것은 여러분과 저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게 안 되는 겁니다. 다른 어디에서 이런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여러분과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오직 교회만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성도들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오직 송현교회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책임입니다. '다른데서 할 수 있다!' 맡기고 나가면 돼요. 그러나 아닙니다. 말세가 될수록 정말 우리 교회, 그리고 성도 여러분 이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아이들을 키우고 만든다면 이상하지만 그렇게 인도하는 것이 누구에게도 허락지 않는 말세에 특별한 은혜요, 그러면서 기회요, 책임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좀 붙잡고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앞으로 이런 구조에 빠져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이들에게 능력 있는 아이들을 만들 수 있는 길이, 만들 수 있는 교회가 다른 어느 교회보다 여러분에게, 제게 책임이 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오늘 이 시간 말씀을 붙잡고 뭔가 진지하게 좀 기도하고 '인도를 받아야 되겠다!'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 좀 말씀을 잡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야 되겠습니다.
제일 먼저 뭐를 좀 말씀을 하고 싶으냐 하면, 실제적으로 아이들이 응답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사실을 실제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지난주에도 설명을 드렸습니다 만은, 우리 송현교회에서 여러분 '교회에 모인다, 교회 온다!' 그럴 때에 여러 가지 많은 안 좋은 조건들이 많습니다. '뭐, 송현교회 어떻다. 저렇다!' 뭐, 그것도 조건이 되겠지 만은 제일 먼저 여러 가지 조건들이 일단은 우리 교회 오면 인정이 없어요. 그러니까 이제 온 사람들이 좀 그런걸 느끼는 것 같아요. 이제는 인정이 날 때쯤 되었는데 원래 이 대구라는 사회가 좀 그런 것이 있어요. 1, 2년 동안은 인정이 없다가도 한 2년만 지나버리면, 또 찰떡같아요. 별로 표정은 없어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마 차츰, 차츰 그걸 느낄 겁니다 만은, 그러나 인정이 있다, 없다. 문제가 아닙니다. 내게 여러분에게 응답이 되고, 치유가 되고, 그리스도의 역사가 사실이 되어 버리면 상관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암만 밀어도 안 가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안 된다! 암만 웃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인들 붙들고 좀 이상하다 싶으면 백 번 웃어 보세요, 더 이상해집니다. '야, 진자 송현교회 이상하네!'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원래 생긴 데로 노는 것이 좋습니다. 그 뭐 덤덤하면 그대로 있는 겁니다. 뭐 하기야, 일평생 무심하게 살았었는데 또 뭘 그렇게 생색을 내겠습니까 만은, 어쨌든 문제는 뭐냐? 하나님의 사실이 내 안에 지금 사실이 되어 있으면 다 괜찮습니다. 아무리 문제가 생겨도 상관없습니다.
나는 바울을 요즘 보면서 뭘 느끼느냐 하면, 바울이 지금 전도 사역을 하고 있는 과정 속에서 어떤 문제가 와도, 문제가 있어도 당당하더라 구요. 뭐 한번도 당황하거나 이상하게 흔들리거나 그런 게 없어요. 그래서 그 요즘 바울에 마지막 사도행전 부분을 보면서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는 사건이라든지! 그 다음에 그 광풍을 만나기 이전에 바울에 의견이 거절이 되는 사건이든지. 뭐, 이렇든 저렇든 바울은 거절이 되도 당황하고 실망하지 않고 또 안되었다고 하지 않고 늘 당당합니다. 그 다음에 잡혔을 때도 늘 당당하고 늘 그렇습니다. 그 다음에 심지어 유라굴로 광풍대문에 14일 동안 먹고 마시는 일을 하지 못하고 죽음 직전에 있을 때도 바울은 당당했습니다. 멜리데 섬에 가서 독사가 물었을 때도 그냥 뚝 떨어버리고 당당했습니다. 모든 문제가 도전! 그 다음에 당당함 그것으로 일관되었습니다. 한번도 흔들린 기색이 없어요.
그러나 뱃사공들 보니까 난파선이 되어 가지고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싶을 때에, '이제는 우린 죽었구나!' 생각했던지 도망가려고 그네 줄을 준비하고 도망치려고 하는 이런 모습을 봅니다. 바울이 그것을 보고 군사들에게 저들이 도망가면 우리가 구원받기 힘드니까 안 된다 그러니까 그네 줄을 끊어 버리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모습들이라든가 바울은 벌써 이런 어떤 과정 속에서 한번도 그의 인생 속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와도 흔들리지 않았어요. 그게 딱 한가지입니다. '어제 밤에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 내 곁에 서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 중에' 뭐가? '머리카락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하마!'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노라! 바울의 고백입니다. 받아합시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확신합니다. 이게 바울의 인생입니다. 거의!
그래서 여러분 오늘 새삼스럽게 좀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은 이 축복과 은혜가 바울은 다 커 가지고, 성인이 되었죠. 다메섹 도상에서 보좌 우편에 계시는 하나님, 부활하신 하나님, 그 역사의 사실을 바울은 체험해 버렸습니다. 이걸 사실로 가졌어요. 여러분 그때부터 바울의 인생은 한번도 바꾸어 진 일이 없습니다. 여기에 제가 조금 드리고 싶은 것은, 이 부활과 이 축복의 생명! 쉽게 말해서 구원의 생명을 어른들이 어느 순간 체험을 해도 이렇게 확실하게 인도함을 받아갈 수 있는데... 왜? 저는 오늘 부탁드리는 것보다도 여러분들이 다 마음에 붙잡고 기도하고 해야 될 것이요. 이 부활의 생명을 어릴 때에 사실로 붙잡았다! 이건 너무 귀중한 축복이 됩니다. 너무 귀중한 은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새삼스럽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서 말할 것도 없죠. 이것이 안 되었을 때에는 어떤 경우가 있느냐 하면, 믿기는 믿어요. 믿기는 믿으면서도 자꾸 중간, 중간 뭔가 이 자꾸 영향을 받더라 구요. 제가 심방을 하면서 쭉 물어봤습니다. 이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좀 때에 따라서 물어보니까! 확실히 믿는 분들이 초 신자일수록 더 확실하게 대답을 해요. 그 다음에 묵은디이일수록 씩 웃으면서 넘어가는 경향이 있고 그러나 한결같이 거기서 느낀 것은 뭔가 자연스럽게 확실히 믿고 대답한다는 그런 기쁨보다는, 그냥 믿음으로 일시적으로 대답하고 그런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정말 뿌리깊은 어떤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을 조금 느낌에 있어서, 그러니까 내가 잘못 느낀 건지 모르지 만은... 이게 다른 게 아닙니다. 어릴 때에 이 은혜의 역사가 확인되면 너무 살아갈수록 자연스럽습니다. 이게 얼마나 귀중한지 몰라요. 어릴 때에 이런 생각 변화, 의식 변화! 말하자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안에 오신 이 축복과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신다는 이 축복의 역사가 사실로 마음에 와 닿아버리면요. 너무 자연스럽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9절에 제가 특별히 좀 포인트를 두었어요. 9절에 뭐라 그랬냐 하면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어릴 때에 기도 응답을 받았다. 여러분 간단한 것 같지만 자연스럽습니다. 커 가면 커 갈수록 뭐냐하면, 문제나 사건이 생기면 절대로 당황하고 염려하지 않습니다. 저절로 어떻게 됩니까?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그 목회 하는 과정 속에서 제가 어머니를 통해서 어머니가 신비 성향이 많이 있었습니다 만은, 어머니를 통해서 내게 전해준 것이 있다 그러면 뭐냐하면, '기도하면 된다!' 는 겁니다. 기도하면 된다는 것! 그래서 제가 이 지금까지 목회를 해오는 과정에 있어서 가난한때도 있었고, 개척교회 뭐, 시골교회! 전혀 재정적으로 안 되는 그런 교회도 들어가서 감히 모든 보조를 완전히 끊어 버리고, 갈 때마다 왜, 하나님의 교회가 보조받아야 되느냐?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딱 기도하면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나가면 반드시 됩니다. 안 될 이유가 없습니다. 했던 부분이, 배경이 어릴 때입니다. 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은 확신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어느 교회 가던지 인간 보조는 제가 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되는데... 그래서 지금 까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까지 배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뭐 좀 지나치게 좀 신비적인 경향이 있어서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40일 금식기도도 하고 이런 배경이 왜냐? 기도하면 된다는 것이 제게 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있던지 당연히 뭐냐? 자연스럽게 내게는 기도하는 것으로만 들어가게 되어있습니다. 너무 귀중한, 어릴 때에 구원의 확신과 그리스도의 사실의 역사가 가슴속에 확인이 되는 만큼 구조적인, 아무리 모든 어렵고 힘든 문제 속에서도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 있는 아이들이 됩니다. 이걸 바로 해 줘야 됩니다. 어릴 때라는 것이 참 중요한 겁니다.
제가 어릴 때에 어떤 그 배경이 있느냐 하면, 육체적으로는 저희 아버님이 너무 엄하셨다고 그렇게 지금 기억이 나요. 뭐 엄청나게 엄하신 그런 배경이에요. 그러니까 아버지께 제가 '뭘, 달라!' 소리를 못했어요. 아예, 이 공과금은 하는 수 없이 그 납부금을 내야 되니까! 요즘은 뭐 전부 은행으로 가고 부모들이 다 내지만 옛날에는 그게 아니었어요. 납부금 못 내는 경우가 허다하게 많았으니까! 그래서 납부금 통지서가 오면, 통지서 같다 주는 것으로 끝냈습니다. 그 이상 더 말을 못했어요. 왜? 아버지가 한번 딱 말해서 주고, 이런 어떤 성품도 아니지만 그렇지도 않아요. 또 그럴 수 있는 경제적인 여유도 아니고 이러니까 뭘 달라 그러면 몇 번 말해야 내가 받지, 그냥 한번에 뭐 '아버지!' '아빠!' 소리도 못했어요. 그때는 '아버지' 이랬습니다. 그래서 그걸 한번 거절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참 받기가 힘들어요.
이런 어떤 어릴 때 인상이 뭐냐하면, 제가 다른 사람에게 뭐를 요구하는 것을 전혀 못해요. 그런 어떤 그 습관이 뭐냐하면, 아버지로부터 내가 구하면 받았다는 것이 되어 버렸으면, 어느 정도 됐으면, 반대로 쉽게 '뭘 달라!' 그러고 이렇게 될 건데, 저는 그게 안 돼요. 전혀 다른 사람 앞에 뭘 얻는 것을 '죽어도 못한다!' 그러면 이상하죠. 못해요. 너무 이것이 안 되니까! 남의 집에 가서 주는 것은 할 수 있어도 '괭이' 농촌에 말하자면 호미 한 자루 가져오는 것도 말하기 힘들어요. 그게 뭐냐하면, 어릴 때 배경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버지로부터 쉽게 받았던 그런 것이 내 마음에 되어 있으면 쉽게 어디서 달라! 그럴 텐데 그게 안 되더라 구요.
이걸 해결하기 위해서 나는 나름대로 뭘 했느냐 하면, 너무 이래서는 안 된다 싶어서 제가 작정하고 나갔던 그 무전 여행 배경 속에서 이게 있습니다. 나는 남의 집에 가서 도저히 '밥 주십시오!' 하는 그런 건 죽어도 못하니까! 그런데 과연 나가보니까, 죽어도 못하겠더라 구요. 몇 일을 굶어도 못하겠더라 구요. 그런데 너무 굶으니까, 드디어 밥을 얻어먹어 봤습니다.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변신입니다. 여러분 간단하잖아요. 배고프면 가서 '밥 달라!' 그러면 먹을 것이 왜 없습니까! 그게 안 되더라 구요. 어릴 때에 나는 아버지로부터 쉽게 받아본 적이 없어요. 이것이 내 인생 속에 쭉 내려가면서 그런 것이...
더 나가서 뭐냐하면, 대인 관계가 소극적이 되는 배경이 이것입니다. 여러분 왜, 오늘 어린 자녀들에게 자녀들과 같이 대화하고 이걸 잘 하라 그러느냐! 그리고 요즘은 뭐 아이들이 달라 그러면 무조건 주잖아요. 이것도 문제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줘요. 무조건 준다는 생각만 하면, 아무데나 가서 자기 것같이 가져가 버리고 이런 문제가 나오거든요. 그것도 예의를 차릴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한번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본 적이 없다! 안됩니다. 기도라는 자체가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구한다는 자체가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아이가 어떤 청년이죠. '하나님 아버지!' 그러니까, 자기는 하나님을, 하나님만 불렀지, 아버지는 절대로 붙여본 적이 없대요. 왜? 아버지는 어릴 때에 너무 이상한 아버지, 평생을... 하나님은 하나님 밖에 불러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그래요. 어릴 때에 그 상처입니다. 여러분 어릴 때에 이걸 풀어주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요. 어릴 때 가지고 있는 이것이 얼마나 위대하냐? 너무 너무 위대합니다. 여러분 간단하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 설명하고 영접하는 것이 어릴 때에 간단한 문제 같지만 일생을 엄청나게 지배합니다.
저는 어릴 때에 교회에서 '시냇물 졸졸졸~' 늘 불렀던 노래 '가자 어디로 들로 산으로~' 전부 동요 아닙니까! 그렇게 부르면서도 그 어설픈 성경의 창조론을 어릴 때에 들었어요.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전 세계를, 지구를 창조하시고 땅에 나는 풀도 짐승도 고기도 종류대로 만드셨다." 절대 진리는 바꾸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셨다. 절대로 바꾸어 지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때에 사실은 얼마나 많은 그런 복음을 가지고 설명을 받은 지는 나는 기억은 잘 못하지만, 나는 내가 볼 때는 요즘처럼 확실한 복음 가지고 설명하지 않은 것 같아요. 왜? 노래 가르치는 것 보면 알아요. 뭐, 전혀 복음이 없는 노래거든요. '가자 어디로 들로 산으로' 한번 해 보세요. 여러분 동요이지,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 '시냇물 졸졸졸 흘러, 흘러 내려와 돌 위에 부딪혀 돌돌 흘러서...' 내가 너무 잘 기억합니다. '재미로운 이야기 서로 속삭이면서...' 그런 것 부르면서도, 그래도 이야기는 창조론을 들었어요.
그런데 내 인생에 있어서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뭘 배우느냐? 진화론을 배웠습니다. 중학교 들어가면서 계속해서 진화론을 구체적으로 배웠습니다. 첫 번 세대 'F1, 2' 나가면서 그 다음에 이걸 구체적으로 배우는데, 제가 중학교 때에 그걸 생물시간에 배웠거든요. 생물시간에 지금도 기억해요. 제가 시험을 치면요, 생물시간에 좀 자랑이 될 것 같아서 성적은 말 안 하겠습니다 만은, 일단 잘했습니다.
그랬는데도 이상합니다. 어릴 때에 내 마음속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것이 내 마음에 먼저 들어왔기 때문에 한번도 진화론을 믿어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도 안 믿습니다. 절대로 어느 종류가 진화해 가지고 꼬리가 끊어지고, 어느 종류가 진화해 가지고 인간 비슷하게 되고, 어느 종류가 진화해 가지고 원숭이가 사람이 됐다. 나는 절대로 믿어지지를 안 해요. 어릴 때 나는 창조론을 배웠습니다.
여러분 뭔 말입니까? 여러분 어릴 때에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고 하나님의 생명,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담대해 나갈 수 있다. 이 사실이 자연스럽게 되어져버리면요, 이것이 사실로 되어지면 시간 갈수록 믿어진다는 정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마음속에 저절로 자리 잡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안 되면 노력하고 애쓰는 것으로 많은 세월 허비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에도 말씀 안 드렸습니까! 1부 예배 때 잘못 찬양을 불렀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너무 사실을 불렀어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어떻게요?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왜, 내가 그 찬송이 그렇게 사랑을 많이 받았느냐? 시골에 가면요. 할머님들이 이 찬송 늘어지게 '네~~~ 주를' 늘어지게 부르거든! 다른 건 못 불러도 이건 잘 불렀습니다.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느냐? 자기의 실제 문제입니다. 왜? 찬송하며 가는 사실적인 누림은 안돼요. 그건 꿈이지 안 되고 있습니다. '야곱이 돌 단을 쌓고 돌 베개 베고 잠 같지만은' 그래도 '꿈에도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꿈뿐이지, 사실은 늘 안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것이 안 되었어요.
그런데 이 사실이 사실로 어느 순간 바울처럼, 한번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바울아!' 한번만 체험을 해도 생각이 달라져 버립니다. 그런 사실들을 중간에 겪어 보지도 못했어요. 뭔가 말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뭔가 요즘도 설명이 앞뒤 딱 맞아 가지고 '예수는 그리스도!' 설명은 잘 듣는데, 고개는 끄덕여 지는데, 사실적인 문제로 왔는데 이 사실이 영적으로 우리 가슴속에 사실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조금만 우리가 사실적인 믿음을 가지고 나가면 누린다는 정도가 아니고 기쁨과 감사가 사실이 되고 참 평화가 임하게 되는데 이 사실이 안 되어 있으니까! 맞기는 맞는 것 같은데 늘 뭐합니까? 애를 쓰는 정도이지, 실제가 안 되더라 이겁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어릴 때에 조금만 되었다! 조금만 된 것이 아니고 그것이 기점이 되어 가지고 성장하면 할수록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아요. 나는 이 사실이 위대하다 싶어요. 나는 진화론은 안 믿고 창조론을 굳게 믿는 것은, 어릴 때에 내가 들었던 어설픈 교사로부터 별로 복음도 안 된 교사로 통해서, 이야기로 통해서, 성경이해를 가졌던 창조론에 대해서, 어릴 때 들었던 이것 때문에 너무 위대한 믿음이 굳혀졌습니다. 뭡니까? '이 땅에 모든 문제는 창조이지, 진화가 된 것이 아니다!' 이건 누가 설명을 해서 되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딱 자리잡고 있어요. 여러분 이것은 자연스럽게 오는 겁니다.
좀 더 나가서 구원의 문제입니다. 이제 죽었다가 살아나셨다. 여러분 구원받는다는 문제가 이것이 사실이 안 되면, 진짜 '내가 죽고 예수가 살고, 하나님의 인도에 지도를 받고 성령의 충만을 받는다!' 이 사실 자체가 안 돼요. 우리가 어디서 이것이 비롯되느냐? 지난주에도 설명을 했습니다. 구원에 기초적인 가장 첫 출발이 뭐냐?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와 상관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살아나심이 바로 나와 상관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을 분명히 믿어야 됩니다. 이 시간에 눈을 감고 묵상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확실히 이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한번은 우리 청년들한테 한번 물어봤어요. 예배를 드리다가 청년들에게 물어봤어요. '죽었는 것을 믿느냐? 살았는 것을 믿느냐?' 이러니까 뭐라 그러냐 하면요. '믿습니다!' 그러는데 왜, '(실없는 미소를 띠며 씩 웃으면서) 믿습니다!' 그러더라 구요. 내가 그것을 보고 '오냐, 알았다. 믿기는 믿는데 확신이 없구나!' 이게 청년들의 문제입니다. 여러분 내가 어릴 때에 이 사실이 와졌다! 참 엄청난 축복이거든요.
저는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사실상 확실히 믿는다 이전에 그렇게 큰 갈등은 없었습니다. 왜? 어릴 때에 예수 그리스도 죽음에 대해서, 부활에 대해서 방황하고 그랬지만은 그것을 그대로 성경대로 뭔가 믿었던 교단에서 자랐고 그렇게 가르침은 그래도 받았습니다. 받았는데 그것이 뭔가 지식으로 자리 잡았어요. 성장하는 과정에서 내가 성령의 구체적인 체험이 나오고 그 다음에 더군다나 요즘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이 설명하면서 구체적인 설명이 나올 때에 그때 가졌던 조그만 내 신뢰와 믿음이 어떻게 됩니까? 확증을 주는 것 있잖아요! 확증을...
그 다음에 말씀을 볼 때마다 그 말씀이 나올 때에 내가 어떤 근본적인 의심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믿음의 뿌리로 다가오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더라 구요. 아마 여러분 오늘 분명히 분석을 해야 될 겁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 나셨습니다. 믿습니까? 분명히 믿습니다 만은, 체질로 딱 그게 마음에 와 닿지는 않거든요. 많은 경우! 믿기는 믿어요.
혹시 안 믿는다는 마음이 양심에 있다면 '나는 버림받았느냐?' 괜찮습니다. 정상입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될 것 같으면 왜, 복 받았다 그럽니까?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 죽었다가 살아 나셨다!' 믿습니다! 그래 놓고서 갈등이 온다. 그런 정도만 해도 엄청난 축복입니다. 아예 믿을 수조차도 없어요. 정상인이란, 그렇습니다. 그것 가지고 갈등하고 있다! 내게 의문이 나고 있다! 그건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왜 여기에서 흑암 세력이 깨어지거든요. 여기서 모든 축복이 나오게 됩니다.
그 첫 번째가 뭔지 압니까? 바울의 오늘 말씀 보면요. '어떻게든지 내가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부활에 참여를 한다' 그랬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내가 죽는 만큼" 뭐가 나와요? 부활의 능력이 나옵니다. 죽는 만큼... 죽음이 없다! 그러면 부활이 나올 수 없어요.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실적인 죽음으로 여러분 중심 속에 하나님이 정말 사단의 권세와 사단의 저주와 사단의 모든 일들을 완전히 해결하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해서 다 이루었다! 무덤까지 내려 가셨습니다!
이것이 나 위해 우리 위해 이 사실이 믿어지는 만큼 부활의 생명의 역사가 비로소 체험됩니다. 이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죽는 만큼 능력이 나오도록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바로 이것과 연결되는 겁니다. 내가 죽는 만큼 나는 없어지고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이라 그러는데 하나님의 주권이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주권 속에 세워진 사실에는 어떤 문제에 부닥쳐도 갈등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어릴 때부터 이루어졌다! '위대합니다!' 나는 이걸 위대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지난 과거를, 사실은 뭐, 그렇게 훌륭하지도 않지만 적은 경험 속에서 하나님 앞에 나가고, 하나님 앞에 나가면 응답 받는다는 조그만 것까지도 어떤 문제가 와도 한번도 흔들리지 않더라 구요. 그러면 기도가 나가고 기도하게 되고 물론 여기서 별나게 기도한다고 설치기도 했지만... 왜, 그러냐? '기도하면 된다' 는 이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하나님께서 실패시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하신다는 걸 알았어요.
혹시 이 시간에, 이 말씀을 듣는 동안에 여러분 자신이 기도하면, 긍휼에 풍성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가기만 하면 응답하신다는 믿음 여러분 자신이 갖는다! 성공입니다. 단번에 성공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어린이들에게 우리 후손들에게 조금만 붙잡게 만들어 줬다! '능력 있는 아이들' 이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어떤 문제가 나와도 이들이 좌절하거나 주저 않지 않습니다. 기도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사건과 문제 속에 구조적인 틀 속에서 주저앉지 않습니다. 일어나게 됩니다. 여러분 죽고 난 후에도 말입니다.
왜 이런 말씀합니까? 나는 어머님 일찍 돌아 가셨고 아버지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어떤 면에서 말하자면, 혼자 쫌 고아라 그러면 이상하지만, 방황했습니다. 그리고 온통 안 돌아다닌 데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의 지난 과거에 대해서 상당히 좀 복잡한 과거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은 그런 과거 속에서도 오늘에 이른 이 자리에 서 있었다는 배경이 뭔지 압니까? 어릴 때에 내게 주었던 믿음입니다. 그리고 어릴 때에 부모로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가면 된다!' 라는 적은 믿음! 그것도 요즘처럼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확실한 것 줬다. 그러면 문제는 달라졌죠..
그런데 그 믿음이 나를 완전히 구조적인 그런 밑바탕에 들어가서도 다시 고개를 들로 일어 설 수 있었던 배경이었습니다. '잘했다, 못했다!' 이전입니다. 여러분 자식들에게 이 언약에 축복을, 이 구원에 위대한 비밀을 어릴 때에 붙잡도록 해 준다! 이것은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능력 있는 아이들로 키운다! 이끈다! 이런 말입니다. 능력 있는 아이들로 이 땅을 살아가게 만드는 축복된 역사라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긴 시간 말씀을 드리지 못합니다. 어린이 주일이라 그래서 특별히 그저 우리가 한가지 가질 수 있다면, 여러 가지 문제나 사건을 당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이 조용히 잘못해서 복음을 말하지 못하고 잘못된 것으로 어린 아이들에게 뭔가 들어가게 되면요. 애들은 단순해 가지고 굉장히 다른 길로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 이단들이 아이들을 이용한 것이 그런 배경입니다. 여러분 껌 하난 들고 사명을 심어주니까요, 완전히 장사꾼이 되어 버립니다. 아이들이요! 복음이 없을 때에 이것은 엄청난 문제가 옵니다.
하물며 여러분 바른 복음을 주었을 때에 우리 어린 아이들이, 그리고 우리 후손들이 이 땅과 세계를 향한 그들의 해석, 그들에게 이해가 얼마나 엄청나게 될 것인가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영접했을 때에 어린 마음속에, 잠시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평안이 임했습니다. 이 작은 평안 같을지 모르지만 세계를 싸 않는 평안입니다. 이 작은 것일지 모르지만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힘이 되는 겁니다.
어릴 때에 이 축복이, 여러분과 저희 후손들이 잡고 있는 이 축복이 간단하게 어느 날 부모로부터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다!' 그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임재 하시며 그 어린 가슴속에 하나님의 평안이 임재 했을 때에 이 평안이야말로 우주를 덮는 평안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의 희망입니다. 능력 있는 자식들을 만드는, 우리 후손들을 만드는 귀중한 축복의 역사입니다.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능력있는 아이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 어른들이 만든 문제 속에 수많은 청소년들이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른들이 먼저 문제지만, 또한 문제에 빠진 청소년들도 문제입니다. 앞으로도 이러한 문제들은 구조적으로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있는 아이들을 만들어 놓아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땅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 세상 사람들은 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들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이 일을 할 수 있는 은혜와 기회와 책임이 있습니다.
[2] 아이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 교회에 올 때 좋지 않은 조건이 많이 있지만, 나에게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고, 치유가 되어지고, 그리스도의 역사가 사실이 되면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되어지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들을 갖추어도 소용없습니다.
☞ 바울은 어떤 문제 속에서도 당당했습니다. 그러한 배경은,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 우리의 자녀들이 어릴 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사실로 붙잡는다면 너무나도 놀라운 축복이 될 것입니다.
☞ 우리의 자녀들이 어릴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게 되면, 살아가면서 문제나 사건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하나님 앞에서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3] 아이들이 실제적으로 응답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 먼저 복음을 올바르게 가르쳐서, 아이들에게 복음이 정확하게 심어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을 아이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서, 우리의 아이들이 부활의 생명을 확신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실적으로 붙잡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체험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 우리의 아이들이 이러한 것들을 사실적으로 체험할 때, 어떠한 문제가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설 수 있습니다.
▣ 언약 잡은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이 모두 하나님의 살아계시며 응답하시는 사실들을 체험하며 삶 속에서 부딪히는 모든 문제들 속에서 담대하게 하소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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